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이 가고 있는 길


정부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전력수급 기본계획을 수립한다. 2004년에는 제2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이 나온다. 그런데 이 계획에 따르면 한국에서 2000년대에 증가할 전력 소비량은 거의 모두 원자력이나 화력으로 채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에너지 위기가 얼마나 과소평가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갈되어가는 화석연료나 위험한 원자력에 크게 의존하는 계획은 한국 정부가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에 매우 둔감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는 그러한 문제가 심각한 것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 해도 다른 길을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사실 해마다 크게 증가하는 에너지 소비와 전기 소비를 정부가 앞장서서 줄이자고 하는 것은 여간 용기를 요하는 일이 아니다. 사방에서 반발이 굉장할 것이고, 언론의 비난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될 것이다. 예를들어 화석에너지와 원자력의 사용이 생태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환경세를 부과하여 에너지 가격을 크게 올리면 소비는 줄어들 것이다. 그렇지만 이에 불만인 사람들은 이러한 세금에 대해 대대적인 반대투쟁을 벌일 것이다. 위기의 심각성을 웬만큼 알아서는 이러한 반대를 뚫고나가지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정부는 위기를 심각하게 인식하지만 저항을 두려워해서 합당한 정책을 펴지 못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석유가격이 크게 오르자 처음에 정부에서는 중동 정세가 안정되면 국제유가가 다시 배럴당 25달러 선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봐도 그렇다.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고, 마냥 기다리겠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해서 유가가 다시 떨어진다면야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문제는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유가가 크게 올라간 이유는 중동정세가 불안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세계 석유생산량이 늘어날 전망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고유가 현상이 한시적인 것이라면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이 석유 매장량의 한계라는 근본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대비책을 찾아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서 유가는 해를 거듭할수록 상승하고 있고, 땅속에서 퍼올리는 석유의 생산량은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다. 석유가 고갈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석유 지질학자들은 2010년 경이면 석유 생산량이 줄어들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때가 되면 석유가격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것이고, 간간이 나오는 3차 오일쇼크에 대한 경고가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물론 국제에너지기구와 미국에너지부에서는 석유생산이 계속 늘어날 것이고, 2010년이 되어도 충분한 양의 석유가 시장으로 흘러들어올 것으로 예측한다. 기다리기만 하면 석유가격이 안정될 터이니 안심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지만, 이들의 ‘낙관적인’ 예측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 있다. 중동과 카스피해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대부분 석유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했고, 영국, 노르웨이, 인도네시아 등도 수년 전부터 감소추세로 들어섰다. 지금 영국 북해의 석유는 1999년에 비해 20%나 적게 생산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도 곧 석유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돌아선다. 중국은 1993년부터 석유수입국이 되어 전세계 석유를 미국 다음으로 많이 가져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중동과 카스피해 석유를 둘러싼 분쟁과 암투가 격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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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지역 산유량곡선(ASPO 자료)


기다리면 유가가 떨어진다는 정부의 주장은 에너지 위기에 대한 인식부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니 정부에서 재생가능 에너지의 중요성에 대해서 종종 이야기한다고 해도, 에너지 소비가 줄어든다거나 재생가능 에너지가 크게 늘어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부의 전력수급 계획이나 에너지 기본계획에서는 에너지 소비가 필연적으로 늘어나고 이것을 화력이나 원자력을 대대적으로 확대해서 충당하겠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그 속에서 소비절약이 차지한 자리는 아주 적은 부분이다. 전력의 경우 소비가 필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설사 어느 정도 증가한다 해도 그 증가분을 화력이나 원자력으로만 채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전력의 이용효율을 높이고, 체계적으로 수요관리를 하고, 재생가능 에너지원을 적극 개발하면 수요증가를 줄일 수 있고, 화력이나 원자력의 비율을 낮출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태양에너지, 풍력, 바이오매스, 수력, 조력 등의 재생가능 에너지원은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들 에너지원을 장기 계획을 세워서 개발하면 앞으로 닥칠 에너지원 고갈과 기후변화라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