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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28

2010-Jun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한 신선한 통찰』 서평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79.34.254 조회 수: 3282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한 신선한 통찰』 서평


박창수



1. 논지


대릴 구더가 지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한 신선한 통찰』(조범연 옮김, 도서출판 미션툴, 2005)의 영문 원제는 ‘교회의 지속적인 회심’(The Continuing Conversion of the Church)이다. 이 책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선교이고, 교회는 이 선교적 사명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회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요약문에서 핵심적인 두 단어는 바로 선교와 회심이다. 이 두 단어를 중심으로 이 책의 논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 선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선교를 실행하신다. 교회는 선교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파송’을 받는다. 선교는 그 원래 의미처럼 본질적으로 파송인 것이다. 저자인 구더가 하나님의 선교를 강조하는 것은 구더 자신이 독일에 머물면서 교수들과 학생들과 더불어 토론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지난 세월 복음주의의 선교론과 교회론이 하나님의 선교를 간과한 것에 대한 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처럼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해서, 선교가 교회에 대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선교를 감당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바로 선교인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의 기초가 되는 정경인 신약 성경은 바로 선교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은 선교에 대해 획일화된 견해가 아니라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경적인 선교 신학의 다양성은 초점이 없는 파편화된 다양성이 아니라, 믿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을 그 중심에 둔 다양성이다. 그런 점에서 선교의 핵심은 복음 전도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교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증인이 된다는 의미는 선포(케리그마), 친교(코이노니아), 봉사(디아코니아)를 모두 포괄한다. 그리고 증거는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기독교인의 삶의 전 영역을 규정한다. 또한 증거는 증인(사람), 증거(행동), 증언(말)을 모두 포괄한다. 곧 증거(행동)로써 증언(말)을 보여주어야 하는 증인(사람) 공동체인 교회는 고도의 윤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둘째, 회심. 선교를 그 본질적 사명으로 갖는 교회는 몇 가지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회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면 세상을 복음화할 뿐만 아니라 교회 스스로를 복음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복음화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교회는 지속적으로 회심해야 한다. 바울은 교회에게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면한다(엡 4:1). 이것은 곧 교회 공동체에 대한 “선교적인 삶의 양식을 실천하라”(114)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교회가 해야 할 고도의 윤리적 실천이다. 그리고 구더는 교회가 스스로를 복음화하는 데 실패해 온 원인을 추적하면서 교회가 회심해야 할 몇 가지를 더 지적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교회의 잘못이 바로 ‘축소주의’이다. 먼저 축소주의는 ‘통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여기에서 통제란 곧 교회의 하나님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원죄의 본질인데, 지난 교회사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문화 제국주의와 결합하면서, 서구와 북미의 교회가 자신의 문화를 기독교 문화의 최고 결정체로 오판하고, 타지역에 선교할 때 자신의 문화를 이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할 때 최고 최선의 선교사이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본받아 선교사가 복음을 선교지의 문화에 맞게 ‘번역’해야 한다는 성경적 선교의 기본 개념을 망각하고 훼손한 것이다. 다음으로 축소주의는 ‘복음의 축소’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복음의 축소란, 교회가 지난 교회사에서 복음의 내용을 개인 구원으로 한정하고, 온 세상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뜻은 간과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축소는 ‘선교의 축소’로 나타났다. 곧 복음을 오직 내세적이고 천상적이며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오해하게 되면서, 선교 역시 결신자를 확보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차원으로 축소됨으로써,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의 본질이 무시되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축소주의의 함정에 빠져서 복음과 선교를 축소시키면서, 교회는 예수님을 구세주(Savior)로는 인정하지만 실제의 삶에서 주(Lord)로는 인정하지 않게 되었고, 삶의 자리에서 세상 문화와 ‘타협’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그 본질적 사명인 선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고도의 윤리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복음화하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회심해야 할 내용이다. 그런데 구더가 ‘지속적인’ 회심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 자체의 복음화와 이를 위한 축소주의의 극복은 단회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과제임을 의미한다.



