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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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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Jun

판넨베르크의 『기독교 윤리의 기초』 요약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23.189.21 조회 수: 4799

 

판넨베르크의 『기독교 윤리의 기초』 요약


박창수


1. 들어가는 글


판넨베르크가 쓴 『기독교 윤리의 기초』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현대 세속 문화에서의 도덕과 윤리’에서는 ‘근대사회의 인간학적 토대 및 교의학에 대한 윤리학의 우월성’, ‘도덕적 규범의식의 해체’, ‘도덕의 공적인 기능이 상실되었는가?’, 그리고 ‘삶의 영위에 있어서 도덕적 동기화와 윤리적 정향’을 다루고 있다. 제2장 ‘윤리의 원초적 상황과 윤리적 정초의 주요방법들’에서는 ‘관습, 법 그리고 윤리’, ‘선에 대한 물음의 해명으로서의 윤리학’, ‘선에 대한 플라톤적 물음에 대한 기독교적 변형’, ‘의무론적 윤리학’, 그리고 ‘칸트의 의무윤리학’을 다루고 있다. 제3장 ‘윤리학의 토대: 주요 정초 시도에 대한 비판적 평가’에서는 ‘칸트 윤리학의 형식주의’, ‘자연법과 기독교의 계명 윤리’, 그리고 ‘선에 대한 물음과 윤리학의 신학적 토대’를 다루고 있다. 제4장 ‘하나님 나라와 윤리’에서는 ‘종말론적 메시지의 귀결로서의 예수의 율법 해석’, ‘사랑과 호의’, ‘인간의 피조성과 사랑의 계명’, ‘사랑과 법’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 공동체 정초’를 다루고 있다. 제5장 ‘기독교 윤리와 인간 보편적 윤리성’에서는 ‘특별하게 기독교적인 윤리가 존재하는가?’, ‘신학적 분과로서 윤리학이 교의학과 가지는 관계성’,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인간학적 전제’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6장 ‘세속화된 사회적 맥락에서의 기독교 윤리의 원칙’에서는 ‘자기실현과 섬김’, ‘자기통제’, ‘부부와 가족’, 그리고 ‘세속적 국가에서의 기독교적 행위’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필자에게 인상 깊었던 제4장 ‘하나님 나라와 윤리’와 제5장 ‘기독교 윤리와 인간 보편적 윤리성’, 그리고 제6장 ‘세속화된 사회적 맥락에서의 기독교 윤리의 원칙’을 중심으로 요약하고 나오는 글에서 그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기술하고자 한다.


2. 하나님 나라와 윤리


첫째,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갖는 윤리적 적합성은 특정한 기독교적 윤리에 한정되지 않는다(103쪽). 그 이유는 윤리학의 구성적 개념인 선의 개념이 갖는 하나님에 대한 사상의 연관성 때문이다(103쪽).


둘째,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윤리를 정초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는 것은 인간 행동의 사안이라거나, 아니면 적어도 사회의 혁명적 변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목표에 이르게 하는 것이 인간 행동의 사안이라는 식의 방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104쪽).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메시지에 따르면 홀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통치의 가까움에 대한 신뢰가 인간의 행동에서 결과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마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104쪽).


셋째, 자신의 삶을 이미 전적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향해 정향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이 지금 이미 침투해 들어온다(106쪽).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그 하나님 통치의 미래성은 하나님과의 공동체성에 놓여 있는 구원의 미래성이다(106쪽). 예수님의 메시지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현재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이미 지금 최종적인 구원의 현재성 속에서 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106쪽).


“구원이 하나님과의 공동체성 및 하나님의 통치에 있고, 또한 예수의 보냄을 통해서 이 구원이 현재적으로 사람들에게 시작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명백해진다고 하면,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공동체성 및 그의 구원에 남아 있으려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인간의 세상으로 향해진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에 따르면(마 18:22-35) 하나님 통치의 구원의 현재성을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죄의 용서는 수용자의 측에서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수용자의 기꺼운 태도에 결부되어 있다. 주기도문의 다섯째 간구도 동일한 사상을 말해준다(평행구, 눅 11:4). 동일한 사상이 보편적인 형태로, 선인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자신의 해를 비치게 하는 창조주의 부성적 선함으로부터 원수사랑 계명을 정초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발견된다(마 5:45 이하). 그러나 예수는 이에 대한 논증을, 하나님 통치의 구원이 예수의 보냄을 통해서 중재되어 믿는 자들에게서 이미 현재가 되는 하나님 통치의 종말론적 미래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 대신 이 논증은 마태복음 5장 45절 이하의 피조물의 창조자이자 보존자로서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것 속에서 표현되는 사랑으로 가득한 돌봄에서 출발한다. 예수의 메시지에는 따라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두 가지의 논증이 발견된다. 우리가 현존하도록 보존하는 창조의 보살핌의 사랑이 하나이고, 예수의 보냄을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이미 현재적으로 하나님 통치의 구원을 선물해 주는 것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다른 하나이다. 이 때 주도성을 띠는 것은 하나님 통치의 가까움에 대한 종말론적 메시지이다.”(106-107쪽).


