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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10

2008-Jul

나사렛 메시아 선언과 ‘주의 은혜의 해’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23.189.20 조회 수: 4168

 

나사렛 메시아 선언과 ‘주의 은혜의 해’

- 누가복음 4장 16-30절 주해 -


박창수


1. 배경, 개요 및 목적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신다. 그러자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고,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셔서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신다.


이제 예수님은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선언하신다. 이 나사렛 메시아 선언에는 ‘주의 은혜의 해’ 전파도 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할 뿐만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을 구원한 예수님의 이야기에 대해 격분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지나서 가신다.


필자는 이 누가복음 4장 16-30절을 주해하되, 그 가운데 특히 나사렛 메시아 선언의 ‘주의 은혜의 해’에 초점을 맞추어 주해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주해를 통해, 주의 은혜의 해는 ‘안식년’과 ‘희년’을 통칭하는 것이며, 그 의미는 영적인 차원과 육적인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2. 본문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절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절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절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절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절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절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절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3. 절별 주해


16절

‘자기 규례대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던 습관대로’라는 의미이며,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자기 규례대로 가르치신 것은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14-15절)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가 된다.1)


17절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받으시자, 그 책에서 18-19절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신다. 예수님이 이처럼 이사야서 중에서 특정 본문을 ‘찾으신’ 것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18절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하시는데, 그 의미는 예수님이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이며, 성령께서 자신에게 임하신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는 데 있다. 예수님은 14절에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셨는데, 23절의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염두에 두면, 예수님은 나사렛에 오시기 전에 가버나움에서 이미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절

‘주의 은혜의 해’에서 ‘은혜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덱톤(δεκτον)으로서, 그 의미는 ‘받으실만한’(acceptable)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2) 그런데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은 가난한 자(‘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에 대한 통칭)에게 유익을 주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의 해’는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합치하기 때문에 주께서 받으실만한 해’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주의 은혜의 해’는 안식년과 희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과 같이 가난한 자에게 유익한 해는 구약 율법에서 바로 안식년과 희년이기 때문이다. 안식년의 대표적인 법은 ‘빚탕감법’이고, 희년의 대표적인 법은 ‘토지회복법’과 ‘자유회복법’인데 이 법들은 모두 가난한 자에게 유익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성들의 영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제적인 육체적 욕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셨다.”3) 주의 은혜의 해는 영적인 차원과 육적인 차원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4) 누가복음에 나타난 안식년의 ‘빚 탕감’은, 영적인 차원에서는 ‘죄의 빚 탕감’, 곧 ‘죄 사함’이고, 육적인 차원에서는 ‘꾸어준 즉시 빚 탕감’, 곧 ‘구제’와 ‘되받기를 바라지 않는 대부’와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식사(잔치) 초대’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나타난 희년의 ‘토지 회복’은, 영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예수님) 나라 기업에 대한 참여’이고, 육적인 차원에서는 ‘평균지권의 회복’, 곧 ‘지대의 환원’과 ‘지계표 초과 토지의 빈자 환원’이다. 또 누가복음에 나타난 희년의 ‘자유 회복’은, 영적인 차원에서는 ‘마귀와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자유’, 곧 ‘축귀’와 ‘치유’와 ‘부활’이고, 육적인 차원에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비천한 종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자세히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첫째, 누가복음에 나타난 안식년 ‘빚 탕감’의 영적인 차원은 ‘죄의 빚 탕감’, 곧 ‘죄 사함’이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 가운데 11장 4절을 직역하면, “우리 자신들도 우리에게 빚진 모든 자들을 탕감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이다.5) 곧 우리가 하나님께 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은 ‘죄’이고, 우리가 탕감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자들의 ‘빚’이다. 여기에서 죄 사함과 빚 탕감이 한 기도 문장에 함께 등장한다는 것은, 죄 사함과 빚 탕감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죄 사함’은 바로 ‘죄의 빚 탕감’으로서, ‘빚 탕감’의 영적인 차원인 것이다.


둘째, 누가복음에 나타난 안식년 ‘빚 탕감’의 육적인 차원은 ‘꾸어준 즉시 빚 탕감’, 곧 ‘구제’와 ‘되받기를 바라지 않는 대부’와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식사(잔치) 초대’이다. 누가복음에서 안식년 ‘빚 탕감’의 육적인 차원은 구약 율법보다 더 강화되어, ‘꾸어준 즉시 빚 탕감’으로 나타난다. ‘꾸어준 즉시 빚 탕감’은 몇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그것들은 바로 ‘구제’(11장 41절, 12장 33절)와 ‘되받기를 바라지 않는 대부’6)(6장 34-35절)와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식사(잔치) 초대’(14장 12-14절) 등이다.


셋째, 누가복음에 나타난 희년 ‘토지 회복’의 영적인 차원은 ‘하나님(예수님) 나라 기업에 대한 참여’이다. 하나님(예수님)의 나라는 누가복음에서 모두 39회 등장하는데, 그 중에는 토지와 연관되는 본문(6장 13-34절)이 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대표적으로 토지: 인용자)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2장 13절)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사람과 무리에게 각각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것과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6장 31-32절).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이 전체 문맥에서 크게 보면 토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대조된다. 곧 ‘탐심 때문에 유산(대표적으로 토지)를 구하는 사람’(13절)과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제자’(31절)가 대조된다. 또한 ‘밭(토지)의 막대한 지대를 혼자서 다 쓰려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곧 하나님의 나라를 받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주’(16-21절)와 ‘토지(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는(곧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제자’(33절)가 대조된다. 요컨대 토지에 대한 열망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으로 극복되고 또 승화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예수님) 나라 기업에 대한 참여’는 희년 ‘토지 회복’의 영적인 차원인 것이다.


