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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28

2010-Jun

1세기 팔레스타인의 부자와 가난한 자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79.34.254 조회 수: 3241

1세기 팔레스타인의 부자와 가난한 자


박창수


1세기 팔레스타인의 부자와 가난한 자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땅과 집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1. 부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상업이 아닌 농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우리 유대 민족은 해양 국가에 거주하는 것도 아니며, 장사로 재미를 보거나 또는 그런 나라의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성읍들은 바다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복 받은 기름진 땅이 있기 때문에 오직 이 땅을 경작하면서 고생을 감당하는 것입니다.”(요세푸스, 『아피온 반박문』 1,12; 에케하르트 슈테게만·볼프강 슈테게만 지음, 손성현·김판임 옮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서울: 도서출판 동연, 2009) 84쪽에서 재인용).


그래서 부의 대부분은 상업이 아닌 농업에서 나왔다.


“농업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에 대한 평가는 각기 상이하지만 농업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입증한다는 점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벤-다비드(Ben-David)는 팔레스타인에서 농업의 비율을 대략 70% 정도로 계산한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 외, 84쪽).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의 부자들 중에는, 대상인들과 세금청부업자들과 대금업자들도 있었지만 대지주들도 있었다. 대제사장 가문이었던 하르솜(Charsom)의 아들 엘르아잘은 아버지로부터 1,000개의 마을들과 수많은 노예들을 상속받은 대지주였다(요아힘 예레미야스 지음,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옮김,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2) 139쪽). 랍비 타르폰(Tarphon) 역시 많은 농토와 노예를 거느렸으며, 타르폰이 부자라고 부른 어떤 사람에게는 100개의 포도원과 100개의 전답과 100명의 노예가 있었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 외, 139쪽).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갈릴리 전역에서 대소유지는 아주 대규모였는데, 그 역사적 근원은 프톨레매오 왕조에 있었다.


“모든 땅은 왕의 것이라는 근본 원칙에서 출발하여 프톨레매오 가문의 군주들은 이주민을 작은 분할지나 중간 분할지에 거주시켰고, 큰 영토는 자신들의 식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양도했으며, 전 지역을 세습 영지로 공로가 있는 협력자들에게 넘겨주고, 비옥한 땅들도 역시 돈을 받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았다.”(뷜리발트 뵈젠 지음, 황현숙 옮김, 『예수 시대의 갈릴래아』(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6) 303-304쪽).


이와 같은 왕조에 의한 대사유지는 헤롯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헤로데 가문의 군주 아그리파 2세의 여동생 베레니케의 소유인 대사유지들이 기원후 1세기 중엽에 이즈르엘 평원의 북서 변경지대인 키손 협곡에 있었는데, 이곳은 갈릴래아의 남서쪽이 프톨레마이스의 관할구역과 경계되어 있다. 이 대사유지에 대해서 요세푸스는 자신의 자서전(Vita 24)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후에 베트-쉐아림이라고 불리운 베사라에서 이 왕비에게 바칠 그 주변의 물납세가 징수되고 관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뷜리발트 뵈젠, 304-305쪽).


헤롯 시대 팔레스타인의 토지 소유 실태에 대한 한 연구에 의하면, 지주제는 당시에 만연되어 있었다.


핀시(Fiensy)는 관련 자료(특히 요세푸스, 랍비 문헌, 신약성서, 나아가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토대로, 헤롯 집권기 팔레스타인에서 중간 이상 규모의 토지 소유 실태를 개관했다.······핀시는 이러한 분석에 의거하여, 중간 이상 규모의 토지 소유(땅의 소유자가 직접 일을 할 필요가 없이 소작인이나 날품팔이나 노예를 고용하여 일을 시킬 정도로 큰 토지의 소유)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말한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 외, 188-189쪽).


그리고 부자들의 집은 화려했다. 로마제국 전체에서 부자들은 도시에서 궁전과 같은 집(domus)을, 시골에서는 별장을 지어 놓고 살았는데, 그 부자들의 집에는 매우 비싼 사치스러운 장식이 일반적이었으며, 비록 팔레스타인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화려함이 덜했다고는 하지만 예외는 아니었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 외, 139-140쪽).


“헤롯 가문의 부유함은 그들이 지은 건축물로 나타났다. 헤롯은 ‘하스몬 왕가의 버려진 요새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별장’으로 개축하게 했다. (중략: 인용자) 최근 발굴된 예루살렘 상류층 인사의 주택들은 헤롯의 별장만큼 호화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건물들 역시 그것의 소유주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았음을 드러낸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 외, 222쪽).


2. 가난한 자


마태복음 19:21을 비롯하여 네 복음서에서 모두 24회 등장하는 “πτωχος”(가난한 자)는, ‘전적으로 사회적으로 종속된 자, 즉 외부의 도움에 의지하는 자, 간단히 말하면 거지처럼 가난한 자’를 의미한다(뷜리발트 뵈젠, 325쪽).


