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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10

2008-Jul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서평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23.189.20 조회 수: 8320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서평


박창수


1. 들어가며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는 고참 악마인 스크루테이프가 자기 조카이자 신참 악마인 웜우드에게 보내는 31편의 편지들을 묶은 가상 소설이다. 이 책에서 주인공 스크루테이프는 악마가 맡은 사람을 ‘환자’라고 부르고, 예수님을 ‘원수’라고 부른다.


루이스에 의하면, 그가 이 책을 쓴 후에 가장 흔하게 받은 질문은, 정말로 악마를 믿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루이스는 부정과 긍정의 두 가지 대답을 동시에 한다. 만일 악마가 ‘하나님처럼 영원하고 자존적이되, 하나님과 반대가 되는 권세자’를 뜻하는 것이라면, ‘아니오’라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영원하고 자존적인 존재란 있을 수 없고, 또 하나님과 반대가 되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루이스는 악마가 하나님과 반대되는 존재가 아니라, 타락한 천사로서, 천사와 반대되는 존재라면, ‘예’라는 것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런 견해가 성경과 기독교 전통과 일치한다고 덧붙였다.


루이스는 이 책의 서문에서, 악마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마를 믿되 불건전하게 지나친 관심을 쏟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루이스의 악마관에 동의하며, 필자가 아는 한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판단된다.


이 책에서 필자가 흥미롭게 본 것 중 하나는, 루이스의 ‘관료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루이스의 ‘1961년판 서문’에 의하면, 가장 큰 악은 디킨스가 즐겨 그린 ‘범죄의 소굴’이 아니라, 관료조직에서 일어난다.


가장 큰 악은 카펫이 깔려 있으며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따뜻하고 깔끔한 사무실에서, 흰 셔츠를 차려 입고 손톱과 수염을 말쑥하게 깎은,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안하고 명령(제안하고 제청받고 통과시키고 의사록에 기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지옥에 대한 상징으로서 경찰 국가의 관료조직이나 아주 비열한 사업을 벌이는 사무실 비슷한 것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지옥에 대한 지상의 유사물로 “두려움과 탐욕으로만 똘똘 뭉친 관료 사회”를 그려냈다. 그리고 이런 관료 사회에서 전 조직체를 움직이는 원리는 바로 ‘먹느냐 먹히느냐’이다. 이런 관점에서 루이스는 악마들이 행동하는 동기 중의 하나로 ‘일종의 굶주림’을 말하면서, 악마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수 있게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루이스는 이런 살풍경을 인간이 동료 인간을 완전히 제 것으로 소화시키고 싶어하는 인간 사회에서도 본다고 말하면서, 인간 상호간의 ‘강렬한 지배의 열망’를 비판한다. 사실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은 루이스의 고백처럼, 악마의 삶을 고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이 책에 그려진 악마의 언행을 통해 인간을 성찰하는 것이 저자인 루이스의 의도에 충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기독교 신앙관에 대한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2. 기독교 신앙관


필자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루이스의 기독교 신앙관에 대해, 동의하면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 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견해가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점도 있었다. 이제 그것들을 하나씩 기술하고자 한다. 먼저 필자가 루이스의 견해 중에서 동의하는 점들이다.


첫째, 과학과 사색의 중요성이다.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악마에게 이야기한다.


너의 임무는 환자의 곁을 지키며, 그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이 제대로 생각하게 되면, 그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악마의 방해가 힘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약점으로 흔히 지적되는 반지성주의는, 비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어쩌면 악마의 활동에 유리한 사조인지도 모른다.


둘째,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의 중요성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의를 품으면서, 멀리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는 것은 위선이다.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악마에게 이런 이중인격을 조장하라고 조언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셋째, 진정한 쾌락에 대한 긍정이다.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악마의 큰 실수를 지적하며 비난한다.


네가 어떻게 진정한 쾌락이야말로 최후까지 막아야 할 금기사항임을 잊을 수 있단 말이냐?