넷째, 누가복음에 나타난 희년 ‘토지 회복’의 육적인 차원은 ‘평균지권의 회복’, 곧 ‘지대의 환원’과 ‘지계표 초과 토지의 빈자 환원’이다. 12장 16-21절에 나오는 부자는 밭을 갖고 있는데, 그 밭은 그 한 해의 지대(地代, 토지사용의 대가, 곧 소작료)가 장차 많은 해 동안 쓸 수 있을 만큼 막대하게 많은 땅이다. 곧 이 부자는 넓은 땅을 갖고 있고 막대한 지대를 전유(專有)하는 대지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부자는 하나님(예수님)에 의하면, “어리석은 자”(20절)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21절)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교훈은 역으로, 지주들이 지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원하고, 근본적으로 지계표 초과 토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원하라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다른 본문에서도 반복된다(12장 33절, 14장 33절, 18장 22절). 대표적으로 18장 22절을 살펴보자.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누가에게 ‘모든’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로 ‘예외 없이 모든’이라는 뜻이 아니라 ‘많은’이라는 뜻이라는 점이다(3장 16절, 4장 15절, 7장 29절).7)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관원에게 말씀하신 것은 ‘네게 있는 것을 예외 없이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게 있는 것 중에서 많이’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네게 있는 것’은, 팔아서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당시 소유 중 가장 크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토지였음을 생각한다면, 이 본문의 ‘네게 있는 것’은 바로 ‘토지’가 핵심임을 알 수 있다.8) 곧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말씀은 ‘네게 있는 토지를 많이’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팔아야 할 ‘많은 토지’란, 바로 지계표 초과 토지인 것이다. 또한 지계표 초과 토지를 팔아서 그 판 값(지가)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은, (토지경제학에서 지가는 미래 지대의 합이므로) 지계표 초과 토지의 미래 지대를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원하라는 의미이다. 요컨대 18장 22절의 가르침 역시, 지주들이 지대를 환원하고 지계표 초과 토지를 환원하라는 것이다. ‘지대의 환원’과 ‘지계표 초과 토지의 빈자 환원’은 가난한 사람들의 ‘평균지권의 회복’을 위한 것으로서, 희년 ‘토지 회복’의 육적인 차원인 것이다.


다섯째, 누가복음에 나타난 희년 ‘자유 회복’의 영적인 차원은 ‘마귀와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자유’, 곧 ‘축귀’와 ‘치유’와 ‘부활’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마귀와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사역을 하셨다. 그 사역들은 ‘축귀’(4장 31-37절을 비롯하여 다수의 본문)와 ‘치유’(4장 38-39절을 비롯하여 다수의 본문)와 ‘부활’(7장 11-17절, 8장 49-56절)이다. 예수님의 ‘축귀’와 ‘치유’와 ‘부활’ 사역은, 누가복음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역들은 모두 희년 ‘자유 회복’의 영적인 차원인 것이다.


여섯째, 누가복음에 나타난 희년 ‘자유 회복’의 육적인 차원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비천한 종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마리아의 찬가(1장 46절-55절)에서, ‘계집종의 비참한 상태’(48절)는 바로 ‘예루살렘의 포로된 상태’, 곧 ‘이스라엘이 주권을 잃은 비참한 상태’를 의미한다.9) 그리고 ‘비천한 자’(52절)는 이스라엘이고, ‘권세 있는 자’(52절)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를 의미한다.10) 마리아가 노래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비천한 종 이스라엘의 회복’은, 희년 ‘자유 회복’의 육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예수님은 정치적·군사적 메시아의 길은 명백히 거부하셨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은 ‘새 이스라엘(교회)의 탄생’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주의 은혜의 해’는 안식년과 희년을 통칭한다. 그리고 영적인 차원과 육적인 차원을 모두 포괄한다.


20절

‘앉으셨다’는 것은 선생이 취하는 자세이다.11) 예수님은 구약 성경 낭독 후에 바야흐로 가르치시려고 하시고,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들으려고 예수님을 주목한다.


21절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이루어졌느니라)”는, 예수님의 설교의 주된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이룰 그 사람이 바로 지금 그 말씀을 그들의 귀에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12)  


22절

‘은혜로운 말’은 ‘주의 은혜의 해’가 의미하는 안식년과 희년의 영적인 차원과 육적인 차원에 대한 은혜의 말씀도 포함될 것이다. 안식년과 희년의 영적인 차원과 육적인 차원에는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는 말은, 나사렛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23절

“너희가 반드시 ···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는 것은 예언적 미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말하려고 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13) 그리고 이 말씀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께 “만약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사명을 받았다면, 우리에게 그것을 입증해 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14) 마귀는 광야에서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 있다가(13절), 지금 나사렛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 이와 같은 마귀적인 생각을 넣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후에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격분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진실로 마귀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4절

‘환영을 받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덱토스(δεκτος)인데, 이것은 19절에서 ‘주의 은혜의 해’에서 ‘은혜의’, 곧 ‘받으실 만한’으로 사용된 동일한 단어이다. ‘주께서 받으실만한 해’를 전파하시는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들로부터는 받아들여지지 못하시는 것이다.15)


25-27절

예수님의 책망은,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을 떠나서 이방인에게로 갈 것이라는 의미이다.16) 이 절들에 대한 취지는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이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17)


28-30절

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아가 와서 자기들을 구원하고 이방인들을 물리쳐 줄 것이라는 유대인 중심적인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이와 정반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엘리야와 엘리사를 보내셨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나사렛 사람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신다.

* 각주는 첨부한 파일 원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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