2. 분석


구더는 이상의 논지를 전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논거를 제시한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구더는 박해하는 국가에 대해 교회가 폭력과 보복을 포기하라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초대 교회의 증거에 필수적인 복음에 대한 윤리적인 정의”(240)라고 역설한다. 곧 구더는 교회가 폭력과 보복을 포기하는 목적이 바로 선교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은 선교 문서라고 하는 구더의 타당한 견해와 논리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통찰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 윤리학이 선교와 별개로 (박해하는) 국가와 (폭력과 보복을 거부하는) 교회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둘째, 구더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세상 문화와 타협한 교회 자신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과정에서, 책 전반에 걸쳐서 재세례파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특히 산상수훈의 윤리를 강조하고 요더를 긍정적으로 비중 있게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세상 문화와 타협한 교회 자신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신학적 관점은 재세례파로만 한정될 수는 없고, 하나님의 주권을 비타협적으로 강조한 칼뱅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 구더가 재세례파뿐만 아니라 칼뱅을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의 견해까지 폭넓게 인용하면서 논지를 전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셋째, 구더는 선교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임을 망각한 교회사를 비판한다. 특히 ‘기독교 제국’(Christendom)의 강압에 의한 확산 방식의 선교를 비판한다. 구더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중세 천년 동안 교회의 신학은 진정한 의미의 선교를 다루지 않았다. 이 기간에 실행된 기독교 선교는 기독교 제국의 문화를 외적으로 팽창시키는 ‘확산’에 불과했다.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이러한 선교는 대부분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38). 이런 강압에 의한 확산 방식의 선교는 진정한 선교가 아니다. 옳은 지적이다. 다만 구더가 일반화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위 인용문에서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와 ‘대부분’이라는 구절을 첨가하기는 했지만, 강압에 의한 확산 방식을 취하지 않은 중세의 선교 노력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은 아쉽다. 가령 독일인의 사도로 알려진 선교사 보니페이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좇아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그와 함께 순교한 동료 51명의 경우처럼,1)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의 치열한 선교가 비록 소수지만 중세에도 존재했음을 함께 밝혔더라면 구더의 논증이 더 풍부해지고 온전해졌을 것이다.


넷째, 구더는 교회 일치 운동을 언급하면서, 다양한 문화 속에 사는 기독교 공동체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 회심’을 강조한다. 구더는 자신이 서구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기독교 공동체들”(165)을 비롯하여 세계의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을 통해 서구 기독교 공동체가 회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회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의 영성』(이성배 역, 분도출판사, 1989)에 대한 헨리 나웬의 영어판 서문이다. 헨리 나웬은 해방신학을 접하고 또 중남미의 사목 활동가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개인주의적이고 엘리트적이며 내면적이고 영성화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중남미 교회를 통해 북미 교회를 회개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글을 맺는다.2) 구더가 헨리 나웬의 이런 고백과 같은 내용들을 함께 소개했더라면, 기독교 공동체들 사이의 ‘상호 회심’이 무엇인지 더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섯째, 구더는 교회가 “어떤 특별한 제도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사역의 명백한 대리자로 간주하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게 생각할 때”(183) 축소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타당한 비판이다. 그런데 구더의 이 비판은 피상적으로 보게 되면, 제도에 대한 관심과 개혁을 아예 배타시하는 반(反)제도주의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구더의 견해는, 기독교 공동체가 우월적 관점에서 자신의 문화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그 대신 성경과 신학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거친 후에, 거꾸로 어떤 특별한 제도가 반(反)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까지 축소주의라고 비판하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가령 일부다처제와 노예제에 대해, 성경과 신학을 진지하게 고찰한 후에, 이 제도들은 반(反)기독교적인 제도라고 평가를 내릴 때, 그런 평가를 축소주의라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곧 구더의 이 비판은 반(反)제도주의 입장에서 제도 개혁을 아예 봉쇄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견해는 아닌 것이다.