넷째,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할 때, 예수님과 서기관들은 차이가 있었다. 예수님은 율법 전승의 권위를 전제하지 않았고, 언약 사상의 토대 및 십계명의 두 판들의 연관성 토대에 의존하지도 않았으며, 그 대신 종말론적 메시지로부터 논증하셨다(108쪽). 반면에 서기관들은 모든 개별적 계명들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율법 전승의 권위를 이미 항상 전제했으며, 또한 바로 사랑의 이중 계명을 그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108-109쪽). 


다섯째, 이기주의적인 자기 이익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도덕성이 가지는 생동감의 원천은 바로 타인에 대한 호의의 충동이다(109쪽). 그리고 복음의 이웃 사랑이 호의의 개념을 통해서 해석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이웃 사랑이 감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에로스적인 사랑의 격정적인 경향성의 의미에서 그런 것도 아니며, 다른 한편으로 이웃 사랑이 단지 자비의 행위들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112쪽). 이웃 사랑의 감정적인 뿌리는 호의에, 신약성서에 의하면 아가페에 있다(112쪽).


여섯째, 하나님의 나라는 현존하는 세상에 반립하는 일종의 기독교적 대안 실천이라는 의미에서의 윤리적 실천을 통해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119쪽). 이미 예수님의 율법 해석도 이런 식의 프로그램을 거절했는데,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개인에게 향한 사랑의 계명을 예수님의 출현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통치의 미래의 현재화로부터 정초했기 때문이다(120쪽).


일곱째, 윤리적 논증의 인간학적 기초는 먼저 그 자체로서 고찰되어야지, 하나님에 대한 사상의 교의학적 전제들로부터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121쪽). 윤리학의 정초를 신론으로부터 출발시키지 않아야 한다(121쪽). 윤리적 주제를 신론과 연관시키는 것은 윤리적 논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해명되어야 한다(121쪽). 오직 이런 방식으로 해야 기독교적으로 특수한 윤리적 논증이 설득력 있게 보편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121쪽). 그러므로 윤리적 논증의 지반은 실제로 먼저 인간학에서, 그것도 신학적 판단이 개입되기 이전의 인간학에서 찾아야 한다(121쪽). 이 지반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상이 윤리학에 대해서 갖는 의미가 정초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121쪽).


여덟째, 신학적 윤리학은 종말론적 전망을 인간의 창조적 현실성과 결부시킬 것인데, 이것은 이미 예수님의 선포에서 선례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종말론적 미래는 창조의 완성을 그 내용으로 가지는 것이다(122쪽).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신학적 윤리학에서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을 선물로서 받아들이는 것과 또한 삶을 계속해서 전달해 주는 것인데, 인간의 창조는 그 완성을 하나님과의 공동체성에서 찾기 때문이다(122쪽).


“다시 말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움직임에 참여하는 것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타인에 대한 호의적 전향(轉向)에서 인간 창조는 완성된다. 호의에서 인간은 타인을 향해서 자신을 개방시키며 아울러서 자신의 이기주의적 자기 이익을 넘어선다. 이렇게 될 때 타인과의 공동체성에 대한 인간의 규정은 신적인 사랑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 실현된다. 물론 이 실현은 잠정적인 형태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변화되어서 신적인 사랑의 구원사가 완성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122쪽).


아홉째, 그리스도 안에(우리 밖에)있는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가지는 것에 대한 기초가 된다(123쪽).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살고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자아에 매여 있음으로부터 해방되고, 타인을 향한 호의를 위해 해방된 자로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122쪽).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름 아니라 참으로 자연스러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여기서 자연스러운 삶이란 강요되지 않고 자유로운 인간성이라는 인간에 대한 규정성의 실현을 의미한다. 참된 인간성(Humanität)으로 인도하는 것, 다름 아니라 바로 이것이 또한 기독교 윤리의 과제이다.”(123쪽). 


