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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30

2009-Jun

케빈 밴후저의 『제일 신학』 요약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23.189.21 조회 수: 3676

 

케빈 밴후저의 『제일 신학』 요약


박창수


1. 들어가는 글


케빈 밴후저가 쓴 『제일 신학』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제일신학-포스트모던 작업실에서의 묵상’을 이어, 제1부 ‘하나님’에서는 2장 ‘삼위일체는 종교 신학에 속하는가?-루비콘 강에서의 낚시와 하나님의 ‘정체성’’, 3장 ‘하나님의 사랑-조직신학 안에서의 위치, 의미, 기능’, 4장 ‘유효한 부르심인가, 인과적 효과인가?-소명, 주권, 병발적 은혜’를 다루고 있다. 제2부 ‘성경’에서는 5장 ‘하나님의 강력한 화행-오늘날의 성경론’, 6장 ‘화행에서 성경 행위로-담론의 언약과 언약의 담론’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3부 ‘해석학’에서는 7장 ‘성령의 조명-특별 계시와 일반 해석학’, 8장 ‘우물가의 독자-요한복음 4장에 대한 반응’, 9장 ‘목격자 증언의 해석학-요한복음 21:20-24과 저자의 죽음’, 10장 ‘바디 피어싱, 자연적 의미, 신학적 해석의 과제-요한복음 19:34에 대한 해석학적 설교문’, 11장 ‘세상은 잘 연출된 무대인가?-신학, 문화, 해석학’, 12장 ‘진리에 대한 판가름-선교, 순교, 십자가의 인식론’을 다루고 있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 가운데 필자가 관심이 많은 제3부 해석학 중에서 요한복음 시리즈인 8장, 9장, 10장을 택하여, 그 가운데 필자에게 인상 깊은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고자 한다.


2. 우물가의 독자


첫째, 독자 반응 비평가들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의미를 ‘만든다.’(352쪽). 하나는 보수적 독자 반응으로서 ‘존중하는 독자’이다(352쪽). 다른 하나는 급진적 독자 반응으로서 ‘저항하는 독자’이다(354쪽).


둘째, 보수적 독자 반응에서 읽기란, 각 텍스트가 정확한 단 한 가지 해석을 가진다는 믿음과 그 텍스트에 우리 자신을 투영하는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행위이다(354쪽). 단 한 가지 해석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반면에 그렇다고 해서 무수한 해석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354쪽).


셋째, 급진적 독자 반응에서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확정하려는 모든 시도를 독자에 대한 권위주의적 지배를 가하려는 은밀한 시도로 보고 이에 저항하면서(354쪽), (이전에는 텍스트의 ‘소유자’이자 해석에 대한 ‘권위’로 생각되었던) 저자의 죽음, 그리고 (‘원래’ 텍스트만큼이나 권위적이며 창의적인 논평을 하는) 독자의 탄생을 모두 선언한다(356쪽). 그래서 변명을 둘러대지 않으면서 거리낌 없이 ‘중립성’이라는 겉치레는 다 내버리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소수적 당파성과 주변부적인 관심사를 개진한다(356쪽). 독자들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한다(357쪽). 텍스트와 독자의 역할은 혁명적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역전되었다(357쪽).


넷째, 독자들은 반응하되 책임 있게 반응해야 한다(361쪽). 독자들은 ‘군림’을 하기 전에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361쪽). 해석이 활용에 선행하듯, 이해는 비평에 선행하는 것이다(361쪽). 독자들의 권리가 텍스트의 권리보다 과장되어 있다(361쪽). 텍스트를 ‘개방’하기 전에 텍스트를 ‘보호’해야 한다(361-362쪽). 우리가 텍스트가 말하려는 바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것과 의도적으로 텍스트를 곡해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곡해하는 자들은 저자나 텍스트에 그 의도들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자신에게 적합한 틀에 텍스트를 두드려 맞추는 반면, 해석은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더불어 텍스트의 성격에 대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텍스트를 읽는 것을 의미한다(362쪽). 그리고 텍스트를 해석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텍스트의 문맥에서 벗어나 한 부분을 해석하는 것이나, 독자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기 위해 그 텍스트를 사용하는 읽기는 실상 사기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363쪽). 독자들은 텍스트를 내버려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텍스트가 그 지닌 소통상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에서, ‘텍스트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두어야 한다(363쪽). 윤리적인 독자가 텍스트에 주어야 할 것은 ‘주목’이며, 그렇게 할 때에만 텍스트는 무엇인가를 독자에게 되돌려 줄 수 있다(363쪽).


