복있는 사람은(소리만)

by bona posted Oct 0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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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김용수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설교가 무엇인가 잠깐 공부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설교”라는 단어 자체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국회 청문회 석상에서 사회를 맡은 의장이 말을 길게 하면 그를 향해 던지는 말이 “당신 설교하지 마시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가운데서도 “설교하지 마!”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제가 설교를 잘 못한다고 “설교하지 마!” 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원래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입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단지 서 있는 설교자인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전달자)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곳에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바른 자세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어느 신학교의 유명한 교수님이 신학생들에게 좋은 설교를 한편씩 써오라고 과제를 내 주었다고 합니다. 한생 한명이 설교를 써왔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설교가 바로 자기의 설교였다고 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여러 사람이 한 설교를 편집해서 출간한 설교집에서 그 학생은 한 단어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베껴온 것입니다. F 학점은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학생이 항의하러 교수님을 찾아와서는 “내 설교에 무슨 잘못이 있어서 F를 주는 것입니까?” 교수님께서는 자신의 원고를 보여주면서 “학생, 그 설교는 이것을 베낀 것이 아닌가?” 그러자, 학생은 얼굴이 새빨재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님은 학생을 꽉 껴안아 주시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다시 학점을 주겠다고 하시고는 F를 지워버리고 A를 주었다고 합니다. 놀란 학생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자네에게는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 좋은 설교인가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는 점일세.” 저도 다른 분이 한 설교를 다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베꼈습니다. 하지만 좋은 설교를 분별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1절은 “복 있는 사람은” 으로 시작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복받기를 좋아하고 또 원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복이 서로 다릅니다. 시편1편을 보면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편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것 세가지와 하는 것 한 가지로 설명합니다.

먼저 하지 않는 것 세가지를 보면

첫째,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악인이란 하나님 없이 인본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악인들의 꾀는 약삭빠름, 거짓, 술수,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둘째,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자기 유익을 위해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죄인이란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지 않고 이 세상의 법을 따라 ‘빗나간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죄인입니다.

셋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만한 자’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멸시하고, 조롱하며, 비웃는 자를 말합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또한 오만한 자는 자기를 과대평가하여 분수를 뛰어넘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만한 자는 자기 힘과 재물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다음은 복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하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2절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모세오경’ 또는 ‘구약의 율법’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성경 말씀 전체를 가리킵니다. 또한 여기서 ‘즐거워하다’라는 말은 마음이 온통 한 곳에 쏠려 있음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온 마음이 집중되어 말씀이 지시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기쁨으로 받는 자인 것입니다.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보면 마음의 여유와 희망, 안정이 느껴집니다. 보기에도 좋은 시원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겉으로 나타나 있는 모습 그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습니다. 외형을 그렇게 만든 것은 뿌리에 있습니다. 세상 속에 사는 예수믿는 사람의 모습이 이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진 “Character(품격,품성)”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 찾을 수 없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은 품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 숨겨진 비결의 해답은 그는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그것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삶의 방식입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늘 푸른 신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인격적 사귐이 있습니다. 땅속에서 뿌리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는 것과 같이 인격을 형성해 가게 됩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먹습니다. 식사하기 전에 사랑의 나눔 찬양을 자주 해서 그런지 이 찬양을 부르면 왠지 배가 고파집니다. 찬양하고 기도하는 이유 중 첫 번째는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이유는 우리자신이 식사를 할 때 기뻐하며 감사하며 즐거움으로 식사를 할 때와, 화나고 긴장하고 급히 먹을 때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즐겁게 식사를 하면 소화도 잘 됩니다. 그러나 화가 나거나 급히 먹게 되면 체하게 됩니다. 영의 양식도 즐겨먹지 않고 건성으로 먹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성경을 가까이 한다고 해도 먹는 방법에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건성으로 읽는다든지 의무감으로 읽는다든지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는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그분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한번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밥을 또 씹고 또 씹고하면서 먹는 것 같이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들려진 내용으로 말씀하시는 분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깊은 사귐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방식에 익숙해 져야 합니다. 말씀이 인격화 되어야 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변질되지 않고 올바른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움직여 가야합니다. 지난 한 주 수학, 영어 캠프를 하면서 깨eke게 된 것과 같이 문제를 소리내어 읽어갈 때 깨우치게 되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며 우리 보나스쿨 학생들이 성장해가듯이 계속 움직여 가는 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가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형통하다.”를 영어로 하면 “Prospers”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번영하다. 번창하다.” 의 의미가 있습니다. 번영한다는 것은 정적인 멈춤보다 동적인 움직임의 의미가 더 큽니다. 지속적인 각성, 새로운 동기부여, 방향제시가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꾀가 아니라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의 교제속에서 그분의 생명과 연결될 때 올바른 목표를 향해 계속 진행해 나가게 됩니다. 세상가운데 어울려 살지만 우리의 품격은 말로 선전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세상가운데 그리스도인의 품격은 하나님과 인격적 사귐에서 시작됩니다. 다음의 네가지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1)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자꾸 바뀌어 갑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을 때는 하나님에 대해서 서리 낀 안경을 통해 보는 것 같이 흐릿합니다. 사랑이 결핍되면 사랑의 하나님을 떠올리게 되고 사회 정의와 관련된 상황에 있을 때는 정의의 하나님으로만 여겨집니다. 상황의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나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갑니다. 설교에서도 마찬가지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 자체의 의미를 통해서 말씀을 묵상하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경우입니다. 본문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의도에 따라 본문의 의미를 찾아가며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큐티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자꾸 바뀌게 됩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이해로 바뀌게 됩니다. 신뢰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속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나오는 첫 번째 변화입니다.

