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과 도시(목회와 신학 9월호)

by 무익한 종 posted Aug 1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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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교회와 농촌교회의 연계사역
- 농촌과 도시                                                                                                                
                                             무익한 종  강동진

도시와 농촌, 글쎄 기자께서 내게 부탁하신 것과는 다른 글이 될 것 같고, 독자들이 이런 글에 관심을 가지실지 의문스럽기도 해서 사실 글쓰기가 내키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한참 정신없이 분주한 여름에 짬을 내어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흔치 않은 기회이기에 그저 시골에 살면서 느꼈던 단상들을 모아 글을 써 보겠습니다.


도시의 시작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농촌을 만드셨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말에 동감합니다. 하나님은 에덴이라는 아름다운 동산을 만드셨으나,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께서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는 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고 에덴 동편 놋 땅으로 나가 거기서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에녹이라는 자녀가 태어나자 자신의 재산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는 성을 쌓습니다. 성은 외부의 공격과 적으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담을 쌓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은 근대적 의미의 도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주를 지켜주지 못하는 성
누군가가 무엇을 만들게 되면 만들어진 그것에는 만든 사람의 정신과 철학이 깃들이게 됩니다. 저희 공동체 양계장에 있는 닭 모이통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손잡이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이라 닭들이 그 위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만든 것은 닭들이 그 위에 올라가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파닥거리며 날개를 치며 얼른 내려오는 재미있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손잡이처럼 생긴 나무는 손잡이 역할도 하지만, 닭들이 모이통 속으로 들어가서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런데 가끔 그 위에 올라가는 성질 급한 닭들이 있고 올라가서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배설을 해서 모이를 더럽히곤 합니다. 그래서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아가게 만들어서 닭이 그 위에 올라가더라도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몇 번 올라가다가 거긴 올라갈 곳이 못된다는 학습이 되면 다시는 안 올라가고, 다른 닭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깨끗한 모이를 먹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인이 성을 쌓을 때는 거기에 가인의 의도가 밑바탕이 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안전장치를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성을 쌓은 것입니다. 이처럼, 성에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서려는 자립, 자존의 강한 불신앙이 그 기저부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도시는 그렇지 않다고요? 글쎄요, 도시는 끊임없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발전을 도모합니다. 그 발전의 목표는 무엇이고 발전의 끝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혹시 하나님이 없이, 하나님의 손길이나 도우심이 필요 없이, 모든 자연재해로부터 안전을 도모하고, 질병과 기타 여러 가지 위협으로부터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8세기로 접어들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이슬람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을 점령하고 나아가 전 유럽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라나다 술탄의 나스르 왕조는 그라나다를 수도로 삼고 그곳에 알람브라 궁전을 세웁니다. 아랍어를 연상시키는 우아하게 흐르는 곡선과 세계 최고의 타일과 치장 벽토를 사용하여 만든 이 건축물은 요새이면서 동시에 ‘알라 외에는 정복자가 없다’는 나스르 왕조의 가훈을 새겨 넣은 것에서 보듯이 알람브라는 선전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견고하고 아름다움까지 갖추었던 요새 알람브라는 그의 마지막 성주였던 보아브딜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아라곤의 페리난도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쳐들어와 공성전에 들어가기 전 알람브라를 장기간에 걸쳐 공격하기 위해 산타페라는 대항 요새를 세우자, 결국 알람브라의 성주 보아브딜은 항복하고 울면서 그 성을 떠나 모로코의 패스라는 곳으로 자신의 추종자들과 떠나야 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성을 쌓지만 성은 성을 쌓은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지만 그 땅의 사람들을 지켜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4개국 연합군의 말발굽 아래 소돔의 사람들은 무참한 약탈과 방화를 겪어야 했고, 하나님의 진노의 유황불이 쏟아질 때도 소돔성은 성안의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도시의 특징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성의 형태는 달랐고, 성의 이름과 성을 쌓는 사람은 달랐어도 성을 쌓아 자신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려는 욕구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이라고도 불리는 도시는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의 힘으로 안정과 평화를 얻고자 하는 가장 인간적인 도구요, 인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람브라의 대요새와 궁전에 새겨진 글귀가 보여주듯 성 혹은 도시라는 곳은 끊임없이 정복하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목표를 숨기지 않습니다. 