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딸이 있는 부모들이 도시락 싸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만해도, '인신매매단'이라는 흉흉한 단어를 신문 사회면에서 가끔씩 만나곤 했습니다. 물론, 언론의 사건 보도를 통해 접하는 경우보다 동네 미용실과 교실 뒷줄에서 이뤄지는 수군거림을 통해 들을 때가 더 많았지요. '봉고차'를 타고 다니는 인신매매단이 젊은 여성을 납치해서 윤락 행위를 시키거나, 남성을 납치해서 새우잡이 어선에 팔아넘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신매매단'과 '새우잡이 어선'을 기억하시나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에서 팔이 부서지도록 그물을 당기는 상상과 함께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길 가는 사람을 납치해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단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성매매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새우잡이 어선'이 상징하는 '3D 업종'(Difficult, Dangerous, Dirty·어렵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처지 역시 여전합니다.
다만, 봉고차로 사람을 납치할 필요가 줄어들었을 따름입니다.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 가운데 상당수는 도저히 갚을 길 없는 빚과 생활고 때문에 스스로 찾아온 경우라고 합니다. 심지어 자녀의 사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매매에 발을 들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꺼리는 3D 업종에는 동남아시아 등에서 온 노동자들이 몰려 있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한국에서 이들이 받는 열악한 대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문 사회면에서 인신매매단 기사를 찾기 어려워진 배경입니다. 골목길에서 마주친 봉고차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소름 돋는 현실입니다.
여전히 헐값에 사고팔리는 사람들
물론, 인신매매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사고 팔리는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중국에는 탈북자를 상대로 한 인신매매 조직이 활개 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이들과 연계된 조직이 있다고 합니다.
또 골목길에 주차한 '봉고차' 앞에서 괜히 움찔하게 했던 인신매매단 역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부산 해양 경찰서는 올해 3월 장애인과 범죄 수배자들을 염전이나 새우잡이 어선 등에 팔아넘긴 인신매매단을 잡아들였습니다. 해경에 체포된 인신매매단은 2006년부터 대구, 부산, 마산 등에서 생활정보지 등에 월 200만~400만 원의 수입을 보장한다는 허위광고를 낸 뒤 이를 보고 찾아온 이들을 선원으로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팔려간 이들은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장애인과 범죄수배자들이 주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해경이 파악한 피해자는 112명입니다. 그리고 인신매매단이 챙긴 돈은 1억 4000만 원 입니다. 한 명당 125만 원씩 받은 셈입니다.
이 사실을 접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씨가 사위에게 1200만 원 가량의 에르메스 핸드백을 선물 받았다는 보도를 접한 뒤였습니다. 핸드백 하나가 사람 열 명을 판 가격과 비슷한 셈입니다. '사람값이 참 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 14시간 일하고, 2만원쯤 버는 75세 노인
물론, 끔찍한 범죄 사례를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범죄가 아닌 일상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려도 여전히 사람값은 형편없습니다.
지난 18일, 75세 고물 수집상 최두석 씨가 14시간 동안 일하고 번 돈이 2만 2000원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 씨는 한 달에 60만~70만 원쯤 법니다. 13평 임대아파트에서 부인과 딸·손자와 함께 사는 최 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3년 전부터 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최 씨는 아파트 관리비 월 2만 5000원을 내지 못해 임대아파트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22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칠순 노인이 하루 14시간 일한 대가가 고작 2만 원 조금 넘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주워 담는 노인들의 모습이 기사 위로 겹칩니다. 이들이 큰 쌀자루에 무가지를 가득 채우면, 1만 원~1만 8000원쯤 받는다고 합니다. 최근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가격이 올라갔지만, 경쟁도 더 치열해졌습니다. 조직적으로 무가지를 싹쓸이하는 업자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범한 노인들은 자루 하나를 채우는 게 쉽지 않습니다. 무가지를 주워 담는 노인들의 형편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최근 지하철에서 만난 한 노인은 새벽 5시부터 5시간을 꼬박 일하고, 2000~4000원 정도 번다고 했습니다. 한 달에 25일 일하는 것으로 계산하면, 한 달에 5만~10만 원쯤 버는 셈입니다. 여기에 다른 부업을 통한 소득을 보탠다 해도, 월 소득이 80만 원을 넘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노동과 가사, 육아에 평생 시달린 노인들이 하루 종일 혹독하게 일해도 법에 보장된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대형 할인점에서 종일 인사만 하는 '88만원 세대'
그럼, 젊은이들의 사정은 다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88만원 세대'라는 표현이 익숙해진 지 오래입니다.