열째, 법과 사랑은 비록 그 성격이 다르지만 모두 사람들의 공동체성과 관련된다.


“법과 사랑, 그 두 가지가 공히 인간간의 공동체성에 관여됨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대립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강제의 요소와 결부될 수 있는 법적 규범의 외면성에 대해서 사랑의 내면성 및 사랑의 자유로운 자발성이 대립되었다. 이런 대립적 관계에 담겨 있는 진리적 요소는 여기서 우정적인 관계들과 법적 관계들 간의 구분을 통해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 구분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과하게 해서는 안 된다. 즉 법적 공동체가 존속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법적 공동체에서의 공동적인 삶도 역시 인간들 간의 상호호혜적 호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역으로 친구와의 상호호혜적인 공동체성이 어떤 확고하고 지속적인 형태를 띠게 하는 것이 사랑에서도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공동적 삶의 지속적인 형태는 항상 법적 성격을 가진다. 이런 형태는 타인에 대한 승인과 신뢰성과 책임성을 내적으로 포괄한다. 그런 한에서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정초된 법적 관계들을 생기 있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은 법을 정초한다고 말할 수 있다.”(128쪽).


3. 기독교 윤리와 인간 보편적 윤리성


첫째, 특별한 기독교 윤리의 존재 여부와 관련하여, 칸트를 비롯하여 계몽주의 시대에 널리 유포되었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어떤 특별하게 기독교적인 윤리가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단지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서 생각된 선한 것과 옳은 것을 행동으로 옮김에 있어서 특별한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윤리에 기여하는 부분인가? 만약 후자의 입장이 정당화된다면 윤리는 그 내용에 따라서 볼 때에 오로지 이성으로부터만 정초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 다만 신앙은 이성이 구속성을 띠는 것이라고 여기는 윤리적 내용을, 부가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승인해주고, 이를 통해서 선의 실행을 위한 부가적인 동기를 제공할 뿐이다.”(135쪽).


종교개혁의 신학적 전통도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인식은 모든 사람에게도 유포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했으며, 또 그 인식은 양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실증적인 계시에 기초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136쪽). 루터는 영원한 하나님의 의지의 특별한 역사적 형태인 유대 율법을 ‘유대인들이 소유한 거울’이라고 불렀다(136쪽). 하나님의 법에 대한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이로써 십계명을 내용적으로 자연법의 요구와 동일시했던 전통적 입장을 계승한 것이었는데, 이런 점은 도덕법이 단순히 이성을 통해서 인식될 수 있다는 칸트의 생각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136쪽).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적어도 윤리적 규범에 대한 내용적 규정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136쪽).


둘째, 오늘날 기독교 세계에 대해, 기독교적 신앙 의식의 힘으로부터 기독교적인 윤리적 판단 형성을 쇄신하는 것이 시급하다(142쪽).


“기독교적 뿌리들로부터 자라온 윤리적 시각들은 이 뿌리들로부터 단절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두 세기 내지 세 세기 동안 사회적 삶에 영향을 끼치는 힘을 보존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힘이 소진되었는데, 이는 종교적, 윤리적 다원주의의 표지를 달고서 현대 산업사회들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들이 보여주는 바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기독교 세계에 대해서 시급하게 기독교적 신앙 의식의 힘으로부터 기독교적인 윤리적 판단 형성을 쇄신하는 것이 요청된다.”(142쪽).


셋째, 기독교적 신앙 의식의 힘으로부터 기독교적인 윤리적 판단 형성을 쇄신할 때, 인도주의적 보편타당성에 대한 주장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142쪽).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는 인도주의적 보편타당성에 대한 주장을 이미 내세우고 있다(142쪽).