도시는 철저하게 목표 지향적이고, 출세 지향적이며 성공 지향적인 곳입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여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늘 공격적입니다. 그러기에 도시에서의 관계는 늘 손해를 안 볼 만큼의 적당한 선에서만 유지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적은 수의 사람밖에 모르고,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이상한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 아브람과 함께 머물던 롯이 소돔이라는 성으로 거처를 옮긴 후 그의 삶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그는 들에 머물 때는 분명히 아브람의 조카 롯이라는 분명한 자기 이름과 정체성을 가진 존재였지만, 성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는 ‘외부에서 들어와 우리 사이에서 우거는 놈’(창19:9)이 되어버립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시는 익명성의 장소입니다. 서로를 향해 불필요한 호기심을 발동시키면 안 되는 곳이고, 차라리 도시에서는 이름보다는 주민등록번호나 차량번호 혹은 신용카드 번호로 통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목표 지향적인데다 익명성까지 더해지다 보니 도시는 비윤리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익명성이 사람들을 담대하게 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이상한 형태의 범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도시생활 자체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도시인들은 피곤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도시의 교회
이러다 보니 도시의 교회들은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도시인들을 위한 오아시스의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메시지는 위로와 격려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마치 기나긴 사막여행으로 지친 나그네가 물과 대추야자를 찾는 것처럼 사람들은 도시생활에서 오는 영혼의 허기짐과 심령의 목마름을 극복할 수 있는 해답들을 교회로부터 얻고자 합니다. 위로와 격려는 지치고 상한 과거가 있어야 효과가 있는 법이고, 당연히 도시 교회의 메시지는 과거에 지배받는 설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모여든 사람들은 그들의 욕구를 분출 혹은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당연히 도시 교회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목회자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성장시키고, 세상에 관심을 갖지 않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반대로 다양한 부류의 교인들을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토록 많은 설교, 훈련 프로그램, 강의들이 즐비하지만 도시는 세월이 흐를수록 좀처럼 악의 속성을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혹시 도시 혹은 사람들을 변화시킬 힘이 도시의 교회들에게 없는 것은 아닐까요? 무수한 프로그램들과 설교들이 위로와 평안을 말하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줄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도시교회가 농촌에 줄 수 있는 것들? 글쎄
흔히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물질주의가 팽배한 도시, 그리고 그 도시의 허기진 영혼을 끌어안고 버거워하는 도시 교회가 시골, 촌스럽기 그지없는 농촌의 교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물론 쉽게 생각하면 줄 것이 정말 많아 보입니다. 돈, 사람, 다양한 프로그램들 등, 그리고 도회지의 교회들은 이런 것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나누어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농촌의 교회나 목회자들 역시 이런 것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글쎄요.
40년의 광야 생활을 겨우 마감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 만난 도시는 여리고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을 공격하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신당부하시기를 스스로 삼가 절대로, 여리고성의 물건들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가나안을 지키던 여리고성의 금 덩어리와 은 덩어리는 아무 것도 없이 가나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하는 아간은 훌륭한 밑천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아간을 아골 골짜기로 밀어 넣을 뿐이었고 민족을 패배의 수렁에 빠뜨리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늘 시골에서 살며 양이나 기르던 다윗에 에베스담밈에 진치고 싸움을 돋우던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기 직전 사울은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다윗이 못미더워 자신의 갑옷과 투구를 다윗에게 줍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그의 손에 익숙하던 물맷돌이면 충분했습니다.