다섯째, 독자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인가 아니면 만드는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알버트 슈바이처는 자신의 고전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한 우물에 대한 잊히지 않을 이미지로 결론을 맺는다(372쪽).


“조사자들이 예수의 역사의 우물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그들은 단지 그 아래 물에서 자신의 얼굴의 반영만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학이라는 우물가에 선 독자가, 텍스트상의 예수님을 조사하면서 마찬가지로 오직 자기만을 발견한다면, 늘 그렇듯이 커다란 목마름을 지닌 채 떠나가게 될 것이다. (중략: 인용자)


신선한 물을 공급받기 위해 그 우물가에 서 있는 독자는 텍스트에서 물을 길어 그 물을 마셔야 한다. 여기에서 ‘마신다’는 것은 받아들이고 전유한다는 뜻이다. 독자에게는 텍스트를 그 본성과 의도에 따라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다.”(372-373쪽).


3. 목격자 증언의 해석학


첫째, 글의 양식과 내용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목격 증언을 넘어서서 그 증언을 검증하려는 시도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특히 이 점은 바로 절대적 의의를 지니는 특이한 사건들의 사실과 의미를 전달하려고 시도하는 장르인, 증언의 경우에 그렇다(392쪽).


“증언은 P를 진술하는 목격자의 행위가 ‘그 P’를 입증하는 것으로 제공되는, 즉 그 목격자가 참되게 ‘그 P’를 진술할 적실한 능력이나 자격들을 갖추었다고 받아들여지는 화행이다. 제4복음서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아닐지라도 많은 경우에, 증언은 우리가 문제의 해당 사건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392쪽).


증언들의 배후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그 증언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덜 말하게 하는 것이다(392쪽).


“지금까지 너무나 오래, 책임 있는 학자에 대한 인상이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었다. 의구심의 해석학은 잘못 안내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자리에 가있는 것이다. 불신은 첫 번째 해석학적 반사 작용이 결코 될 수 없다. 특히 증언의 경우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지금은 역사 비평학자의 과시되는 자율성이라는 정체를 있는 그대로 폭로해야 할 때다. 그 자율성이라는 것은 일종의 윤리적 개인주의와 지적 교만이다.”(392쪽).


믿음의 해석학이 의구심의 해석학보다 더 낫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제4복음서가 참이라는 사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의 기록자들이 잘 알았듯이, 불행히도 거짓 증언이 창궐한다. 그렇지만, 증언을 해석할 때, 의구심이나 믿음 가운데 어느 태도가 해석학적으로 더욱 열매를 맺겠는가? 기껏해야, 회의주의자는 오류로부터의 안전함은 더 많이 누리겠지만, 다른 대안들보다 더 큰 설명력을 지닌 내러티브적 틀을 무시하고 참일 수 있는 수많은 믿음을 놓칠 수 있는 모험을 감행한다. 믿는 자는 거짓된 신념들을 습득할 수 도 있는 모험을 감행하지만, 참된 믿음과 예수님의 삶과 운명을 이해할 수 있는 더 많은 해석의 틀을 받아들이는 데 열려 있다.”(394쪽).


둘째, 우리가 들은 바를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는 한, 우리는 들은 바를 믿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증언자는 유죄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인식론상으로 무흠한 것으로 간주된다(393쪽). 이 원칙이 제4복음서에 대한 해석에서 지극히 중요하다(393쪽). 증언은 신념을 낳는 합당한 절차이다(393쪽).


셋째,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증언을 따라가는 일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이 하나의 증언이 되는 지점에까지 그 증언의 함의들을 따라가는 모범적인 독자이다(395쪽). 저자의 목적은, 독자가 한 사람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인데, 아마도 이것이 제4복음서의 가장 심오한 아이러니일 것이다(395쪽). 곧, 겉으로는 예수님을 심리하는 내러티브가 독자를 심리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395쪽).


넷째, 개인의 고유성은 자율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 대한 책임에 있는 것일 수 있다(395쪽). 목격자는 타자에게 증언할 책임이 있다(396쪽). 증언은, 증언을 기록했던 자에게 그랬듯이, 증언할 것을 독자에게 요청한다(398쪽).


다섯째, 이상적인 독자에게 이해의 순간은 믿음의 순간이기도 하다(397쪽). 독자들은 오직 그 내러티브들의 역할을 받아들임으로써 믿음의 전망에서 예수님을 이해함으로써만 정확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397쪽).


