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한국 교회의 농촌선교

by 무익한 종 posted May 0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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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우리 역사에서 어느 시대 치고 농민이 잘 살았던 시절이 있었을까마는, 일본의 수탈에 허덕였던 일제하의 사정은 더 이를 나위도 없이 농민에게 힘들었다.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는 말도 농업이 중요했다는 뜻이지 결코 농민을 존중했다는 뜻은 아니다. 농민이 존중되었다고 해봐야 그것은 생산자 또는 납세자로서의 농민일 뿐이다.

대지주가 아닌 자작농, 특히 자기 땅을 갖지 못했던 소작농의 형편은 어렵기 짝이 없었다. 보통 일제하 우리 인구의 약 70~80%를 농민 또는 그 가족으로 보는데, 다시 그 중 70~80%가 소작농이거나 그 가족이었다. 따라서 소작인의 문제는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곧 농민의 문제요 한국의 문제였다.

기독교인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자의 대부분이 농민이고, 교회의 대부분이 농촌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시기에 한국교회는 그들을 위해 어떤 활동을 벌였을까. 생활고에 허덕이던 그들에게 어떻게 선교를 했을까.

이 글은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보려는 것이다. 나아가 오늘의 한국교회가, 과연 60~70년 전보다 더 농촌선교에 관심을 쏟고 있으며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려고 한다. 경제성장의 그늘 아래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가는 오늘의 농촌을 위해 한국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이 바로 이 점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 1920년대 농촌경제의 악화와 농촌교회의 침체

기독교의 전파 과정은 곧 농촌선교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이나 평양 등 일부 도시를 빼면 대부분 지역이 농촌이었기 때문이다. 도시라 한들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농민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교라는 것은 순수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지, 농민의 생활이나 형편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은 없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기 이전에는 기껏해야 언더우드나 펜윅같은 선교사들이 순전히 개인적 차원에서 농업에 대한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들어와 사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일제는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수탈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어 1920년대 산미증산계획을 세우고 생산 증가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가뜩이나 허덕이던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교회설립과 복음전파, 그리고 교인들의 신앙생활에만 관심을 쏟았다. 교인은 꾸준히 늘고 있었으며, 경제적 문제는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이 되면서 교회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농촌교인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헌금도 줄어들고, 따라서 교회의 재정사정도 나빠졌기 때문이다. 다음 신문기사가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오늘 조선교회의 재정상황은 과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보는 대로 우리의 사면을 맹렬히 습격하여 들어오는 세계적 경제난과 또 신구교대(新舊交代)의 중간시기에 처하여 이미 이전 업을 잃고 아직 새 일을 얻지 못한 우리의 직업난(職業難)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발전을 위하여 더 많은 금전쓰기를 즐겨 허락지 아니한다. 그러나 교회당과 교인의 수는 날로 증가되는 것이 사실이다.(「기독신보」 1925년 3월 4일자, 사설 "조선교회의 네 가지 난관")

이처럼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졌지만, 교회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교회와 교인은 여전히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면서 교인이 눈에 띄게 줄자 교회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금년 교회의 통계를 보아 교인수효가 감하여진 것과 재정수합이 줄어진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중략)… 이보다도 우리의 보고 듣는 바로는 농촌교회가 농민을 위함에 적당한 활동이 없으므로 교회가 떨치지 못하여 농민전도에 많은 효과를 얻지 못한 까닭이 아닌가 한다. …(중략)… 지금까지 우리의 전도하여온 것은 도회 중심을 삼았고 도회에 전도하는 방법으로써 농촌에도 전도하였다. 이것이 어찌 적합한 방법이라 할 수 있으랴. 농촌전도에는 반드시 농민심리를 알고 농촌경제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신보」 1928년 9월 26일자, 사설 "농촌전도")

"농촌교회가 농민을 위함에 적당한 활동이 없으므로" 교인이 줄었다는 위의 인식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리고 "농촌전도에는 반드시 농민심리를 알고 농촌경제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는 지적도 그러하다. 이제 단순히 신앙 생활을 지도하는 것만으로는 농촌 교회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3. 현실문제에 대한 교회의 인식 변화