“기독교적 신앙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세상의 창조자이자 모든 인류를 책임지고 있는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있다. 고대 기독교는 이런 보편타당성의 주장을 정당화하고자 성서의 하나님 계시와 철학의 하나님에 대한 사상을 결합시켰다. 바로 그런 식으로 초기 기독교의 로고스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라는 기독교적 선포의 주장이 보편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입증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의 로고스론은 예수의 율법 해석도 역시 예수 안에 출현한 신적인 로고스 자체가 가지는 권위의 표현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이해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로서는 확증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이는 성서적 도덕 계명들 및 예수를 통한 이 계명들의 해석이 자연법의 요구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율법 해석 및 사도들의 삶의 지침들이 보편타당성을 가진다는 논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런 논증 방식이 또한 예수의 율법 해석에 대해서, 그리고 이 예수의 율법 해석이 그의 종말론적 메시지와 가지는 연관성에 대해서 오늘날 주석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판단들과 부합하는가? 이런 토대 위에서 기독교적 도덕성과 자연법의 결부에 대한 신빙성이 오늘날 새롭게 정당화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로지 자연법적으로만 구상된 윤리를 특수하게 기독교적으로 변형시키는 것도 역시 그 근거가 입증되어야 한다.”(142-143쪽).


“모든 윤리적 논증이 이루어지는 영역 위에서 기독교 신학적 윤리의 논증도 역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기독교 신학적 윤리의 논증이 예수의 선포에서 내포되어 있는 인도주의적 보편타당성에 대한 주장을 명시적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145쪽).


넷째, 윤리적 논증이 인간학적 기초 위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으로부터 기독교 신학 내부에서 교의학에 대한 윤리학의 상대적 자립성을 승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귀결된다(146쪽). 인간의 성화라는 주제에서 교의학은 특별히 기독교 윤리학과 밀착하게 된다(146쪽). 그러나 이 주제에서도 교의학 내부에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행위, 또는 인간을 하나님의 행위에 결부시키는 것이다(146쪽). 이에 반하여 윤리는―기독교 윤리도 마찬가지로―인간의 행위만을 그 자체로서 대상으로 삼아서, 인간의 삶의 영위의 문제 및 삶의 영위의 과제를 위한 방향 설정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146쪽).


다섯째,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은 ‘인격적 존엄성’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의 기반을 이룬다(148쪽). 그리고 기독교 윤리는 인간 존엄성에서 인권의 기초를 발견한다(148쪽). 또한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인간의 창조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의 창조인데, 이는 인간 공동체성의 근거가 된다(148쪽). 이런 공동체성은 부부 및 가족의 공동체성을 넘어서 보다 큰 차원인 민족의 공동체성 및 민족들 간의 공동체성으로 나아가는데, 후자의 이 두 공동체성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기초 위에서 정의와 평화를 통해서 완성되어야 한다(149-150쪽).


여섯째, 국가 질서는 단지 인간의 사회적 규정의 임시적 형태로 인정되는 반면, 하나님 나라에서야 비로소 인간의 사회적 규정은 그 순수한 실현을 이루게 될 것이다(150쪽).


“국가의 정치적 질서에서는 법질서로 표현되는 인간 상호간의 공동체적 규정성이 사실상 항상 다소간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모든 지배에 수반되는 불의의 문제들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국가 폭력은 다시금 죄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는 개인들 상호간의 적대적인 공격으로부터 법을 보호하는 의무로 인해서 정당화되기도 한다(참고 롬 13:1-5). 정치적 형태의 공동체질서는 따라서 기독교적 고찰에 따르면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 형태의 공동체 질서가 한편으로는 인간의 공동체적 규정성이 실현되도록 그 종말론적 완성의 관점에서 법률공동체를 전개시키고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국가적인 지배질서로서 인간의 공동체적 삶에서 죄의 파괴적인 영향들을 제한하는 일을 맡는다. 하지만 이 때 이 정치적 형태의 공동체 질서는 그 스스로가 항상 인간의 권력 의지 및 권력 남용의 형태에서 죄의 유혹에 빠지는 위험에 처해 있다.”(146쪽).


일곱째, 기독교 윤리의 표준적인 인간학의 관점에서, 첫 번째 주제가 개인의 인격적 존엄성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인간의 공동 삶에서 정의와 평화를 통해서 세워진 사회적인 삶의 질서의 기초가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공동체적 규정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주제는 죄의 문제가 된다(151쪽). 인간의 행동에서 죄의 지배가 편만해 있음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기독교적 인간학과 윤리학의 사실주의를 잘 드러낸다(151쪽).