친구들에게 아는 척 하려고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진짜 좋아서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진심으로 좋아서 시골길을 산책하는 것과 같은 긍정적인 진짜 쾌락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의 시도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취향과 충동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행동에 대한 강조이다. 스크루테이프는 그리스도인이 회개에 대해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한들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덧붙인다.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다섯째, 잘못된 기도에 대한 비판이다.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악마에게 환자의 관심을 내면생활에 집중시키라고 조언한다.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등한시한 채, 가장 어렵고 영적인 의무에만 마음을 쓰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환자의 기도가 악마의 활동에 해악을 끼치지 못하도록 막을 비법을 알려 준다.


고도로 ‘영적’인 기도만 줄창 읊어대게 하거라. 어머니의 류머티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면서, 그 영혼의 상태만 가지고 노심초사하게 만들라구.


여기에는 기분을 중시하는 잘못된 기도 관행에 대한 루이스의 비판도 포함된다. ‘완전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내면적이고 비공식적이며 규칙에 매이지 않는 기도’를 한답시고 의지와 지성을 집중시키지 않은 채 막연하게 경건한 ‘기분’만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기도는 잘못이다. 그런 점에서 ‘몸’으로 하는 기도가 중요하다. 다음은 스크루테이프의 이야기다.


얼핏 보면 원수 편의 최고참들이 수행하는 침묵의 기도와 비슷하기도 하니, 영리하면서도 게으른 환자들을 오랫동안 속여 넘기기에 딱 좋지 뭐냐. 또 설사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해도, 육체의 자세와 기도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사기치는 덴 문제가 없을 게다.


잊지 말거라. 인간들은 자신이 동물이며, 따라서 육체가 하는 짓들이 반드시 영혼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는 점을 노상 잊고 산다.


그리고 감정을 중시하는 기도도 잘못이다.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악마에게 사람들이 기도할 때 감정에 집중하게 만들라고 조언한다.


환자가 제 마음 속만 줄창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의지로 감정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하게 만들거라.


제가 원하는 감정을 꾸며 내는 데 성공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기도의 성패를 평가하게 만들라구. 사실 그런 종류의 성패란 그 순간의 몸 상태가 좋으냐 나쁘냐, 상쾌하냐 피곤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혹시라도 하지 않도록 잘 처리하고.


또 사람들이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기도가 중요하며, 그 때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만든 그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향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알고 계시는 당신’을 향해 기도해야 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각났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절대화하게 될 때, 그것은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의 일부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다른 성품들을 가려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켜버린다. 


그리고 청원기도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 생활이다. 청원기도를 간과하고 소위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만이 진정한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 영성이다. 다음은 스크루테이프의 이야기다.


거짓 영성은 어떤 경우에든 부추길 만한 것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겉보기에만 경건한 근거에 속아넘어가, 일용할 양식과 아픈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원수의 분명한 명령(그 작자 특유의 단조롭고 진부하고 재밋대가리 없는 방식으로 내린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를 때가 많단다.


여섯째, 현재에 대한 강조이다.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악마에게 사람들이 현재를 무시하고 미래에 집중하게 만들라고 조언한다. 미래에 대한 생각은 희망이나 두려움으로 불붙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통찰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시간론’이다.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현재와 영원의 관계에 대한 루이스의 관점은 경탄할 만하다. 다음은 스크루테이프의 이야기다.


원수가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를 치기에 불안과 걱정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원수는 인간들이 현재 하는 일에 신경을 쓰기 바라지만, 우리 임무는 장차 일어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


인간은 시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원수는 그들을 위해 영원을 예비해 두었다. 그래서 인간의 주된 관심을 영원 그 자체와 이른바 현재라는 두 가지 시점 모두에 집중시키려 들지. 현재는 시간이 영원에 가닿는 지점 아니냐. 원수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인간은 현재의 순간, 오직 그 순간에만 원수와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즉 현재의 순간에만 자유와 현실성을 얻는 게야.


한 마디로 미래만큼 영원과 닮지 않은 건 없어. 미래는 시간 가운데서도 가장 완벽하게 찰나적인 부분이지. 과거는 꽁꽁 얼어붙어 더 이상 흐를 수 없고, 현재는 영원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니까.


따라서 거의 모든 악은 미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감사는 과거를 바라보고 사랑은 현재를 바라보지만 두려움과 탐욕과 정욕과 야망은 앞을 바라보지.


