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게 기도지요”
여성노동수도원 ‘동광원 벽제분원’
“여긴 아무 것도 볼 것도 없고, 얘기할 만한 것도 없는디, 뭣땜시 올라고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 수도원장의 거절을 거스른 채 지난 14일 경기도 고양시 벽제로 향했다. 벽제 시립묘지에서 광탄쪽 외길로 20여분을 달려 개명산 자락에서 흘러온 계곡물을 따라 올라갔다. 계곡가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미소짓고, 조그만 다리 건너 텃밭의 배추들이 튼실하게 뿌리박은 곳. 지붕 밑 우물의 꼭지 밑엔 큰대야를 받쳐놓고 그곳에서 넘친 물을 받기 위해 중간대야, 작은 대야가 차례로 놓여 있다. 계곡수를 연결해 쓰면서도 한 방울의 물도 허비하지 않으려는 마음 씀이 가지런하다. 동광원 벽제 분원이 틀림없다.
“얘기할 것도 없는디‥뭣땜시 올라고”
처마 밑 비닐하우스 안에선 박공순(73·여) 원장이 한 묶음도 안 되는 볏단을 홀태질하고 있다. 가을빛으로 여문 이삭처럼 수줍은 듯한 ‘공순언니’의 볼이 빨갛게 익었다. 수도원장이라기보다는 어느 촌로보다 더욱 촌로답다. 가톨릭에선 많지만 개신교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수도원을 여섯 명이 꾸려가는 이곳 여성들을 밖에선 언니를 높여 ‘언님’이라고도 부르는데, 자기들끼리는 언니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평상복 차림인 이들을 수녀라고도 한다.
옆에선 90살이 넘은 배석순, 박덕례 할머니가 토란대를 다듬고 있다. 거친 손 끝에선 잘생긴 토란대가 한 도막 두 도막 겨우살이용으로 쌓여간다.
원장언니의 친동생인 금선언니는 부엌살림을 맡고, 금자언니는 50대에 공부를 시작해 학교에 나간다. 그래서 1천여 평의 밭일은 원장언니와 서른아홉 막내 영실언니 둘 차지다.
부양 받아야할 나이의 노인들이 많아 스스로 힘으로 살아가기엔 벅차보이기만 하지만, 이들은 일체의 원조 없이 자립하고 있다.
수입이 거의 없으니 오직 집앞 밭과 산에서 나는 제철음식과 나물들만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이곳에선 무 꼬랑지 하나도 버려지는 것이 없다. 땅 한 뼘에 들이는 공도 남다르다. 홀태질하는 벼도 밭고랑 사이 두세 뼘의 땅에 남이 버린 모를 꽃아 놓았던 것이 자랐다.
흙집 뒤 처마 밑엔 이들이 지게지고 산에서 해온 겨우살이용 나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지난 56년 이곳보다 산에 더 가까운 앵무봉 밑에 풀로 엮은 초막에서 화롯불조차 없이 기도만으로 겨울을 날 때에 비하면 이마저도 호사란다.
‘언님’들은 그 산에서 봄에는 나물만 뜯어먹고, 여름엔 쑥으로 죽을 쒀먹고, 가을엔 도토리를 주어 삶아 먹으며 버려진 땅 4천여 평을 개간해서 80년까지 가꿔 자립 기반을 닦았다. 그 뒤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80년대 초반 수도자들이 대부분 광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40~50명이 이 산에서 나는 것만으로 연명하며 수도생활을 했다.
자족의 삶 배우는 수련터로
물질 세상에선 가장 뒤쳐진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곳에 정착한지 20년도 넘은 77년에야 전기를 들여왔고, 95년에 방 한 칸에 보일러를 놓았다. 그마저 아까워 지금도 땔감으로 난방을 한다. 스물다섯살에 이곳에 와 50년이 다되가는 공순언니는 그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약 한 번 쳐본 적이 없고, 풀을 베 썩힌 것만을 거름으로 써왔다. 바깥 사람이 보기엔 너무도 힘든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군불 지피던 덕례할머니는 “세상에 이 보다 좋을 순 없다”고 한다. 이런 궁벽한 곳의 무엇이 이렇게 잔잔한 미소를 가져다주었을까.