대도시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새로 문을 연 노래방이나 술집 앞에서 뙤약볕을 맞으며 춤을 추는 젊은 여성들을 흔히 보게 됩니다. 또 대형 할인점에서는 입구에 서서 하루 종일 인사만 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얼마를 받는지도 궁금하지만,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가 더 답답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일도 아니고, 스스로 즐기는 일도 아닙니다. 보람과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을 도무지 찾기 힘든 일을 굳이 하고 있습니다. '존엄 노동'과는 한참 거리가 멉니다.
이런 일을 왜 시킬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차피 큰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값'이 워낙 싸기 때문이지요.
한때 유행하던 고구려 사극을 보면, 권력자가 말에 오르기 전에 말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등을 디디고 권력자가 말에 오르는 것이지요. 사람의 가치가 기껏해야 디딤대 정도 취급당하던 시절이 담긴 장면입니다. 젊은이들이 종일 로보트처럼 인사만 하도록 시키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 시절보다 얼마나 나아진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허드렛일을 약자에게 몰아주지 않는 사회
이런 답답함에 젖어 있을 무렵, 핀란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호텔에서 자기 옷을 다리미로 직접 다려 입더라는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얼핏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허드렛일을 사회적 약자에게 몰아주지 않는 문화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보람과 가치를 느끼기 힘든 일을 함부로 남에게 시키지 않는 사회는, 결국 '사람값'이 비싸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이 흘리는 땀의 대가를 허투루 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은 인건비가 무척 비쌉니다. 또 생산직과 육체노동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강력합니다. 핀란드에서는 도로에 아스팔트를 까는 일이 상당한 고소득 직종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물론, 그래서 치르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똑같은 제품이나 서비스가, 사람의 손을 더 많이 거쳤다는 이유로 더 비싼 가격을 받는 일이 흔합니다.
이를테면, 핀란드와 스웨덴을 오가는 배편을 인터넷으로 예약한 경우와 안내원을 통해 예약한 경우가 비용이 다릅니다. 안내원을 통해 예약한 경우가 더 비싸지요. 얼핏 불합리해보이지만, 북유럽 사람들은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수고를 했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니까요. 이런 까닭에 북유럽 사회는 '살인적인 물가'로도 유명합니다.
"잉크 떨어지면 버리는 볼펜심처럼…"
이런 비용에도 불구하고, '사람값을 허투루 쳐주지 않는 사회'는 여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지난 8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북유럽 국가들을 돌아다닌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지난해와 올해, 지켜봤던 몇 가지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는 용접봉에서 불꽃이 튀는 장면입니다. 그늘 속에서도 땀이 배는 한여름입니다만, 피부에는 오히려 소름이 돋습니다. 지난해 여름, 이랜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여 있던 농성장 풍경입니다. 당시 회사 측은 농성장으로 향하는 통로의 방화벽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쇠파이프를 대고, 용접했습니다. 150명의 노동자들이 있는 농성장은 거대한 감옥이 됐습니다. 폐쇄 공포증이 있는 몇몇은 종일 몸을 떨었고, 화장실에서 받아온 물로 목을 축이는 다른 노동자들은 찜통과 같은 열기 속에서 파김치처럼 시들어 버렸습니다.
농성하던 노동자들이 대단한 요구를 한 게 아니었습니다. 한 달에 80~100만 원 버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입니다. 비정규직으로 일한 지 2년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일터를 떠나야하는 상황에 맞섰을 따름입니다. 자연스런 요구입니다. 그들은 사람이고, 잉크가 떨어지면 내다버리는 볼펜심과는 다르니까요.