원수의 이상형은 하루종일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일한 다음(그 일이 자기 소명이라면), 그 일에 관한 생각을 깨끗이 털고 결과를 하늘에 맡긴 채 그 순간에 필요한 인내와 감사의 마음으로 즉시 복귀하는 인간이다.


우리가 바라는 건 전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끝없이 쫓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 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버리는 것이다.


원수는 인간들이 자유롭게 미래에 기여하는 바를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없는 현재’ 속에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이거든.


일곱째, 기독교는 진리이지 결코 수단이 아니라는 통찰이다. 특히 어떤 기독교 사회 운동의 명분이 아무리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기독교를 수단으로 전락시키게 되면, 그 운동은 더 이상 기독교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런 위험성에 대한 루이스의 경고는 기독교 사회 운동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다음은 스크루테이프의 이야기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무시하는 일로 뭉친 소집단은 내적으로는 서로 찬사를 주고 받는 온실관계를 발전시키는 반면,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엄청난 교만과 증오를 키워나가게 되지. 그들이 뻔뻔스럽게 이것을 즐기는 이유인즉슨, 자신들의 배후에 ‘대의’가 버티고 있으며 이 대의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게야. 애초에 원수를 위해 모인 소집단들이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애국심이든 평화주의든 자신이 믿는 종교의 일부로 생각하게 하거라. 그러다가 당파적 정신의 영향을 이용해, 그것이야말로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하라구. 그리고 나서 조금씩 조금씩 소리없이 비위를 맞춰가며, 종교가 ‘대의명분’의 일부로 전락하는 데까지 몰아가야 한다. 그러면 기독교는 영국의 전쟁수행이나 평화주의에 유리한 논증을 탁월하게 제공하느냐에 따라 겨우 그 가치를 인정받는 지경에 처하게 될 게야.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세속적 명분이야 어떤 걸 추구하든지 상관없다. 집회, 팜플렛, 강령, 운동, 대의명분, 개혁운동 따위를 기도나 성례나 사랑보다 중요시하는 인간은 우리 밥이나 다름없어.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이런 조건에서는) 더 그렇지. 이 아래에는 그런 인간들이 우리 한가득 득실거리는 판이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보여주마.


우리가 바라는 바, 정말 간절히 바라는 바는 인간들이 기독교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출세 수단으로 이용한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라도 - 하다못해 사회정의를 위한 수단으로라도 - 삼게 해야지. 이 경우, ‘사회 정의 원수가 요구하는 것이므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일단 믿게 한 후, ‘기독교는 그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므로 가치 있다’고 믿는 단계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이 미세한 틈이 보이느냐?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믿으라는 것, 이게 바로 우리 수법이야.


다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루이스가 기독교 사회 운동의 의미와 효과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를 예로 들어 보자. 다음은 스크루테이프의 이야기다.


기독교와 정치의 전반적인 연계성에 관해서라면 우리 입장이 좀 미묘해지지. 기독교가 정치적 삶에까지 흘러들어가는 거야 분명히 원치 않는 바다. 그랬다가 정말 정의로운 사회가 세워지기라도 하는 날엔 정말 큰일이고말고.


마지막으로 필자가 루이스의 견해 중에서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화주의와 전쟁에 대한 루이스의 관점이다. 루이스가 이 책을 쓴 시대적 상황에 대해 말하자면, 시간적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와중이었고, 공간적 배경은 영국이었다. 그래서 전쟁에 대한 하나의 대응 방식으로서 당시 영국에서 일어난 평화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전부 부정적인 것이다. 다음은 스크루테이프의 이야기다.


다음 편지에는 네 환자가 전쟁에 보인 반응을 잊지 말고 조목조목 빠짐 없이 적어 보내거라. 그래야 극단적인 애국지사로 만드는 게 좋을지 열성적인 평화주의자로 만드는 게 좋을지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환자를 잘 구슬러 양심적인 반전주의자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는 자동적으로 소리만 크고 인기는 없는 조직적 소수파의 일원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해서는 신앙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음을 수차례 강조하면서 관대하게 기술한다. 다음은 스크루테이프의 이야기다.