이들의 스승은 탁발수도승으로 살며 걸인과 병자들을 돌보아 ‘한국의 성프란치스코’ 또는 ‘맨발의 성자’로 불리는 이현필(1913~64)선생이다. 광주 등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이현필은 자신이 돌보던 폐병환자들로부터 병이 옮아 이곳에 와 숨을 거두고 이곳에 묻혔다.
공순언니는 후두결핵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대자연의 모든 것이 감사하지 않은가. 아~ 사랑으로 모여서 사랑으로 지내다가 사랑으로 헤어지라!”고 기쁨을 이기지 못한 채 죽어가던 스승의 모습을 잊은 적이 없다. 그 스승은 “청빈과 순결만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언은 그대로 이들의 삶이 되었다.
수도공동체인데도 기도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숨쉬는 것이 기도지요. 하나님이 주신 공기를 마시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런 자족과 감사의 삶은 소리 없는 파문을 낳으며 퍼져가고 있다. 기독교환경연대 사무국장인 김영락 목사는 자주 이곳에 와 이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자신도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이런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한 가톨릭 수사도 2개월째 격식을 떠나 ‘삶이 바로 기도’인 생활을 함께 하고 있다. 4년 전 밭의 반을 뚝 잘라 내놓은 텃밭 1천 평은 귀농운동본부의 전용 주말농장이 돼 안병덕 귀농운동본부부본부장을 비롯한 귀농준비자들이 농사일과 자족의 삶을 배우는 소중한 수련터가 되었다. 더 많이 갖고도 돈타령뿐인 바깥세상과 달리 가진 것 하나, 볼 것 하나 없다는데도 벌이 꽃향기를 찾아 날아오듯 사람들이 찾아온다.
“하나님마저 이기려는 게 사람 마음”
“가지면 더 갖고 싶고, 하나님마저 이기려는 게 사람 마음 아닌가.”
많이 가지는 것으로 행복을 찾는다면 처음부터 번지수가 틀린 것이라는 공순언니의 금언을 뒤로 하고, 나서니 노을빛 받은 단풍이 곱다. 줄곧 보면서도 단풍이 그리운 것은 그 아름다움마저 아낌없이 벗어버리는 무욕 때문일까.
동광원?
1950년대 이현필 선생이 첫 말뚝
광주·남원 등서 수도공동체 일궈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50년대 광주 무등산에서 고아와 결핵환자 등 700여명을 돌보면서 생긴 수도단체다. 철저한 금욕을 강조했던 그의 가르침에 따라 가정을 버린 부녀자들이 이곳에 모여 이현필은 가정파괴자란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은 하루에 오직 한 끼, 그것도 몇 숟갈만을 먹으며, 고아와 병자들에게 헌신했다. 동광원에선 자녀를 데려온 수도자들도 자녀들을 고아의 무리 속에 넣어 똑같이 키우도록 했다. 또 신발을 벗을 때는 나갈 때를 대비해 바깥쪽을 향해 가지런히 놓도록 했고, 음식물은 전혀 남길 수 없게 했다. 또 신자들이 하루에 밥 한 끼씩을 모아 그것으로 불쌍한 사람을 돕자는 ‘일작운동’을 펼쳤다.
이현필의 제자인 김준 초대 새마을연수원원장은 이런 삶을 새마을운동에 그대로 도입하기도 했다. 이제는 이현필의 자선의 뜻을 이은 광주시 봉선동의 귀일원에서 정신지체자들을 돌보고 있다. 수도자들은 광주와 남원, 화순, 함평, 이곳 벽제 등에서 노동수도공동체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가톨릭 광주대교구는 이현필의 영성을 가톨릭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과 일치한 것으로 보고, 5년 전 광주에 그의 삶을 잇기 위한 독신여성수도원인 ‘소화 데레사 자매원’을 설립했다.
벽제/글·사진 조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