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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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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Jun

『예수의 정치학』 서평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79.34.254 조회 수: 3406

 

『예수의 정치학』 서평


박창수



1. 논지


존 하워드 요더가 지은 『예수의 정치학』(신원하·권연경 옮김, IVP, 2007)은, 1972년에 출간된 영문 초판을 보완하여 20년 후인 1992년에 출간된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근거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주류 기독교 사회윤리학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기독교 사회윤리학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온 역사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다. 요더는 이를 위해 당대 성서신학의 연구 성과를 활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이 서평에서는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을 몇 가지 기술하고자 한다.


2. 장점


첫째, 요더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면서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많은 논거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특히 희년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 책의 장점이다. 요더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선포에서, ‘나라’와 ‘복음’은 정치 영역에서 차용한 것이다(64쪽). 그리고 요더는 예수님이 나사렛 메시아 선언에서 인용하신 이사야 61장 2절의 “여호와의 은혜의 해”에 대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는 그것이 “희년, 곧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부정들을  말끔히 씻어 내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동일한 지점에서 새로 시작하게 될 희년의 때로 이해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65-66쪽). 또한 요더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 상당 부분 선지자들의 희년 사상에 빚지고 있다는 안드레 트로크메의 저서를 소개하기도 한다(66-67쪽). 그리고 요더는 다음과 같이 희년을 희망이자 생산적인 비전으로 강조한다.


“우리의 관심은 선지자들이 희년의 이상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레위기 25장의 존재로 인해 경제 생활이 원점에서 새롭게 시작될 한 시대에 대한 기대는 하나의 살아 있는 희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사야 61장의 증거는 장래의 회복을 향한 비전으로서 희년 이상이 얼마나 생산적인 비전이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68쪽).


나아가서 요더는 예수님이 이사야 61장을 인용하신 후 “이 글이···응하였느니라”는 선언을 하실 때 그 선언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 백성들의 사회 정치적, 경제적 관계가 가시적 방식으로 재편성되는 것이다.”(71쪽). 그리고 요더에 의하면 희년 실천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러한 희년의 실천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천국을 위한 선결 과정에 속한 것이었다. 이 길에 들어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128쪽).


또한 요더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희년에 대해 설명하면서 공산주의나 전체주의와는 선을 명확히 긋는다. 그리고 동시에 교회의 희년 실천이 있었다면 유혈 혁명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하지만 예수가 기독교적 공산주의를 처방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에센파의 공동체 규칙과 유사한 수도원적 규정들이나 유대인들을 위한 일종의 전체국가 헌법 같은 것을 제자들에게 남겨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신 일이 없다. 집단주의 체제는 모세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기독교회가 모세의 율법에 담긴 희년 규정들에 대해 이스라엘보다 더욱 진지한 태도를 보였더라면 많은 피비린내 나는 혁명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130쪽).


한편 요더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대해, “예수는 자신을 향한 조직적 반대에 대해 새로운 사회적 실체(social reality)를 공식 출범시키는 것으로 대응한다.”(72쪽)고 말한다. 요더에 의하면, 그 제자 공동체는 ‘자발적 헌신’을 특징으로 하며(78쪽), 그 삶의 성격은 불의한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이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선택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삶의 성격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절정으로 하는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이다.”(79쪽).


“십자가는 그 나라를 향한 우회로도 아니요 장애물도 아니다. 심지어 그 나라로 통하는 길도 아니다. 십자가는 도래한 왕국 자체인 것이다.”(99쪽).


요더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로 상징되는 새로운 윤리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 즉 그는 근본부터가 철저히 다른 새로운 삶의 질서를 지닌 새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기존 사회를 위협한 사람이었고, 그가 진 십자가로 대변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윤리로 우리를 초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102쪽). 그리고 제자 공동체에는 세상과는 다른 정치 윤리가 요구된다. 그것은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다. 요더는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5-27)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새로운 사회의 독특함은 그것이 사회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거나 가시적이지 않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리더십과는 다른 대안적 리더십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데 있다. 세상 왕들의 통치 방식을 벗어나는 이 대안은 ‘영성’이 아니라 종노릇(servanthood)이다.”(80쪽).


