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파병과 석유


지금처럼 에너지를 많이 쓰는 추세가 지속되면 앞으로 15년 후에 한국은 세계 최고의 에너지 소비국인 미국처럼 된다. 미국은 에너지를 많이 쓸 수밖에 없는 나라다. 많은 사람이 고속도로로 연결된 교외로 나가 살고, 큰 자동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대형 쇼핑센터도 대부분 교외에 있기 때문에, 차가 없이는 살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 미국이란 나라다. 냉장고 같은 식품 보관장치도 클 수 밖에 없다. 교외의 쇼핑센터에서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건을 구입해서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꺼내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활양식을 영위하고 있으니 미국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전세계의 비난과 자기나라 청년들이 죽어가는 위험도 감수하면서 이라크 침략전쟁을 벌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에서 원유 1배럴을 얻기 위해서 지출하는 국방비는 약 100달러?라고 한다. 이렇게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도 석유를 확보해야만 하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미국에서 이라크를 침공하려 했을 때 유럽의 독일은 이에 끝까지 반대했다. 반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분명했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증거도 없고 후세인이 9.11테러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도 없는데 침공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독일이 석유를 미국처럼 많이 쓰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고, 미국에 의존해야만 석유를 얻어쓸 수 있었다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끝까지 반대할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반대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미국의 회유에 굴복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중동지역에서만 석유를 증산할 수 있고 다른 지역의 석유 생산량은 줄어들고 있는데, 미국이 중동을 장악해서 중동 석유를 손아귀에 넣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전쟁반대만을 외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독일은 중동 석유를 많이 수입하지는 않는다. 러시아나 북해 등지에서 상당량의 석유를 들여오기 때문에 중동이 미국의 손에 들어가도 미국의 눈치를 크게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독일이 석유를 계속 많이 쓰는 에너지 구조를 유지하면 중동 석유를 무시할 수 없다. 다른 곳에서는 석유생산량이 줄어들고 중동에서만 생산량이 늘어난다면 결국은 중동 석유를 들여와야 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일은 그런 사태까지 고려하면서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한 것일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독일에서는 석유로부터 벗어나는 50년의 장기 시간표가 있다. 앞으로 50년 동안 석유 를 비롯한 화석연료 소비를 계속 줄여나가서 그때가 되면 석유로부터 거의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전쟁반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이라크 파병을 반대한다. 국회의원 중에도 파병을 반대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렇지만 반대만 하지 파병 속에 담겨있는 복잡한 의미에 대해서는 꿰뚫어보지 못한다. 파병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한미관계가 주종관계이고 꽤나 복잡하다는 것은 대체로 알고 있는 듯하다. 찬성 쪽은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한미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반대 쪽은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이 한미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만 이제 우리도 그런 중대사안에 대해서는 자기 목소리를 내고, 한미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가자고 말한다. 찬성이나 반대 모두 경청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반대쪽의 경우 그렇다면 석유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또는 석유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다.

찬성쪽은 당장은 석유확보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미국이 중동을 장악하는 것을 도와주면 부스러기 석유가 분명히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파병을 반대하면 중동에서 석유를 확보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중동을 손에 넣은 미국이 훼방을 놓으면 그 일이 여간 어려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파병 반대쪽은 반대와 더불어 석유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만 한다. 복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일반인은 그렇게 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적어도 국회의원이라면 한미관계와 더불어 석유수급 같은 면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파병과 에너지의 연관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국회의원은 거의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파병을 반대한다면 당연히 석유로부터 벗어나는 방안도 생각해야 한다. 재생가능 에너지를 늘리고 에너지의 절약과 효율적인 이용을 통해서 수십년 후에는 석유로부터 해방된다는 계획을 짜야 하는 것이다. 이런 걸 고려하면서 파병반대 운동도 해야 운동이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