4. 바디 피어싱, 자연적 의미, 신학적 해석의 과제


첫째, 성경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과 문학적 구성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학문 공동체와 성경을 믿음을 형성하는 경전으로 읽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 공동체 사이의 해석의 목적들에 기본적인 양분(兩分)이 존재한다(403쪽).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대한 목적과 기준 둘 다를 포함하는 접근 방법, 즉 공동체의 건덕과 텍스트의 의미 둘 다에 주목하는 접근 방법이다(403쪽). 저자는 자신이 일컫는 성경의 ‘신학적 자연적 의미’(403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자연적 의미’란, 바로 이 문학적 맥락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이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저자들이 바로 이 단어들을 가지고서 무엇을 행하느냐를 가리킨다(403쪽). 그리고 ‘신학적’이란 말은, 신적 저자로서 하나님이 바로 이 정경적 맥락에서 바로 이 인간의 말을 가지고 행하신 것이다(403-404쪽). 저자는 성경에 대한 고전적 해석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비평학 이후의 복권’ 전략을 하나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밝힌다(404쪽). 저자의 시도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연적 의미라는 개념에 스며든 어떤 왜곡들에 대한 시정뿐만 아니라, 그 자연적 의미의 복구이다(404쪽).


둘째, 바디 피어싱에 대한 유행의 열풍은 성경을 포함한 텍스트들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흔히 어떻게 취급되는지에 대한 적절한 은유가 된다(409쪽).


“바디 피어싱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적인 것’에 대한 끔찍한 위반이다. 마찬가지로, 성경 텍스트라는 몸도 그 자연적 의미에 대한 관심은 적고 개인적인 정체성이나 공동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의 역할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뚫어져 구멍이 나 버렸다(pierced).’ 문제는 그러한 뚫는 일(piercing)이 결국 따지고 보면 ‘자연적인 것’에 대한, 즉 한편으로는 육체에 대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의 의도에 대한 일종의 폭력행위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409쪽).


우리는 텍스트를 몸과 마찬가지로 정체성 형성의 자리로 바라볼 수 있다(414쪽).


“정체성 형성에 대한 이 편애야말로 오늘날 바디 피어싱을 하는 사람들과 포스트모던 해석자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을 정체성 형성의 수단으로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1) 만일 형성되는 것이 텍스트의 자연적인 의미가 아니라 해석 공동체에 의해 부양된 의미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특히 해석 공동체의 다양성에 비추어볼 때, 그 해석 공동체가 텍스트에 대해 행하는 것이 단지 (어떤 임의적인?) 사회적 관행에 불과하지 않은 그 이상의 것이라고 어떻게 변호될 수 있겠는가? (2) 공동체가 자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재강화하기 위해 텍스트를 사용하는 한, 공동체의 해석은 오로지 텍스트의 몸에 대한 일종의 부과며, 심지어 어쩌면 폭력적인 강요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414쪽).


셋째, 신학적인 관점에서, 자연적인 것은 정확히 창조주의 의도에 일치하는 것이다(412쪽). 그러므로 자연적인 의미를 배격하는 것은 창조된 질서의 맥락에서 신학적으로 이해되는 자연에 대해 반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412쪽).


넷째, ‘의미’를 찾기 위해 성경을 ‘여느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읽으라는 권고는 역사비평학자들을 대변하는 말이다(415쪽). 그러나 역사비평학자들은 텍스트 작성의 역사를 재구성하거나 겉으로 드러난 역사적 사건들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건들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텍스트에 놓여 있는 것을 찾기보다는 텍스트 배후에 놓여 있는 것을 찾느라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곁길로 빠져버렸다(415쪽).


다섯째, 최우선적인 해석상의 명령은 바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는 것이다(441쪽). 그리고 궁극적으로 성경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텍스트를 읽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에 의해 읽히는 문제이다(446쪽). 참된 증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을 기술하는 일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이 메시지를 구현하는 일도 포함하는 것이다(446쪽).


“만일 교회가 성경에 의해 변화를 받아야 한다면―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그 말씀을 칼같이 휘두르시는 성령에 의해 ‘꿰뚫어져야’ 한다면―우리는 그 소통 의도와 변혁 의도에 자신을 열기 위해 읽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 대한 신학적 해석자들은 서로와의 어울림 가운데서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의 효과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더 깊은 어울림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446-447쪽).


5. 나오는 글


이상에서 케빈 밴후저가 쓴 『제일 신학』의 제3부 해석학 중에서 8장, 9장, 10장을 택하여, 그 가운데 필자에게 인상 깊은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였다. 해석학은 어렵다. 그러나 밴후저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서, 필자가 보기에 복음주의적 해석학의 관점에서 소위 급진적 관점들을 매우 설득력 있게 논파해 나갔다. 여기에 밴후저의 ‘신실한 탁월성’이 있다. 이 책은 해석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신학과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손색이 없다.


참고문헌


케빈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제일 신학』,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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