농촌경제의 악화와 더불어 현실문제에 대한 교회의 인식변화도 농촌선교에 영향을 주었다. 먼저 이 무렵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해 생각해왔던 종전의 경향에 대해 반성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즉, 그 동안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기 때문에 농촌교회의 피폐를 가져왔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경제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아무리 교인이라 해도 물질을 무시해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이 나왔으니,

예수 당시에 자본주의라는 것이 없었나니 그런 고로 예수께서 이에 대하여 질책하심이 없으나 그러나 만일 금일시대에 오시면 막쓰 이상으로 자본주의의 해악됨을 책(責)하셨으리라 하노니 …(「기독신보」 1924년 2월 6일자, 사설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본질")

라 하여, 만일 오늘 예수가 계셨다면 자본주의를 책망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에 '만'자가 들어있는 것을 보아도 예수께서 물질을 무조건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벌인 반기독교운동도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자본주의의 주구(走狗)요 제국주의의 수족(手足)'이라 비난하며, 몰락하는 농촌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는 교회를 공박했다. 더 큰 문제는, 교회청년들 중 현실문제를 외면하는 교회에 실망하여 사회주의자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농촌교인에게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면 장차 공산주의가 만연될 것이라는 아래와 같은 우려도 교회를 긴장시켰다.

만일에 교회가 농촌신도들에게 생활문제에 대한 실제적 충고를 주지 않을 것이면 머지 않은 장래에 공산주의로 화하게 될 것이니 그것은 공산주의가 아니고는 이 문제를 해결케 되지 못하게 됨으로써다. 그리스도교는 이를 해결하여 주지 못할까? 문제는 여기로 쏠린다.(「기독신보」 1930년 12월 3일자, "사경회와 농촌문제")

이래저래 교회는 농촌문제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농촌의 피폐는 곧 농민의 몰락, 그리고 농촌교인 및 농촌교회의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4. 기독교 농촌운동단체의 조직과 농촌운동의 방향

한국교회가 농촌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지만, 1928년 이전까지 구체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초교파단체인 YMCA뿐이었다. 그러다가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에 참석한 정인과(장로교)·양주삼(감리교)·신흥우(YMCA)·김활란(YWCA) 등이 귀국하고서야 장로교·감리교 및 YWCA에 농촌부가 조직되고 농촌운동(일반적으로 '농민운동'이라 하지만, 한국교회는 당시 이를 '농촌운동'이라는 불렀고, YMCA의 경우 '농촌사업'이라 하기도 했다)이 전개되었다.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에서는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회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있었는데, 교회가 사회문제, 그 중에서도 농촌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결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농촌운동을 위한 기본적인 조직이 마련되었다.

이어 기독교 농촌운동의 대체적인 방향이 잡혀졌는데, 이를 정리하면 첫째, 합법적이고 온건한 노선을 표방했다. 한국교회는 농촌운동을 전개하면서 결코 일제당국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자칫하면 선교 자체에 지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농촌에 대한 일제의 정책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하기도 했다.

사실 한국농촌이 몰락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일제의 수탈정책에 있었다. 그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농촌운동이 될 수 없었지만, 선교를 무엇보다 중시한 교회로서는 일제에 밉보일 만한 언행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분배개선보다 생산증가에 역점을 두었다. 분배개선이란 토지의 분배와 수확의 분배를 올바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로서는 이 문제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토지의 분배는 당국의 결단이 있거나 혁명적 상황이 일어나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교회라 한들 지주인 교인들에게 토지의 분배를 강요할 수는 없었으며, 사실 교회 스스로도 어느 정도의 토지를 갖고 있던 지주였다.