웨이터 출신 국회의원과 택시 기사 허세욱
다른 장면은 밑줄이 빼곡한 신문 조각과 종이 출력물들입니다. 지난해 4월 한미 FTA를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한 고(故) 허세욱 씨가 남긴 유품입니다. 중학교를 중퇴한 뒤, 서울에 올라와 온갖 허드렛일을 전전했던 허 씨는 봉천동 철거촌에서 여성 활동가를 두들겨 패던 철거 용역을 보고 두려워 몸을 피한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느꼈던 부끄러움이 그를 늦깎이 사회 활동가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120만 원에 조금 못 미치는 월급을 받는 택시 운전사로 살아가면서, 여러 사회단체에 꼬박꼬박 회비를 내고 각종 행사에 빠짐없이 참가하던 그는 노무현대통령이 한미FTA 체결을 추진하다는 보도를 접하고, 관련 자료를 꼼꼼하게 읽기 시작합니다. 밑줄로 채워진 그의 유품은 이런 노력의 흔적이지요.
이런 노력의 결과, 그가 느낀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한미FTA 체결 추진은 우리 사회가 덴마크나 스웨덴, 네덜란드, 스위스 등 다른 사회 경제 모델을 참고할 가능성을 접고 '미국식 모델'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다는 방증이었고, 우리보다 앞서 비슷한 결정을 내린 멕시코 등의 사례는 극심한 양극화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 훼손이라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민주화 세력을 자임한 정부가 이런 식의 방향 수정을 민주적 의견 수렴 없이 진행했다는데 절망한 그가 끝내 막다른 선택을 한 것이지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당했을 당시, 민주노동당 동료 당원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섰던 그가 느꼈을 절망감을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한미FTA 관련 자료에 빽빽이 채워진 그의 밑줄 자국과 메모를 보면서, '가방끈'과 '사람값'이라는 낱말을 동시에 떠올렸습니다. 그토록 진지하게 공부했던 허 씨의 죽음이 사회 주류의 냉소적 무관심에 묻혔던 이유가 '짧은 가방끈'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정규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이들은 정치, 사회, 경제 영역의 공론장에 참여하기 힘든 사회. 아무리 진지한 생각을 담아 발언해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 가방끈이 짧으면, 사람값도 떨어지는 사회인 셈입니다.
스웨덴에서 만난 음식점 종업원(웨이터) 출신 국회의원이 당의 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보며 몹시 부러웠던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그 의원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사회과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뤄진 배움에 대해 사회가 가치를 인정해 줬던 것입니다.
다리미질 하는 대통령과 코스콤 비정규직
또 다른 장면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에 연결된 랜선(Lan Cable)입니다. 정규직과 별 차이 없는 일을 하다, 갑작스레 거리로 내몰린 코스콤 비정규직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단지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들은 함께 일하고 수다 떨며 밥 먹었던 정규직 동료들에게서 혹독한 따돌림을 겪었습니다.
정규직들은 비정규직을 향해 "억울하면, 시험 쳐서 들어올 것이지….", "랜선이나 깔던 것들이 무슨…" 등과 같은 말을 내뱉곤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을 쳐서 합격했더라도, 남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면 비슷한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합니다. 코스콤 정규직들이 쏟아낸 말은 모든 사람이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기보다, 시험 점수에 따라 서열 지워진 문화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이런 문화에선 모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1등은 언제 1등에서 밀려날지 몰라서 불안합니다. 또 2등 이하는 1등이 아니라서 불행합니다. 꼴찌가 비참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등수'를 따지지 않는 북유럽 국가들의 교육 제도를 보며, 부러웠던 이유입니다.
"랜선이나 깔던 것들…"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은 허드렛일에 대한 강한 경멸감입니다. 코스콤에서는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했으므로, 비정규직을 가리켜 "랜선이나 깔던"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우선 사실과 다릅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접어놓고 따져 봐도, 랜선을 까는 일이 왜 경멸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귀찮고 번거로워 하는 일은 모든 이가 조금씩 나눠 맡는 게 바람직한 일입니다. 청소나 빨래, 설겆이 등을 부부가 나눠 해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게 여의치 않아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감사해 하는 게 마땅합니다. 경제적으로도 더 많은 보상을 하는 게 옳습니다.