4. 세속화된 사회적 맥락에서의 기독교 윤리의 원칙


첫째, 기독교 신앙에 대해 낯선 사회나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이탈되고 난 후에 생기는 사회에서, 교회가 교회를 둘러싼 사회적 세계와의 관계에서 ‘대조 사회’로 특징짓는 관점이 갖는 시사성 때문에, 기독교 윤리 전체를 교회론과 결합시키려는 시도들이나, 기독교 윤리를 교회론 위에서 정초하려는 시도들이 가지는 매력이 설명될 수 있다(155-156쪽). 그러나 그렇게 할 때, 기독교적 윤리가 가지는 인도주의적 보편타당성에 대한 물음이 소홀해지고 말거나, 아니면 그 보편타당성은 다만 기독론적으로 정초된 요구라는 의미에서만 고려되고 말 것이다(156쪽).


둘째, 세속화된 사회에서 삶의 영위를 위한 표준적인 이상은 ‘자기실현’이다(157쪽). 그러나 기독교적 삶의 양식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 및 이웃에 대한 봉사’, 그리고 죄성을 절제하는 ‘자기통제’이다(157쪽).


셋째, 역사적으로 세속화된 국가에서 자유 개념은 소유 개념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158쪽). 1776년 미국 독립선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창조주에 의해 부여된 양도 불가능한 권리들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가 있으며, 이 권리들의 보호를 위해 정부가 세워졌다(159쪽). 여기서는 소유 개념 대신에 ‘행복의 추구’라는 표현이 등장했는데, 재산 획득은 물론 족히 행복 추구의 한 부분적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159쪽). 독일 기본법에서 각 개인이 가진 기초적인 인격권을 ‘자신의 인격의 자유로운 계발’이라고 표현한 것도 역시 바로 행복의 추구라는 정형화된 표현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다(159쪽). 그러나 인권에 대한 미국 독립선언은 일반적인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이미 이탈한 것인데, 그 이유는 기독교적 이해에 따르면 인간에 대한 최고의 규정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곧 자기 자신을 공동체 안에서 도덕적 인격으로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0쪽). 하나님과 결부되지 않고,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선(善)에 대한 규범과 결부되지 않고, 철저하게 무제한적으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서 부여된 권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죄의 표출이다(160-161쪽).


넷째, 기본권의 정형화에 자리 잡고 있는 상이한 문화적 뿌리들이 있다(160쪽). ‘인간 존엄의 불가침에 대한 보장’은 최종적으로 성서적 원천에서 연원을 갖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인격의 자유로운 계발에 대한 권리’는 18세기의 자유주의로 소급되는데, 이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원죄론을 거부하고 그 대신 다양한 개인적인 추구와 노력들이 보편적인 복지의 산출로 수렴된다는 생각을 수용했다(160쪽).


다섯째, 봉사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의 자유와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루터에 의하면 자유의 표현이다(161쪽). 만약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공동체성을 통해서 인간적 권위에 대한 모든 최종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하다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을 위해서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섬기는 종이 되며 모든 사람들의 아래에 있게 된다(161-162쪽).


“루터의 소명론에서는 각 개별적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부름 받는다는 사실과, 그들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어떤 특별한 활동의 수행을 통해서 공동의 삶에 특정한 기여를 하도록 부름받는다는 사실이 결속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의 직업사상은 개신교의 역사에서 놀라울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쳐 왔다. 노동 분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 각자가 맡은 세상적인 직업 노동은 믿음으로 부름의 결과로서 초래된, 사람들에 대한 봉사의 구체적인 형태로서 이해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루터는 가르쳤던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봉사의 사상은 매우 광범위하게 잊혀져 있는 상태다. 삶의 영위에 대한 주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자기 실현을 다룬다. 따라서 이른바 봉사수행 또는 봉사를 위한 직업에 대한 평가는 공공의 가치평가에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런 현상은 인도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공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업(소명 Beruf)은 종종 단지 인간의 자기 실현이라는 목표를 위한 물질적인 수단을 창출하는 일거리(Job)로 여겨지며, 이때 인간의 자기 실현은 직업 노동 이외의 영역에서 주안점을 추구한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적 삶의 영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기독교적 삶의 영위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 및 하나님의 창조물을 위한 그 분의 뜻에 대한 봉사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웃 인간에 대한 봉사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 봉사는 특별한 자선적 활동들에서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봉사는 각자가 성취해야 하는 각각의 사회적 역할들에서 실행된다.”(164-165쪽).


여섯째, ‘삶의 내어줌’으로 규정되는 ‘타인을 위한 삶’의 전제는, ‘주어진 삶의 받아들임’이다(165쪽).