이와 같은 제자공동체의 정치 윤리는 한마디로 희년 정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구약 희년 사회의 정치 체제는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인간 왕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평등 자유민의 지파 연합 정치 체제이다. 그리고 이 체제는 넓은 의미에서 희년법에 포함되는 근족의 땅 무르기와 사람 속량 제도에서 잘 나타나듯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힘 있는 자들이 희생하는 섬김의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공동체의 정치 윤리로 지배가 아닌 섬김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희년 정치 윤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더에 의하면, “희년은 바로 역사 속에서 시행되면서 그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하며, 제한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제도다.”(189쪽). 이어서 요더는 희년을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주기적인 개혁과 같은 것”(189쪽)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요더가 희년을 제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요더가 사회 제도 개혁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의 전반적 흐름을 고려할 때, 그런 치우침을 상당 정도 상쇄시킬 수 있는 견해로서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요더는 그 희년을 구약 율법을 넘어 “예수가 선포하는 희년”(189쪽)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중요한 것이다. 요컨대 요더가 성서신학을 전개한 이 책의 전반부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특히 희년에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전개한 것은 매우 깊이 있고 탁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요더가 논지를 전개하면서 자신의 태생적 기반인 재세례파까지 비판하는 철저성과 정직성을 보이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다. 먼저 요더는 구약 성전(聖戰) 본문들을 해석하면서 그에 대한 후기에서, 예수님과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 개입 가능성에 대한 인식의 배경이 되었을 거룩한 전쟁 전통이 1세기 당시에 어떤 의미를 가졌을지 살핀다(157쪽). 이어서 요더는 ‘새로운 세대’론을 주장한 재세례파를 비판한다.


“야웨의 전쟁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이전의 해석들은 종종 이 사안을 너무 쉽게 무시하려고 했다. 어떤 이들은 마태복음 5장에 반복되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모델로 한 소위 ‘새로운 세대’론에 기초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 방법은 15세기 ‘첫 종교개혁’의 체코 형제단(Czech Brethren), 그 이후 등장한 ‘재세례파’ 유형의 평화주의자들, 그리고 톨스토이 등에 의해 활용되었다. 예수는 새로운 시대의 기초를 놓을 자격을 갖춘 하나님의 특별 대사로서 규칙들을 바꿀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157쪽).


요더는 후기에서 이 책의 초판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한 자신의 다른 글 “우리 조상 아브라함”(If Abraham Is Our Father)을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초기 이스라엘의 경험이나 이상과의 단절 혹은 전복이라는 입장이 아니라 그것의 유기적 연장의 관점에서 생각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소유할 수 있을까 하는 도전”을 밝혔음을 언급한다(158쪽). 요더는 이와 같이 신약성서를 해석할 때 구약성서와의 유기적 연관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 단절성을 강조한 재세례파 류의 새로운 세대론을 비판한 것이다. 또한 요더에 의하면, 예수님은 “(가령 분파주의적 평화주의자들이나 경건주의자들처럼) “너는 너대로 정치를 하라. 나는 나대로 다른 더 중요한 일을 하겠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194쪽). 이런 점들은 요더의 학자적 양심이 빛나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3. 단점


첫째, 요더는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당대 성서신학의 연구 성과를 인용하지만,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서에 집중하고 있고 구약성서는 폭넓게 다루지 않고 있다. 비록 요더가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사회 윤리와 관련하여 분석하고 바울 서신을 비롯한 신약성서 본문들을 통해 초대 교회의 관점을 동일한 맥락에서 제시하는 것을 넘어서, 구약 성서에 나오는 희년과 성전(聖戰) 관련 본문들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구약과의 유기적 연관성 속에서 신약성서를 해석하고자 하는 자신의 관점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더의 구약 성서 인용의 폭은 매우 좁다. 요더가 폭넓은 구약성서 해석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지 못한 것은 이 책의 단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 요더는 예수님의 비폭력에 대해 탁월한 설명을 하지만, 그 해석에서 중요한 결함을 노출한다. 먼저 요더가 설명한 예수님의 비폭력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공적 사역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로서 인간 예수가 거듭하여 직면했던 유일한 유혹은, 사용할 수 있는 폭력적 방법들을 활용하여 정당한 혁명을 도모하고 이로써 본연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라는 도전이었다. 그에게 시험거리는 사회적 도피의 유혹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때로 선택하는) 이 대안은 처음부터 이미 배제된 것이었다. 사두개파식의 기득권 체제에 동조하면서 보수적으로 사회 책임을 행사하는 것(대다수 그리스도인이 선택하는 또 하나의 대안이다) 역시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가 보여 준 삼중적 거부에 공감하게 될 때다. 그것은 정적주의(quietism), 기득권 유지의 책임 그리고 어렵지만 항상 새롭게 시도되는 정말로 매력적인 십자군 방식, 이 세 가지를 명백하게, 근본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176-177쪽).