직접 옷을 다리는 핀란드 대통령이 인상적이었던 이유입니다. 또 단순 노무직이 고소득 직업으로 분류되는 북유럽 사회에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임금 격차 없애니까, 효율도 높아졌다"…연대임금제의 성공
북유럽 역시 처음부터 '사람값 제대로 쳐주는 사회'였던 것은 아닙니다. 불과 백년 전만해도, 스웨덴 노동자들은 교회에서 앞줄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귀족과 부유층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했으니까요.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빈민들은 나라 밖에서 살 길을 찾았습니다. 185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약 100만 명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북유럽 다른 나라들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랬던 사회가 '큰 차별 없이 두루 잘 사는 사회'로 거듭 난 것은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SAP, Sveriges Socialdemokratiska Arbetareparti. 스웨덴 사민당)과 스웨덴 노총(LO, Landsorganisationen)의 공이 큽니다. 특히 스웨덴 노총(LO) 소속 경제학자였던 괴스타 렌과 루돌프 마이드너가 내놓은 '연대임금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같은 일을 한다면, 어느 직장에 다니건 같은 임금을 받는 제도입니다. 이런 제도가 실시되면,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급여는 정규직의 20~25% 수준에 불과한 코스콤 비정규직과 같은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격차도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수익성이 낮은 기업은 경영 압박을 느낍니다. 높은 인건비 부담 때문에, 기업 경영자들은 다른 비용을 아끼고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려 애쓰게 됩니다. 신제품 개발과 경영 혁신으로 내모는 유인이 생기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과정에 제대로 적응 못한 기업들이 대거 문을 닫았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실업자들을 보살피는 게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입니다. 이들이 받던 임금을 사회가 보전해주면서, 직업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실업자들은 수익성이 높은 산업에 종사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 비용은 정부가 부담합니다. 이 과정에서 효율이 낮은 기업은 도태되고, 노동자들은 수익성이 높은 지식과 기술을 습득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떠나는 이민 행렬이 항구를 메웠던 스웨덴이 20세기 중반을 지나며 풍요로운 나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비결로 '연대임금제'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성공을 꼽습니다.
기업가를 '손쉬운 선택'에 내몰지 않으려면
'사람값'을 제대로 쳐줘서, 불필요한 일에 노동력이 낭비되지 않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대형 할인점에서 종일 인사만 하는 일 따위로 젊은이들을 소모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안정적인 평생교육을 통해 노동력의 가치를 고도화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북유럽 사회에서는 30~40대 대학 신입생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교육비를 국가가 부담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제한 조건이 없다면, 기업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연구개발과 경영 혁신을 도모하기보다 인건비를 줄이고 협력업체를 쥐어짜서 효율을 높이려들기 쉽습니다. 아무래도 쉽고 안전한 방법이니까요. 대신, 이렇게 떠넘겨진 비용을 짊어진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기업이 오래 생존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사람을 쥐어짜는 데는 결국 한계가 있으니까요.
북유럽 모델의 한계
물론,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에서 '연대임금제'가 늘 제대로 작동했던 것은 아닙니다. 전체 노동자의 대표와 전체 사용자의 대표가 진행하는 '중앙교섭제'가 연대임금제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를 지나며, '중앙교섭제'가 사실상 허물어졌습니다. 결국, 노동자들의 세전(稅前) 소득 격차는 다시 벌어졌습니다.
또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면서, 강력한 노동조합에 바탕을 둔 북유럽 모델은 거대한 도전에 부딪힌 것도 사실입니다. 공장을 외국으로 옮기겠다는 대기업의 협박에 스웨덴 사민당이 굴복한 사례는 이제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연대임금제'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도 있습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정책은 수익성이 낮은 기업에게는 부담이지만, 수익성이 높은 기업에는 큰 혜택입니다. 이런 정책이 시행되지 않을 경우 지급할 임금보다 더 적은 임금을 지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국가와 사회가 강력한 복지를 제공하는 까닭에, 사원 복지를 위해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기업, 생산성이 높은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들이 이런 식으로 '초과 이윤'을 거뒀고, 이들은 재벌로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재벌이 경제와 사회에 꼭 좋은 영향만 끼치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회·경제적 자산이 집중돼 있는 재벌을 어떻게 규제해야 하는지는 이들 나라나 한국 모두에게 숙제입니다.