“다시 말해서 오로지 자신의 삶이라는 것은 자신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인정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그 삶에 대해서 감사하기를 기뻐하는 자만이 또한 삶을 다른 사람에게 자유롭고도 기꺼이 내어 준다. 따라서 봉사라는 형태로 삶의 영위를 이해한다고 해서 결코 삶의 기쁨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삶의 성취와도 대립되지 않는다. 아니, 전적으로 그 반대이다. 타인에 대한 봉사로 이해되는 삶은 항상 또한 성취된 삶이 될 것이다.”(165쪽).


일곱째, 우리 시대의 도덕적 성향은 평등에 대한 추상적인 생각으로 각인되어 있는 데 비해, 성서의 사랑에서는 평등의 원칙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168쪽).


“코이노니아(koinonia), 공동체성에 대해서 바울이 말을 할 때,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관점에서 말을 했지, 그리스도인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에 대한 관계와 관련해서 말했던 것이 아니다. (중략: 인용자)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연대성이 가지는 이런 우선성은, 신앙이라는 것 그 자체에 무관심하게 되었기에 종교의 차이성들을 무차별적으로 판단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이 배워야 할 내용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적 사랑과 기독교적 봉사가 차별 없이―특히 신앙에 대한 구분 없이―모든 사람들에게 미쳐야 한다는 요청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를 무차별화시키는 세속주의에 불합당하게 적응해 버리고 마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을 의식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봉사 및 사람들에 대한 봉사로 영위함으로써 그런 무차별화에 대항한다고 해서, 기독교적인 봉사(디아코니)가 비(非)그리스도인들에게도 미칠 수 있다(롬 12:17 이하)는 사실이, 그것도 신앙의 증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항상 신앙의 증언과 결부된 채로 기독교적 봉사가 비그리스도인들에게로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실은 세속화된 사회의 분화된 노동의 기능들을 맡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직업활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169쪽).


여덟째, 세속화된 사회의 공공의 일반적인 의식에서, 충동에 대한 억압이 갖는 유해성에 대한 관점이 개인의 자아계발에 대한 권리에 대한 생각과 결합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170쪽). 그래서 이전에는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부담스러운 것으로 느껴졌던 행동양식을 계발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비도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170쪽). 만약 그런 행동 양식들이 개인들의 자유로운 자아계발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라면, 그런 행동 양식들을 제지하는 것이 오히려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170쪽). 그러나 기독교적인 삶의 영위의 과제는 자기통제라는 사상을 통해서, ‘육’의 ‘욕구’, 즉 이 죽게 될 삶의 이기적인 충동을 다스리고 길들이는 과제가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정리된다(172쪽). 이것은 현대인의 정서로는 확실히 매력적이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172쪽), 기독교적 삶의 영위에 부과된 과제인 자기통제는 매우 중요하다. 자기통제라는 개념은 의지가 집중하고 있는 목적이 삶의 영위와의 관계에서 통일성을 창출하는 작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173쪽).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는 자기 자신의 삶의 영위를, 시합에서의 경주를 전적으로 목표로 하는 스포츠인의 삶의 영위와 비교한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어지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고전 9:25).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될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자신의 삶을 훈련하는 것이 기독교적 금욕의 의미이다. 기독교적 금욕에 있어서는 절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통일성을 부여해 주며 또 우리의 삶을 채워줄 우리 현 존재의 지배적인 목적 아래로 모든 삶의 계기들을 복종시키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이 목적은 예수가 선포하고 또 그 자신이 그렇게 삶으로써 보여주었던 것처럼, 다름 아닌 하나님과 그의 나라 그 자체이다.”(173쪽).


아홉째, 저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국가질서에 대해 얼마만큼 동의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초기 기독교의 시절에 이방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이질적인 기반 위에 서 있는 국가들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은 법 질서에 순종할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점을 넘어서서, 도대체 국가 및 국가 헌정의 형식과 내적으로 자기 동화를 이룰 수 있겠는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부가적인 조건들에 달려 있다. 첫째로는 도대체, 그리고 얼마만큼 국가의 헌정에서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유사성이 인식되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로는 국가의 헌정이 얼마만큼 기독교적 메시지와 교회의 삶을 위해서 공간을 제공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도대체 한 국가의 헌정이 기독교적 견지에서 볼 때 다른 대안적인 정치질서 모델들보다 더 나은 우선성을 부여 받을 만한가 하는 점이다. 이런 세 가지 기준들의 적용을 통해서 어떤 한 정치질서 모델이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가까운지가 드러나며, 기독교적 견지에서 한 국가질서에 대해서 얼마만큼 동의를 표할 수 있는지가 드러난다.”(193쪽).