그리고 요더는 자신의 논지와 위배되는 다른 논자들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비판하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리처드 니버의 견해이다. 니버는 비폭력에 대한 성자의 윤리는 성부의 윤리와 성령의 윤리에 의해 보완되거나 심지어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성부의 윤리란 창조 질서의 윤리를 말하며, 성령의 윤리란 교회사 전체에 걸쳐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에서 이루어져 왔던 모든 결정과 선례와 변화와 적응의 과정들과 관련되는 교회의 윤리이다(183-184쪽).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창조 질서의 보편성과 타당성, 다른 한편으로는 축적된 기독교 전통의 역사적 연속성과 적실성 사이에 끼어, 예수의 윤리는 그 속에 어떤 실질적 독창성이 있든 간에, 이젠 더 이상 아무런 결정적 중요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84쪽).


필자는 니버의 견해 가운데 비폭력의 윤리라는 성자의 윤리는 창조 질서의 윤리라는 성부의 윤리와 교회의 윤리라는 성령의 윤리에 의해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은 성자의 윤리를 무시하는 주장으로서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필자는 요더처럼 비폭력의 윤리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 역시 창조 질서의 윤리와 교회의 윤리를 무시하는 것으로서 지나치다고 본다. 필자의 관점은 삼위일체처럼 각 윤리들이 모두 함께 있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요더가 예수님의 비폭력 윤리를 교회가 세상과 ‘타협’해 왔다고 본다면 그것 역시 지나친 주장이다. ‘타협’이 아니라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세상에 관철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성서의 원리를 세상에 현대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교회의 과업이다. 그리고 요더는 예수님이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로서 갖고 계신 독특성,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와 다른 점이 있다는 차이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의 사역을 오직 속죄와 구원을 위한 것으로만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주류 신학에 대한 요더의 비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독특성을 간과하고, 우리가 예수님처럼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 역시 문제가 있는 신학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행할 것은 행하되, 우리와 달리 오직 예수님만이 하셔야 했던 속죄와 구원의 사역을 인정하는 한계 내에서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A와 B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관점이 아니라, A와 B 둘 다 취하여 조화시키는 관점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 요더가 양자택일을 강요한 기존의 신학적 전통 5가지를 비판하면서 펼친 요더 자신의 입장과 동일한 것이다(187-196쪽). 그런 점에서 요더의 주장들 가운데 배타적인 것들은 이 책의 단점 가운데 하나이다. 


셋째, 요더의 희년 이해에서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나사렛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희년 선포 직후 예수님과 나사렛 사람들 사이의 갈등 본문에 대한 요더의 해석이다. 요더는 이 기사에 담긴 두 번째 주제에 대해 “민족적 이기주의를 상대화함으로써 희년 성취에 관한 첫 번째 주제가 일종의 민족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준다”고 잘 설명하지만, 그것이 희년과 관계없다고 말한다.


“예수는 예언서에 기록된 이전의 선례를 언급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 새 세대의 도래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 주제가 희년 선포에서 파생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71쪽).


그러나 이것은 요더의 오해이다. 귀향 공동체의 토지 분배에 대한 에스겔서의 본문 가운데에는 희년이 언급되고 있는데(겔 46:17), 그 본문은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땅을 기업으로 나누어 줄 것을 명령하고 있다.

 

“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곧 너희 가운데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찌니 너희는 그 외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외인이 우거하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47:22-23).


곧 에스겔서에 의하면 희년이 적용되는 수혜 대상은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에스겔서의 희년 이상을 따라, 예수님이 선포하신 희년은 이방인을 포함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나사렛 사람들은 극렬히 반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더가 예수님과 나사렛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설명하면서, 그 기사에 담긴 주제가 희년 선포에서 파생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 언급은 에스겔서를 고려하지 못한 유감스런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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