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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28

2008-Feb

희년의 사람들-남강 이승훈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39.227.146 조회 수: 4226

 

희년의 사람들-박창수 성서한국 경제분과 전문위원


집의 기와를 벗겨 오산 학교 지붕을 이다 - 남강 이승훈


남강(南岡) 이승훈(이昇薰, 1864~1930) 선생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성실하게 일하여 자수성가한 사업가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한 교육자였다. 남강은 기독교 대표로 삼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한 기독교 독립운동사의 큰 별이었다.


남강의 부모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 남강은 열한 살 나이에 공장과 상점을 경영하던 한 부잣집에 잔심부름하는 사환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집에서 먹고 지내면서 날마다 주인의 요강을 버리고 방을 쓸고 걸레질하며, 손님의 재떨이와 화로를 가져오는 허드렛일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주인이나 손님이 버리라고 한 붓과 종이로 남이 보지 않을 때 글씨 쓰는 연습을 했는데, 종이가 까맣게 될 정도로 몇 십 번이고 반복하였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인정 많은 주인은 남강에게 종이와 붓을 주면서 격려하였다. 남강은 그 부잣집에서 사환으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도 틈날 때마다 스스로 열심히 글을 읽었다. 그 집에서 남강은 자연스럽게 주인과 손님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장사와 나라 사정 등 세상 공부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인이 경영하는 유기 공장에 자주 심부름을 가던 남강은 햇빛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새까만 옷을 입은 채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고통스럽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의 평등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강은 열다섯 살에 결혼하면서 독립하였고 열여섯 살부터 8년 동안 유기행상을 하였다. 각 지역의 장날을 따라 옮겨 다니며 유기를 팔았다. 그런데 겨울에 새벽길을 나설 때는 평안도의 강추위가 주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행상군들이 쓰던 방법대로 비상을 조금씩 먹고 길을 나섰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비상을 조금 먹으면 몸이 후끈거려서 추위를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강은 이때부터 걸음이 매우 빨라졌고 똑바로 걷는 습관이 생겼다. 남강은 특히 다른 행상군의 발이 미치지 않은 황해도까지 유기행상을 다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까지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오가느라 여간 힘들지 않았지만 그 대신 훨씬 많은 유기를 팔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황해도 출신의 애국지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고 나라 형편에 대한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남강은 스물네 살에 그 동안 유기행상을 하면서 번 돈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빌린 돈을 합하여 유기 공장과 상점을 차렸다. 그가 이 때 세운 공장도 애초에는 다른 유기 공장과 다를 바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시절에 본 유기 공장 노동자의 참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돈을 들여서 공장의 구조를 햇빛이 많이 들어올 수 있게 고치고 먼지가 나지 않게 하여 항상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일할 때 입는 작업복과 일을 마친 뒤에 입는 평상복을 따로 입게 하였고, 일정하게 쉬는 시간을 주었으며, 임금을 높여 주었다. 그러자 그 지역의 다른 공장주들이 남강을 비난하였는데, 남강은 이에 절대 굴하지 않고 그 소신대로 경영했다. 남강은 사업에 성공하자 그 사재(私財)로 가문의 집성촌을 만들면서, 마을의 공유 농지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빈부의 차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한 때는 청일전쟁으로 공장과 상점이 파괴되고 큰 위기에 빠졌으나, 남강은 철저한 정직의 실천으로 큰 신용을 얻었고 결국 재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남강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사흘밤낮을 꼬박 고민한 끝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절실하다는 생각으로 오산 학교를 세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남강은 자기 땅을 팔아 오산 학교의 재산을 만들었고 독지가들을 모아서 다달이 경상비를 조달했지만 줄곧 학교 재정이 부족했다. 남강은 교사들이 굶는다고 하자 “나 혼자만 밥 먹을 수는 없다. 남은 집과 세간을 팔아 학교에 주고 우리는 학교 곁에 가 학생들 밥이라도 해주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다. 학교의 지붕에 비가 샌다고 하자 자기 집 기와를 벗겨서 이었다. 이와 같은 남강의 정성어린 헌신으로 오산학교에서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함석헌, 한경직 등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이와 같은 남강의 실천은 바로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禧年) 정신과 맞닿아 있다. 남강이 유기 공장에서 노동자를 위해 편 경영은 가혹한 노동을 금지하고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라는 희년의 노동법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강은 공유 농지를 마을에 기부하였고, 자기 땅을 팔아 오산 학교에 기부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평등한 토지권을 받았다는 희년의 토지법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강이 심지어는 자기 집의 기와까지 벗겨서 오산 학교의 지붕을 이었고, 일제의 고문과 옥고에도 불구하고 그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바친 것은,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희년 정신을 본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강은 말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내가 후진이나 동포를 위해서 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시키신 것이다.”

출처: <플러스인생>(전 <신앙계>)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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