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만족)에 대한 단상
노랗게, 붉게 익어가는 가을이면 왠지 그냥 ‘풍성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 결실이 내 것이 아니어도, 많이 거둬들이는 행복한 바쁨의 비명이 아니어도 그냥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것 같은 만족이 스며든다.
이 가을에 난 난생 처음으로 내 손으로 경작한 콩을 거두는 수고와 기쁨을 갖게 되었다.
남편도 찹쌀이 저절로 섞여버린(?) 벼를 수확하였다.
비록 생활을 이루는데 작은 부분밖에는 되지 않지만 어쨌든 수확은 기쁨임을 느낀다.
더욱이 열심히 콩을 까서 돔부콩 찰밥을 해서 지체들과 이웃에게 돌리고 난 후엔 더 기뻤다.
두 끼를 먹고 나서 저녁을 먹으려는 도시의 가정에서 “하루에 세 끼를 먹는 건가요?”
라고 묻는 초등생의 질문으로 임해 중국 행정국에 적잖은 파동과 함께 빈곤 극복 정책 수립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소식을 접하면서 ‘과연 세끼를 먹는 것은 행복이고 두 끼를 먹는 것은 불행일까’ 라고 질문해 본다. 물론 자라나는 아이에게 있어 어느 정도의 영양이 공급되지 않을 정도의 가난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현재 이 사회에 팽만한 곤핍과 불행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끊임없이 위를 향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일까?
고등학교 3년 내내 내 인생의 절대 목표였던 서울대 의과대학을 입학하자 그 당시 학내에 팽만해 있던 민중 해방에 대한 사상과 이념에 대해 나의 무지함을 보자 또 다른 욕구가 싹터 올랐다. 나도 저 대열에 끼어서 그럴듯한 명분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이 후 본과에 올라와보니 학점에 있어 뒤떨어지면 원하는 길을 쉬이 갈 수 없는 것 같은 불안감으로 인해 먹는 것과(졸릴까봐) 잠을 줄여가며 어느 정도의 대열에 들어섰고 그 이후 서울대에서 인턴과 전공의 과정을 받고자 애썼고 그 이후엔 학회에서 웬만큼 위치를 갖고서 인정을 받고자 했고, 더욱이 그리스도인 의사로서 영육을 함께 치료하는 괜찮은 전문인이 될려고 애썼고.....
한마디로 늘 ‘이 정도는 되야지’ 하는 강박관념이 내 안에 있어왔다.
만족함이 없는 삶의 근원을 보면 ‘자기 의와 욕심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선상에서 어느 정도는 되어야하는 자신의 지점을 설정한다.
즉, 욕심이, 비교가 절대적인 만족과 행복에로의 길을 막는 장애물인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누가 이 사망의 늪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였던 바울은 마침내 인생의 막바지에서 이렇게 고백하며 확신과 만족에 차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딤후 4;7,8)
스스로를 보면 한탄스러워 절규하기 마련이지만 하나님을 뚜렷이 응시하고 그 분이 이끄는 대로 순전히 나아가면 자기 기준에 맞춤으로 인한 불만족이, 또한 타인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대열을 의식하고 비교함으로 인한 불평이나 한숨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
하여 많은 경우 감사가 적고 불평이 연기와 같이 오르는 인생은 하나님의 인정에 자신을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의 평가와 자신이 정한 기준 그리고 보이는 사람들의 칭찬과 명성에 마음을 둠으로 말미암는 것 같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딤전 6; 6-12)
노랗게, 붉게 익어가는 가을이면 왠지 그냥 ‘풍성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 결실이 내 것이 아니어도, 많이 거둬들이는 행복한 바쁨의 비명이 아니어도 그냥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것 같은 만족이 스며든다.
이 가을에 난 난생 처음으로 내 손으로 경작한 콩을 거두는 수고와 기쁨을 갖게 되었다.
남편도 찹쌀이 저절로 섞여버린(?) 벼를 수확하였다.
비록 생활을 이루는데 작은 부분밖에는 되지 않지만 어쨌든 수확은 기쁨임을 느낀다.
더욱이 열심히 콩을 까서 돔부콩 찰밥을 해서 지체들과 이웃에게 돌리고 난 후엔 더 기뻤다.
두 끼를 먹고 나서 저녁을 먹으려는 도시의 가정에서 “하루에 세 끼를 먹는 건가요?”
라고 묻는 초등생의 질문으로 임해 중국 행정국에 적잖은 파동과 함께 빈곤 극복 정책 수립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소식을 접하면서 ‘과연 세끼를 먹는 것은 행복이고 두 끼를 먹는 것은 불행일까’ 라고 질문해 본다. 물론 자라나는 아이에게 있어 어느 정도의 영양이 공급되지 않을 정도의 가난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현재 이 사회에 팽만한 곤핍과 불행의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끊임없이 위를 향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일까?
고등학교 3년 내내 내 인생의 절대 목표였던 서울대 의과대학을 입학하자 그 당시 학내에 팽만해 있던 민중 해방에 대한 사상과 이념에 대해 나의 무지함을 보자 또 다른 욕구가 싹터 올랐다. 나도 저 대열에 끼어서 그럴듯한 명분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이 후 본과에 올라와보니 학점에 있어 뒤떨어지면 원하는 길을 쉬이 갈 수 없는 것 같은 불안감으로 인해 먹는 것과(졸릴까봐) 잠을 줄여가며 어느 정도의 대열에 들어섰고 그 이후 서울대에서 인턴과 전공의 과정을 받고자 애썼고 그 이후엔 학회에서 웬만큼 위치를 갖고서 인정을 받고자 했고, 더욱이 그리스도인 의사로서 영육을 함께 치료하는 괜찮은 전문인이 될려고 애썼고.....
한마디로 늘 ‘이 정도는 되야지’ 하는 강박관념이 내 안에 있어왔다.
만족함이 없는 삶의 근원을 보면 ‘자기 의와 욕심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선상에서 어느 정도는 되어야하는 자신의 지점을 설정한다.
즉, 욕심이, 비교가 절대적인 만족과 행복에로의 길을 막는 장애물인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누가 이 사망의 늪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였던 바울은 마침내 인생의 막바지에서 이렇게 고백하며 확신과 만족에 차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딤후 4;7,8)
스스로를 보면 한탄스러워 절규하기 마련이지만 하나님을 뚜렷이 응시하고 그 분이 이끄는 대로 순전히 나아가면 자기 기준에 맞춤으로 인한 불만족이, 또한 타인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대열을 의식하고 비교함으로 인한 불평이나 한숨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
하여 많은 경우 감사가 적고 불평이 연기와 같이 오르는 인생은 하나님의 인정에 자신을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의 평가와 자신이 정한 기준 그리고 보이는 사람들의 칭찬과 명성에 마음을 둠으로 말미암는 것 같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딤전 6; 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