수확의 분배 역시 어려운 문제였다. 이는 소작문제와 연결되는데, 당시 소작농에게 강요된 소작료는 70% 이상이었으며 소작기간 역시 짧아 소작농의 생활은 늘 불안정했다.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소작쟁의인데, 교회는 다소 '과격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소작쟁의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셋째, 정신적·도덕적 각성을 중시했다. 이는 기독교 농촌운동이니만큼 당연한 현상이었다. 즉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정신과 도덕의 각성을 통해서만 진정한 농촌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신과 도덕의 각성이 없는 농촌운동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는 농촌운동이 단순한 경제향상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바로 농촌선교의 한 방법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

5. 기독교 농촌운동의 순서와 내용

기독교 농촌운동은 일정한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 순서는 대략 ①농민계몽→②단체조직→③농사개량→④지도자양성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직 충분한 자금과 인력이 없던 초기에는 농민계몽운동에 힘썼다. 그 중에서도 문맹퇴치운동에 먼저 착수했다. 문맹퇴치운동이란 국문과 산수, 즉 글과 셈을 깨우쳐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교회에서는 야학·서당·글방·강습소 등을 세우고 농민과 그 자녀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농촌청년」,「농민생활」,「농촌통신」 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농촌운동의 필요성과 그 실천방법을 널리 알리려 했다. 아울러 수십 종의 단행본도 출판하여 보다 심도있고 체계적인 농촌운동이 되도록 애썼다.

둘째, 농민단체를 조직했다. 장로교·감리교 등 교단과 YMCA· YWCA 등 단체에서는 중앙과 지방에 농촌부를 두었으며, 또 지역에 따라 산업부·농민회·협동조합 등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조직들을 중심으로 해서 보다 효율적인 농촌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셋째, 농사강습회를 개최했다. 농사강습회란 몇 명의 전문가가 각지를 순회하며 1~2주의 기간 동안 농민들을 모아놓고 이론과 실기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각종 농업기술은 물론 부업과 협동조합 등 과목도 들어 있었다. 이 강습회는 참석자가 1년에 수천을 헤아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장로교의 경우 강습회 중에 기도회·사경회 등 순서를 넣어 농민들의 신앙을 지도하기도 했다.

넷째, 농업학교 및 농촌지도자양성기관을 설립했다. 농촌운동이 확산되면서 각지에서 이를 지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 바로 농업학교와 농촌지도자양성기관이었다. 이 같은 교육기관의 등장은 곧 농촌운동의 질적·양적 발전을 뜻하는 것이다. 농업학교는 정규학교로써 몇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고, 농촌지도자양성기관이란 농한기를 이용해 각지의 농민들을 불러모아 1~2달 동안 단기강습을 시키는 것이다. 전국에 약 10여개의 기독교계 농업학교가 세워졌고, 농촌지도자양성기관으로는 초교파 연합기관인 농촌사업협동위원회의 농촌사업지도자강습소, 장로교의 고등농사학원, YMCA의 농민수양소, YWCA의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 등이 있었다.

6. 교계의 갈등과 일제의 탄압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고 1928년부터 본격화된 기독교 농촌운동은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뜻하지 않은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농촌운동에 대한 비판과 방해가 잇따른 것이다. 먼저 내부적으로는 장로교의 경우 몇몇 목사들이 1935년부터 농촌부의 폐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교회가 농촌운동과 같은 '세속적' 활동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러한 논쟁 자체가 농촌운동에 지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다음 외부적으로는 일제가 1930년대 초반부터 이른바 '농촌진흥운동'이란 것을 전개하면서 농촌운동을 자신들의 운동으로 흡수시키려 했다. 그리고 일부 농촌운동 지도자들이 농촌운동을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37년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장로교·감리교·YMCA ·YWCA 등의 농촌부가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이로써 농촌운동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농촌운동이 끝났다고 해서 농촌선교 자체가 없어진 것은 물론 아니지만, '사회적·경제적' 성격의 선교는 다시 이전과 같이 '개인적·신앙적' 차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땅'에 천국을 이루려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저 하늘'만을 바라보며 어려운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했다. 일제하 한국교회가 가장 총력을 기울였던 사회운동인 농촌운동은, 이처럼 그 결실을 제대로 맺어보기도 전에 가지가 꺾이고 뿌리가 뽑히게 된 것이다. 김용기의 '가나안농군학교'나 배민수의 '삼애학원'의 경우처럼, 개인적 차원에서 일제말기나 해방이후에까지 기독교 농촌운동의 전통을 이어갔던 사례도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한국교회는 다시금 농촌문제를 외면하게 되었다.