2) 또 하나의 변화는 나 자신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에서 진정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주님과 평생을 함께하게 됩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교가운데서 곤고함으로 살면서 이상적인 내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인격의 어두운 면은 내가 아니라고 부인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사귐을 통해 구체적인 변화는 나 자신과의 화해입니다. 거울을 보며 “너는 너를 니가 아니라고 부인하느라고 얼마나 외로웠니?” 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을 품고 끓어 안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계십니다. 자신과의 화해, 상처입은 자신을 안을 때 평안이 오게 됩니다. 평안과 자유는 자기와의 화해에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여자는 천사(자기를)로 남자는 성인(자기를)으로 여깁니다. 결혼 하고 나면 천사, 성자를 다 버리고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우리로서 살아갑니다. 결혼 예비학교에서 배우자의 장점과 단점을 적으라고 할 때는 단점 적을 때는 두세줄 적고 장점 적을 때는 A4용지 가득 채웁니다. 결혼을 하고 부부 성경공부를 할 때는 반대로 배우자의 장점과 단점을 적을 때는 장점은 두세줄 적고 단점을 적으라고 하면 A4 한 장이 부족하여 한 장 더 달라고 합니다. 단점이 많은 우리는 어둠이 있고, 진노가 있을 때, 두려움이 있을 때 그대로 하나님께 드러내어야 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모습을 갖고 있는 나를 보면서 화를 내고, 나를 용납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상처투성이의 내 모습을 보면 싫습니다. 암송하고 싶은데 암송이 잘 안되는 나를 보면 싫습니다. 수학문제 잘 풀고 싶은데 잘 안되는 나를 보면 힘이 듭니다. 심지어 읽어라고 해도 읽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나와의 화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를 향해 격려하고 화냈던 것을 미안하다고 자기자신에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화해가 이루어지고 나면 있는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가 있는 연약한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사귐속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억압하는 데서 화해하고 강박관념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은 이웃과 화해입니다.

이웃은 나와 경쟁의 관계가 아닙니다. 자기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은 이웃과 화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이루어지고, 나와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나면 이웃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이웃을 존중하게 됩니다. 이웃과 불화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도 하나님과도 형식적인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소원성취의 하나님으로 여기게 됩니다.

마가복음 12장

29.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몸:개역한글)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개역한글에서는 네 몸과 같이가 개역 개정에서는 네 자신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이기적인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학대와 강박관념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남을 향해서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 누군가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정신이 깨어난다고 합니다. 가까운 곳에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거울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울을 향해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매일 하루에 한사람씩 행복하게 해주라. 그 사람이 바로 너 자신일지라도.”

4) 자연과의 관계에서 화해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과의 화해는 이웃과의 화해 나와 하나님과의 화해로 연결됩니다. 생명을 살리고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농업은 자연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논밭에 제초제, 살충제, 살균제를 사용하지 않고, 양계를 하면서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고, 바람과 태양을 이용해서 자연 에너지를 얻으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 주 우리 보나스쿨 학생들은 어느 때 보다 더 많이 머리쓰는 일을 했습니다. 새벽4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그것도 암송이 안되면 잠을 잘 수 없는 밥도 먹을 수 없는 수학 영어 캠프를 했습니다. 이해력과 기억력은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의, 식, 주 모든 면에 자연친화적이 되어야 공부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의식주가 공부잘하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옷은 위는 가볍게 아래는 따뜻하게, 식사는 현미와 채식으로, 집에서의 환경도 자연의 시간에 맞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도시의 삶속에서 자연과 단절되어 콘크리트 벽속에서 살다가 답답하고 정서적인 만족함이 없어 신앙문제과 결부시켜서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 해도 없어지지 않는 고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숲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함께하면서 신앙문제로 알고 있었던 문제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합니다. 자연과의 단절에서 오는 인격적인 고갈, 어두움의 문제가 이만큼 컸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이 파괴되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과 그리고 자연과도 화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즐거워서 밤낮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귐이 지속되어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주 수학, 영어 캠프 했다고 한꺼번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생활에 구체적인 변화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4,5,6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다른 품격입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로 규정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없습니다. 약삭빠름, 거짓, 술수, 그리고 품격에 올바름이 없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축복 가운데 있습니다. 깡마른 쭉정이는 하나님의 저주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심판을 견디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람에 다 날라가 버리게 됩니다. 그들의 성공방법을 배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길에 서지 마십시오. 그들의 자리에 앉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결국에는 망하는 길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희망, 기쁨,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런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밤낮으로(day and night) 주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품격있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나와 이웃과 자연을 사랑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이 사랑을 물이 시냇물을 따라 흘러 강물로 바다로 흘러가듯이 흘러 보냅니다. 머물러 있게 하지 말고 오복근 선교사가 있는 중국으로, 곽현섭 선교사가 있는 미얀마로, 고석만 선교사가 있는 영국으로, 중앙 아시아로, 캄보디아로, 라오스로, 그리고 은샘이네 가족이 가기 원하는 인도로 이 복음의 물줄기가 흘러가게 합시다. ♬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