혹시 그래도, 라고 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한 부자의 청지기가 자기 마음대로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다가 주인에게 발각되어 큰 화를 당하기 직전에 불의한 재물로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으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지기의 이야기를 통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권면해 주십니다. 도회지 교회가 농촌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도시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일로도 벅찬 도시 교회가 과연 농촌 교회에 물질이라는 부분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정말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제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농촌, 야만의 땅
그렇다면 농촌은 어떤 땅일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던 아브람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온 롯에게 아브람이 머물던 그 땅은 정말이지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땅이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뒤도 안돌아보고 애굽과도 같았던 소돔을 향해 가버립니다. 지난 1960년 대 이후 년 평균 55만이 넘는 사람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회지로 떠나갔습니다. 농촌은 성경에서나 우리의 현실에서나 버림의 대상이었고 떠남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만물과 더불어 호흡하며 살아가는 농촌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창조의 땅, 곧 생명이 움트는 생명의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달리 에덴 밖 거친 땅에서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온전한 땅이 에덴이었다면 아담이 지음 받던 그 땅은 척박하고 거친, 그러나 만물을 다스릴 자가 창조되는 시작의 땅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촌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찬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거듭하던 갈대아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의지하고 떠나온 아브람과 그의 아들 이삭이 평생을 머르며 하나님과 동행하던 땅이기도 했습니다.
이 땅은 종종 도시화되어 성에 안주하며 타락해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광야라는 말로 표현되어 다시 돌아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곳, 하나님과의 첫 사랑의 장소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척박하고 가난에 찌든 이곳 농촌으로 하나님께서는 가끔 사람을 보내시곤 하셨습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40년을 지내던 사람 모세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압제를 당하던 민족을 위해 자신을 바칠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었고 바로의 궁전에서 문무를 익혔으니 누가 봐도 훌륭한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몰아내시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시기까지 40년을 이름 없는 목동으로 지내게 하십니다.
엘리야도 비슷한 경우였습니다. 갈멜산 전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만천하에 알리고, 영전 전쟁에서 승리한 용사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기가 꺾여 허우적거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만나던 광야 시내산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님은 음성을 들려주시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성경 속에서의 광야 혹은 농촌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장소였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는 사람을 다듬는 훈련의 장소였습니다.


영적 부흥이 식어진 세대를 살며
우리는 물질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유사 이래 이토록 풍족한 때가 있었는가 할 만큼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이 풍부할수록 영혼은 더 핍절해지는 법,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부요한 자가 천국에 가기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을까요. 영혼에 대한, 생명에 대한,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갈망이 식어버린지는 이미 오래, 구태의연하고 종교화되어버린 그런 신앙생활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지난 1930년대, 혹은 1970~80년대 교회를 뒤흔드시고, 사람들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시던 성령님의 거룩한 역사하심에 대한 간절한 바램은 더 이상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풍요롭되 핍절한 참으로 위태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적인 부흥이 식어지면 신앙은 종교가 되고, 사회는 물질주의와 인간의 본능이 판을 치게 됩니다. 갈수록 영적 침체, 영적 어둠은 더 깊어만 가고 그 어둠이 극에 달했을 때 주님은 새로운 여명이 떠오르게 하시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시며 비로소 영적인 부흥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늘 새로운 여명을 알리는 소리는 광야에서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헤브론의 거친 땅에서 평생을 지내던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애굽의 압제를 마감하는 모세의 소리도 미디안 광야에서 시작합니다. 엘라 골짜기의 민족의 위기를 극복한 다윗은 양들 틈에서 자던 목동이었습니다.  
농촌에서 목회하시는 귀한 주님의 사역자, 제대로 자립도 못하고 늘 재정적인 압박에 허덕이는 농촌 교회들, 뜨거운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십일조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시는 농촌의 교인들 여러분,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나사렛을 향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뇨’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하지만 나사렛은 ‘나사렛 예수’의 나사렛이 됩니다. 그렇다면 시골은, 농촌교회는 더욱 농촌스러워야 합니다. 도시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도시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광야에 머물게 하신 분을 참으로 의뢰한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물질주의와 인본주의로 버무려진 이 세대를 건질 소리를 광야에서 듣게 하실 것입니다. 그 소리는 광야에서 시작하여 온 도시를 깨우고 사람들의 영혼을 깨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