7. 맺음말

이상에서 부족하게나마 일제하 한국교회의 농촌운동을 통해 농촌선교의 일면을 알아보았다. 1920~1930년대 한국교회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가 바로 농촌운동이었다. 이는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닌 바로 선교활동 그 자체였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어찌 보면 '마지못해' 농촌운동에 뛰어든 느낌마저 든다. 즉 농촌이 어려워지고 헌금이 줄어들 때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급기야 교인이 줄어들고 교회마저 흔들리자 부랴부랴 농촌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달리 말해 '교세'(敎勢)가 위협을 받기 전까지는 수수방관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미 언급했듯이 그 방향이 합법적이고 온건했다는 점도, 이미 농촌운동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합법적이라 함은, 일제당국이 저지르고 있는 구조적 수탈에 대해서는 애당초 시비를 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독교 농촌운동의 지도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언급을 회피한 흔적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개인적 차원이라면 모를까 한국교회가 드러내놓고 일제당국과 갈등을 빚는다는 것은 교회의 지상목표인 선교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작쟁의와 같이 합법적인 방법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다소 의외이다. 마치 오늘 노동쟁의가 불법적인 것도 있지만 합법적인 것도 있듯이, 소작쟁의란 합법적으로 보장된 농민의 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당시 한국농촌의 최대 현안이라 할 수 있는 소작문제에 대해 철저히 외면했다. 토지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를 나위도 없다. 여기에는 적지 않은 교회와 교인이 지주였다는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교회가 농촌운동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토지나 재산 등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희생한 사례는 것의 찾아지지 않는다. 과연 농촌교인들을 살리기 위해 농촌운동을 시작한 것인지, 그들을 살려내어 궁극적으로 농촌교회를 살리려고 농촌운동을 전개한 것인지조차 애매하다. 그리고 농촌교회를 살리기 위해 농촌교인들의 일방적 헌신을 요구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사례의 경우 결코 농민을 위한 운동이라 볼 수 없다.

또 당시 교회는 토지를 매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어느 교단의 경우,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교회의 토지를 늘여나갔다. 교회가 지주인 교인과 약속하기를, 그 교인의 생전에는 토지의 수확이 그 자신에게 돌아가고, 사후에는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널리 쓰기도 했다. 그러면 이런저런 방법으로 얻어진 토지를 교회는 어떻게 경작했을까. 공동경작 아니면 소작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교인들이 순서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경작했던 공동경작도, 그 수확은 대부분 교회의 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작이었을 경우 소작료가 어느 정도였을지 궁금하지만, 50% 이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사실 50%만 받아도 당시로서는 '양심적인' 지주였다). 어느 경우이든 교회는 지주였던 셈이고, 따라서 토지문제나 소작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교회들이 이처럼 지주였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아울러 당시 교회가 초점을 맞춘 대상이 자영농이었는가 소작농이었는가 하는 점도 중요하다. 물론 두 계층을 모두 아울렀을 것이지만, 보다 중점을 둔 것은 아무래도 자영농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것은 농촌운동의 각종 프로그램 중에는 토지의 소유를 전제로 한, 말하자면 자영농이라야 가능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몇 가지 한계를 갖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기독교 농촌운동의 의의가 퇴색될 수는 없다. 이 농촌운동은 그 이전에는 현실문제-사회문제-경제문제-농촌문제에 무관심했던 한국교회가 새로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교세의 회복이라는 실질적인 성과도 거두었다. 아마도 교회가 이렇게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전개했던 사회운동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이에 비하면 과연 오늘 한국교회는, 60~70년 전에 비해 얼마나 현실문제-사회문제-경제문제-농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가. 양적 성장은 이루었지만 과연 질적 발전을 이루었는가 하는 상투적인 질문을 또다시 던지게 된다.