전쟁 그 자체에는 우리에게 결코 유리할 것 없는 경향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야. 물론 상당한 분량의 잔혹성과 음탕함을 기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런 재난을 통해 수천 명의 인간들이 원수에게 돌아서는 꼴을 보게 될 수도 있고, 혹 그런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이때껏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던 수만 명의 인간들이 자아보다 고귀하다고 믿는 가치와 명분에 눈길을 돌릴 수도 있지.


전쟁이 계속해서 죽음을 환기시킨다는 점도 우리에겐 크나큰 재앙이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무기 가운데 하나인 ‘세속에 만족하는 마음’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니까.


루이스의 이런 평화주의에 대한 지나친 비판과 전쟁에 대한 관대한 관점은 결코 성경적인 관점이라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특히 악마의 살인 활동에 대해, 루이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간과하였다. 사단이 어떤 존재인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은, 사단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8:44)라고 말씀하셨다. 전쟁만큼 살인을 광범위하게 일으키는 것은 없다. 그리고 전쟁은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안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해 버린다. 루이스는 전쟁을 통해 인간이 죽음을 환기하고 하나님께 향할 수 있다는 점을 너무 높이 평가한 나머지, 전쟁에 의한 광범위한 살인과 인간성에 깃든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는 간과해 버리고 있다.


3. 나오며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현재 한국 사회의 큰 이슈 두 가지가 생각났다. 하나는 루이스의 관료 사회 비판을 보면서 생각난 한미FTA이다. 필자는 한미FTA 저지 운동을 하면서, “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런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한미FTA를 추진했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분석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한데, 그 중에서 설득력 있는 한 가지는 노 전 대통령이 관료들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마피아를 빗댄 ‘모피아’로 비판받는 재경부 관료들은, 외교통상부의 통상 그룹과 정부 출연 연구소들과 합작하여 한미FTA를 추진했다. 그들은 소위 ‘회전문 인사’로 잘 대표되는 것처럼, 자신들과 경제적·권력적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소수 대기업을 위해, 한미FTA의 경제 효과를 ‘뻥튀기’하는 수치 조작을 서슴지 않으면서, 한미FTA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제공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관료들이 나라와 국민에게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는 한미FTA에 대해, 정부 간 협상 과정에서 그 내용을 국민과 국회에 알리지 않고 밀실에서 진행했다는 점, 그리고 그 방대하고 전문적인 내용을 그렇게 단기간에 졸속으로 추진했다는 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거의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크게 잘못된 한미 쇠고기 협상을 추진하고도 그것을 억지 논리로 옹호해 온 관료들의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참으로 대단한 관료들이다! 루이스가 지금 살아서 이런 한국 관료들의 행태를 본다면, 어쩌면 한국 관료들을 모티프로 삼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후속편을 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현재 한국 사회의 큰 이슈 또 하나는 한반도대운하이다. 루이스가 주인공 악마의 이름을 ‘스크루테이프’라고 지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스크루지, 손가락을 비트는 고문기구, 관료적 형식주의의 상징인 빨간 끈 등과 더불어 스크루(screw, 역자는 ‘꼬인 나사’로 번역)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할 때, 필자는 얼마 전 한반도 대운하 토론회에서 대운하 반대론자인 김정욱 교수가 찬성론자인 박석순 교수를 가리켜 ‘스크루 박’이라고 부르면서 찬성론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한 것이 생각났다. 김 교수가 박 교수를 ‘스크루 박’이라고 부른 이유는, 대다수 양식 있는 전문가들은 운하가 만들어지면 운하에 고인 물이 썩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가 어처구니없게도 운하를 지나는 배들의 스크루가 돌면서 운하의 물을 정화하기 때문에 운하는 환경 친화적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기독교인인 김 교수가 혹시라도 이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고, 그렇게 운하를 찬성하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펴는 박 교수의 별명을 스크루 박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스크루테이프와 스크루 박! 필자는 루이스가 스크루테이프의 작명 이유를 말하면서 스크루를 거명할 때, 스크루 박이 생각나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운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를 파괴할 것을 생각하면, 스크루 박과 같은 운하추진론자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악마 스크루테이프와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유익한 경험이었다. 이 책을 통해 인간에 대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그리고 필자가 해 온 기독교 사회 운동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받았다. 평화주의에 대한 지나친 비판과 전쟁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제외하면 루이스의 시각은 매우 깊이 있는 성경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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