3. 성찰


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 자신과 한국 교회를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성찰하게 된 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구더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의견 차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면서, 상극의 의견을 갖고 있던 유대인 열심당원과 세리가 모두 오직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 하나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형제가 되었음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육신적으로 증거 한다는 의미는 항상 우리가 교회 내에서든 밖에서든 서로 밀고 당기는 전쟁을 치르는 당파들이 쳐놓은 전선 사이를 오간다는 뜻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선을 긋고 편을 가르는 동안, 선교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벽들을 허물고 우리와 전혀 다르거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친구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284). 구더의 이런 지적은 거의 모든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부자와 빈자로 분열되어 있는 한국 사회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한국 교회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오직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으로 교회 안의 의견 차이를 극복하고, 이것을 통해 사회 통합에 기여해야 함을 시사해 준다. 교회 안의 의견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선교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이처럼 서로 사랑하는 기독교인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또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있는 것 같이 기독교인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게 하시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하셨다(요 17:21). 한국 교회는 주(主) 예수님께 순종하여 교회 안의 의견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둘째, 구더는 예배에 대해 통찰 깊은 건설적인 제안들을 한다. 구더는 교회의 각 성도들을 자신의 직업 영역에 대한 선교사로 세우자고 제안한다. 그 이름은 구더의 제안처럼 ‘지역 선교사’도 좋고 ‘성서한국’ 운동이 추진해 온 ‘사회 선교사’도 좋다. 그리고 예배를 선교사 사역 보고 및 파송으로 개념 전환을 하자고 제안한다. 더불어 성경 공부를 강화하고, 목회자와 비목회자를 막론하고 말씀 사역자를 양성하자고 제안한다. 이 때 말씀사역자의 특성은 에베소서 4:11을 따라 사도적, 선지자적, 복음전도적, 목회교육적이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와 같은 구더의 제안들은 모두 한국 교회가 시도해야 할 중요한 제안들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구더에 의하면 선교를 위해 교회 자체의 복음화가 중요하다. 교회가 증인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다면, 복음화는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복음화는 본질적으로 세상보다 먼저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구더에 의하면, 신약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자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 필자는 교회 자체의 복음화를 위해 희년 정신의 실천을 제안하고 싶다. 구더도 ‘주의 은혜의 해’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깊이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돈과 힘을 숭상하는 현대 교회에 대한 구더의 비판이 희년 정신과 통한다고 생각된다. ‘나사렛 메시아 선언’(눅 4:16-19)을 따라, 한국 교회가 사회에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먼저 한국 교회 스스로 희년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3)


넷째, 선교사가 자기 나라의 문화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복음과 함께 자신의 문화까지 전하려 할 경우, “어떤 환경에서는 교회 선교의 신실성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다”(171)는 구더의 견해를 읽으면서, 한국 교회가 하는 북한 선교의 문제점을 떠올리게 되었다. 현재 북한 선교를 위해 선교지 인구 기준으로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중국 연변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10여 년 전에 연변에서 만난 한 선교사는 매우 헌신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탈북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그는 탈북 동포로부터 통일을 위한 대안 체제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북한 사회주의로 절대 통일되면 안 되니까 남한 자본주의로 통일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비단 그 선교사만이 아니라 북한 선교를 위해 연변에서 사역하는 많은 선교사들이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복음과 남한 자본주의를 함께 전하는 것은 선교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만약 실업과 비정규직, 부동산 투기, 빈부 격차, 물신 숭배 등 남한 자본주의의 실상을 북한 동포들이 제대로 알게 되면, 남한에 사는 우리처럼 북한 동포들 가운데 남한 자본주의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한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는 그것과 함께 전파된 복음 자체에 대한 반대로 귀결될 수도 있다. 구더의 견해처럼, 복음과 함께 자신의 문화(남한 자본주의)까지 전하려 할 경우 교회 선교의 신실성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선교를 위해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복음과 남한 자본주의를 철저히 구분해서, 복음만을 전해야 하고, 남한 자본주의는 전하지 말아야 한다. 통일을 위한 대안 체제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북한 사회주의와 남한 자본주의를 모두 극복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통일 체제를 미리 연구해서 가르쳐야 하고,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구더는 필자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한국 교회가 이 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깨닫고 지속적으로 회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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