열째, 저자는 근대 국민 주권 사상은 하나님 주권 사상을 압박했으며, 현대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과두 통치체계에 불과하다고 예리하게 비판한다.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다른 요소들은 기독교 신앙에 별로 근접해 있지 않다. 거기에 속하는 것으로 먼저 국민 주권사상을 들 수 있다. 이 사상은 기독교 신앙에 낯설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서 주권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근대의 국민 주권사상은 하나님 주권사상에 압박을 가해 왔으며, 그래서 마침내 후자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아니면 이와 동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현대의 많은 헌법들에서 물론 국민주권은 헌법 입법자가 국민에 대해서 가지는 책임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는 책임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제한된다. 한 국민 전체가 잘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잘못의 가능성은 국민주권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다수의 의지와 관련해서 더욱 잘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세속적 법치국가에는 물론 중요한 제한 수단이 있다. 이것은 다수에 의한 지배를 공공복리라는 잣대에 묶어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공복리는 다시금 일차적으로 지배적인 다수에 의해서 정의되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은 공공의 의견에 의해서 견제를 받는다. 그러나 공공의 의견이라는 것은 대개 특권층의 담론 주도자들의 의견이 널리 퍼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특권층의 담론 주도자들은 종종 사적인 관점들을 그들의 의견 표명에 반영시킨다. 국민 통치라는 표상은 그 자체가 현대 민주주의적 헌법국가에서 비판을 필요로 하는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표상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으로 인해서 비판이 요청된다. 요컨대 실제로는 국민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을 국민의 대표자들로서 이해하고 있는 개인들이 통치를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개인들은 국민의 선택된 대리자라고 하지만, 후보자들을 먼저 선택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 아니라 정당들의 몫이다. 그렇게 되면 그 후보자들 가운데서 국민이 접하는 결정이라는 것은 사전의 선택을 통해서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다. 정당들 및 그 위계적 지도부의 영향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결과는 다음과 같다. 즉 선택된 대표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정당들의 구성원들이며 직업 정치인들이다. 하지만 이런 점은 민주주의의 이념에 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대개 자신들이 후보자로 뽑혀서 은택을 입은 정당의 흐름을 따라가게 마련이며, 공공복리의 요구사항들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정당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현대 민주주의 제도가 실제로는 국민투표적인 요소를 갖춘 과두 통치체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196-197쪽).


5. 나오는 글


이상에서 『기독교 윤리의 기초』 가운데 필자에게 인상 깊은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하였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저자는 기본권의 정형화에 자리 잡고 있는 상이한 문화적 뿌리들로 두 가지를 언급하는데, 그것은 성서에 연원한 ‘인간 존엄의 불가침에 대한 보장’, 그리고 18세기 자유주의에 연원한 ‘인격의 자유로운 계발에 대한 권리’이다(160쪽). 이 두 가지 대조는 6명의 희생자를 낸 용산 참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철거민의 주거권과 사업지속권은 ‘인간 존엄의 불가침에 대한 보장’에 포함되는 데 반하여, 개발업자의 재산권과 이익추구권은 ‘인격의 자유로운 계발에 대한 권리’에 포함된다. 이 가운데 한국 사회 법률은 후자의 편에 섰다. 그러나 성서는 전자의 편에 설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지금 여기’에서, 성서적 관점대로 ‘인간 존엄의 불가침에 대한 보장’이 ‘인격의 자유로운 계발에 대한 권리’보다 더 상위에 있게 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과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둘째, 근대 국민 주권 사상에 대한 비판에서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국민 전체가 잘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잘못의 가능성은 국민주권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다수의 의지와 관련해서 더욱 잘 일어날 수 있다.”(196쪽).


그런데 이 언급은 저자의 나라인 독일의 역사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언급의 역사적 배경에는 바로 당시 독일 국민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나찌 정권의 패악에 대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는 자기 나라의 역사적 실패를 통해 국민주권 사상에 대한 매우 예리한 비판을 통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판넨베르크 지음, 오성현 옮김, 『기독교 윤리의 기초』, 한들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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