몇 달 전 필자는 청·장년회 회원들과 함께 전라남도의 한 농촌교회를 찾아 저녁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리 궁벽한 지역이 아니었는데도, 남자라고는 담임목사님 한 분, 젊은 여자는 사모님 한 분, 나머지 7~8명의 교인들이 모두 60대 이상의 할머니들이었다. 농촌생활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필자의 심정은 착잡했다. 하지만 더 착잡한 것은, 이러한 농촌교회를 위해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단지 얼마의 헌금을 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농촌교회 교인들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필자는 그 농촌에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설령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해도, 또 그곳에서 결혼해 살고 있다 해도 자식만큼은 틀림없이 도시로 내보냈을 것이다. 청년들이 대부분 떠나고 노령화된 농촌교회, 그러나 무슨 수로 그 청년들을 농촌에 붙잡아 둘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과연 교회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이농현상이라는 사회적 대세를 교회가 정말 바꾸어놓을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만 해도 농촌교회가 다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소수를 헤아린다. 누구나 농촌교회에 대해 걱정을 하지만, 정작 구체적인 실천은 뒤따르지 않는다. 농촌교회가 아니고라도, 한국교회는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농촌을 희생시키면서도 한국경제는 잘도 성장해왔듯이. 농촌교회의 전도대상은 너무도 뻔하게 한정되어 있다. 청?장년층은 찾아보기 힘들고 아동이나 노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솔직히 말해서, 청장년들을 농촌에 묶어두거나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교회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일단 현실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차선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첫째, 인력의 문제이다. 주일학교나 여름성경학교를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그렇다고 여름성경학교와 같은 중요한 행사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신학생이나 인근 도시교회의 인력을 한시적으로라도 활용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대형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자체 인력이 빠듯한 교회라도 순번을 정해 의무적으로 인근의 농촌교회를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각 교회의 자발적 참여를 기대하기 보다는, 아예 해당교단에서 반강제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차라리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둘째, 경제의 문제이다. 예전처럼 절대빈곤의 수준은 아니라도 농촌교인의 사정들은 여전히 어렵다. 농산물의 시장개방으로 말미암아 상황은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 뻔하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농촌교회와 도시교회 사이의 직거래이다. 물론 농촌교인들이 생산한 물품이라고 해서 질이 좋다거나 값이 싸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를 주선하는 교회와 구입하는 교인의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이는 농촌교회를 살리고 나아가 농촌선교를 돕는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대형 할인점에 물품을 구입하려 갈 때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단, 이 같은 행사가 빈번할 경우 나올 수 있는 교인들의 불만을 감안해 회수는 제한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목회자의 생활 문제이다. 농촌교회 목회자들의 생활수준은, '먹고야 산다'지만, 정말이지 열악하다. 자녀교육이나 문화생활이란 엄두도 내기 힘들다. 하지만 해당 교단들이 돌보아야 할 교회가 어디 농촌교회뿐인가. 도시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자리잡고 있는 개척교회들도 모두 관심의 대상일 것이다. 이는 해당 교단과 다른 교회의 지원이 관건이며, 다른 지역의 교회보다 농촌교회에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혀야만 가능한 일이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별로 크지도 않은 농촌에 교단이 다른 몇몇 교회가 세워져 있는 현상이다. 그렇다고 구조조정이나 '빅딜'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교단의 분립도 오늘 이 문제의 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전통이 깊어갈수록 교인은 줄어드는 기묘한 현상. 이것이 한국 농촌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교인을 크게 늘린다는 것은 사실상 단념해야 할 절박한 상황. 그렇다고 농촌교회를 마치 자본주의의 논리처럼 포기해야 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농촌교회는 실적이 낮은 보험회사 대리점도 아니요, 상황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벤쳐 기업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와 땅 끝'보다는 훨씬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선교의 요새이기 때문이다.
* 보나콤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5-29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