“신약성서 시대에는 수없이 많이 “πτωχοί”(가난한 자들)가―복음서들이 암시해 주고 있듯이―길거리에서(마르 10,46; 루가 14,21; 요한 9,8), 부유한 자들의 문 앞에서(루가 16,20), 성전 문에서(사도 3,2) 자선을 구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그들의 삶을 연명했다. 그들은 무일푼이며 영양부족으로 인해 자주 병이 들었다. 그들은 팔레스틴 사회 피라미드의 가장 하층에 속하며, 말 그대로 인간 사회의 변두리 존재들이다.”(뷜리발트 뵈젠, 325쪽).


가난의 원인에는 기원전 1세기와 기원후 1세기의 기근(기원전 25년; 기원후 46/48년)과 전쟁 및 소요(기원전 63년; 기원전 40-37년; 기원전 4년; 기원후 6년; 기원후 66-70년)가 있었다(뷜리발트 뵈젠, 309쪽). 그러나 가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토지문제였다. 소작인은 수확물 가운데 1/2 또는 2/3를 지주에게 주어야 했다(뷜리발트 뵈젠, 329쪽). 그리고 날품팔이꾼들은 먹여주는 것 이외에 평균 1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다(요아힘 예레미야스, 153-154쪽). 소작인과 날품팔이꾼들은 생계 측면에서 볼 때, 주인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받는 노예보다 못했다. 벤-다비드의 요약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땅 없는 농민들은 “심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족을 근근이 먹여 살릴 수 있었고, 아주 절약을 하더라도 언제나 빈곤했다.”(뷜리발트 뵈젠, 308쪽). 지유로운 소농이 소작인과 날품팔이꾼으로 전락하고, 심지어 πτωχος로 추락했는데, 그 근원에는 대토지소유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소농들이 땅을 빼앗기고 부채를 떠안게 된 상황은 로마 통치기의 특색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규칙적인 빈곤화의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로운 소농이 소작인으로, 다시 날품팔이로, 심지어 거지로 추락하는 일은 그리 특이한 경우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제 땅을 갖지 못하고 소작인으로, 심지어 날품팔이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수효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대규모의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마을은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예속되었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 외, 190쪽).


“기가 죽고 언제나 다시 실망하는 많은 사람들은 타개책이 없기 때문에 체념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공적인 사회조직이 가난한 자들에게 건네주는 구제빵으로 만족한다. 그것은 1,400칼로리 정도이기 때문에 기력이 지속적으로 떨어진다. 마지막에는 지팡이와 버팀목으로 움직이며,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진다. 미쉬나는 이 그룹을 “약한 자들”이라고 칭한다.”(뷜리발트 뵈젠, 309쪽).


고대 사회는 일반적으로 계층 간의 사회적 유동성이 없는 사회였는데, 그 이면에도 토지 문제가 있었다.


“사회적 유동성(social mobility) 개념을 하나의 사회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의 변동만이 아니라 거주지와 직업의 변동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맥뮬렌은 그 당시 유동성이 아주 미미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숫자상으로 소농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세상에서는 거주지를 바꾸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사회적 상승이나 하락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유동성의 결핍은 재산이 궁극적으로 땅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대개는 그 땅이 상속되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 외, 164쪽).


가난한 자들의 주거 환경은 열악했다. 아래 연구는 비록 팔레스타인이 아닌 로마의 주거 상황에 대한 것이지만, 이것은 충분히 팔레스타인에도 적용 가능한 것이다.


“도시의 주거 환경은 이들의 비참한 상태를 그대로 나타냈다. 조그만 단칸방에 16명이 들어가 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아주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서 최소한 3층에 달하는 오스티아의 임대 건물(insulae)은 그런대로 괜찮은 주거 환경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그런 임대 건물에 들어가서 살 형편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리 밑이나 발코니 밑, 혹은 주택 구획의 창고 등에서 겨우 살아가야 했다.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가건물(tuguria)을 짓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위생 상태는 그 당시의 최저치에도 못 미치는 처참한 지경이었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 외, 162쪽).


3. 요약


이상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계층의 배경에 대해, 땅과 집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발생 및 심화 원인에는 공통적으로 토지 문제가 있었다. 부자는 토지를 통해 더 많은 부를 획득하였고, 토지를 상속함으로써 세대를 넘어 그 부를 계승시켰다. 반면에 자유 소농이 땅을 잃고 소작인, 날품팔이꾼을 넘어 심지어 거지로 추락하는 과정이 잘 보여 주는 것처럼, 토지가 없는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가난의 나락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부자는 화려한 집에서 사치스럽게 살았던 반면, 가난한 자들은 집이 없거나 있더라도 열악한 집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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