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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노래
2003.10.21 22:37

말목을 뽑으며

조회 수 2531 추천 수 14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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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일을 너무 무리했는지
오늘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온 몸이 쑤시고 아프네요
오늘도 오전에는 어제 못다한 창고 정리작업을
성철, 양집사님과 함께 먼지를 마시면서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다 마치고 멀지 않아 타작하게 될 논으로 나가
콤바인이 들어와서 작업하기 편하도록
논의 가장자리와 콤바인이 작업하기 곤란한 곳의
벼들을 미리 낫으로 베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제가 혼자서 논에 나가
물길을 만드는 일을 했었는데(이 일을 도구친다고 합니다)
난생 처음 하는 일이라 하긴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서
논에 물이 말라 있어야 하는데 이건 완전히 한강유람선을
띄울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동찬이 할아버님께 꾸지람을 한참 동안 들어먹고는
서둘로 양말을 벗고 논으로 들어가 삽으로 물길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성철이, 성근이, 양집사님도 낫과 삽을 들고 도와 주었는데
참으로 송구스러웠습니다.
무슨 일이고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까지
이렇게 애를 먹게 되는 것이 세상살이인가 봅니다.

다들 점심 식사하러 들어간 후에
다시 혼자 남아서 마무리를 어느정도 하고는
고추밭으로 가서 고추 나무들을 지지해주던
지주말목들을 일일이 뽑는 일을 했습니다.
하늘은 잔뜩 흐려 구름은 낮게 드리우며
간간히 비를 흩뿌리는데 마주보이는 산 허리로
울긋불긋 물이 오른 나무잎 빛깔이 참으로 고왔습니다.

고추잎들은 이미 만지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질 정도가 되어 버렸고
고추들도 서리를 맞아 붉지 않은 것들은
시퍼렇게 얼어 지난 여름의 푸른 빛은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허리가 잘린 채 널브러진 나무들 사이로 말목들만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좌우로 한참을 흔들면서 빼노라니
힘은 들었지만 말못하는 지주 말목이 참 고마왔습니다.
그 모진 비바람 흐린 날에도 고추 가지가 꺾일 정도의 궂은 날씨에도
말목은 그렇게 우두커니 제 자리를 지켜주어
그러지 않아도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고추나무들이
그나마 이렇게 라도 결실하여 열매를 거둘 수 있었으니
참으로 고맙고 고마운 말목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무들이 뿌리가 뽑히거나 허리가 부러져 제 자리를 떠나는 순간까지
말목은 정말 신실하게 제 자리를 지켜 주었습니다.

말목을 뽑다 흐린 하늘을 올려다 보니
내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떠 오릅니다.
다 떠나가고 홀로 남은 십자가가 위에서
마지막 피 한방울 남김 없이 다 쏟으시도록
그렇게 모진 고난의 십자가에 매달려
살이 찢어지셨을 내 주님
나의 소망이 사라지고
나의 꿈이 좌절되고
내 곁에 아무도 없어도
끝까지 그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손으로
나를 붙잡아 주시는 사랑의 내 주님

말목 차가운 느낌에서 십자가의 못자욱에서
흘러내던 주님의 피를 만집니다. 내 주 예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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