에너지·자원 낭비하는 미국식 모델의 한계
하지만, 이런 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모델은 여전히 주목할만합니다. 최근 불거진 금융 위기에서 드러나듯, 미국 중심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 한국의 진로를 미국식 모델로 설정하면서, 한미FTA에 목을 매다시피 했던 한국 정부의 선택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이런 상황은 <엔트로피>, <육식의 종말> 등으로 널리 알려진 제레미 리프킨의 저서 <유러피언 드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북유럽에서 만난 한 외교관도 이 책을 언급하더군요.
개인 사이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미국식 모델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공성을 강조하는 유럽식 모델은 흔히 낡은 것으로 취급돼 왔습니다. 하지만 제레미 리프킨은 '삶의 질'을 중시하는 '유러피언 드림'이 눈 앞의 성취에만 몰두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곧 앞서리라고 전망합니다.
굳이 리프킨의 전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에너지와 자원을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는 미국식 모델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지구에 있는 에너지와 자원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실제로 원자재 가격과 유가는 지속적으로 올라가는 추세입니다. 다만, 미국식 모델이 언제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힐지를 알기 힘들 따름입니다.
물론, 강력한 군사적 패권을 갖고 있는 미국은 '힘'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패권과 거리가 먼 한국이 미국식 모델을 마냥 따라가는 것은 위험해 보입니다.
"에너지와 자원은 덜 쓰면서, 문화와 지식은 더 쓰는 경제"
에너지와 자원을 덜 쓰면서, '삶의 질'을 높이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침, 경제학자 우석훈은 최근 간행된 책 <괴물의 탄생>에서 "에너지와 자원은 덜 쓰면서, 문화와 지식은 더 쓰는 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자연을 덜 파괴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지식과 감수성을 최대한 계발하여 활용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교육이 바뀌어야 합니다. 단순 암기 경쟁에서 벗어나 사고력과 감수성을 자유롭게 키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험 위주의 평가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던 학생이 의외로 뛰어나고 섬세한 사고력과 감수성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시험 점수에 따라 학생을 줄 세우는 교육 방식은 "문화와 지식을 더 쓰는 경제"에 몹시 해롭습니다.
아울러 사람들의 창의성을 최대한 끌어내려면, 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복지 안전망이 필수적입니다. 미래가 불안한 상태에서 창의적 혁신을 도모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다들 안정만 쫓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경쟁을 완화하고 불필요한 권위를 허무는 게 필수적입니다. 경쟁은 시험 합격을 위한 지식 습득에만 유용할 따름입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권위가 엄격한 공간에서 창의적인 지식이 싹트고, 문화적 감수성이 피어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수평적인 관계에서 서로 협동할 때, 창의적 아이디어가 더 많이 쏟아진다는 게 오히려 상식입니다.
한 시간강사의 죽음…월 소득 40만원대 지식인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문화와 지식을 더 쓰는 경제"와 거리가 멉니다. 역시 '사람값'과 관계가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한국에서 활동하는 시간강사는 7만 2419명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주당 9시간 근무할 경우 연봉은 999만 원입니다. 이들의 임금 수준은 전임교원의 4분의 1이 채 안됩니다. 하지만 시간강사의 평균 강의시간은 주당 4.2시간입니다. 따라서 평균 연봉은 487만 5000원입니다. 시간강사들은 실제로 한달에 42만 6350원 번다는 뜻입니다. 사교육 등 다른 부업을 하지 않고서는 경제적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전체 대학 강의의 절반 가까이를 담당하고 있는 시간강사들은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일합니다. 다음 학기 강의를 맡을 수 있는지에 대해 늘 불안해 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4대 보험조차 보장돼 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단순 작업이나 육체노동을 하는 경우만 사람값이 너무 싼 게 아니었던 셈입니다. 지식 생산을 담당하는 경우 역시 '사람값'이 너무 쌉니다. 이래서는 "문화와 지식을 더 쓰는 경제"에 다가갈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올해 2월 한 시간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국내 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오래 일했던 한 모 씨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극도의 궁핍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한 모텔에서 자살할 당시, 그는 한국으로 돌아올 비행기 삯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또 정규직 전임교원들이 비정규직 시간강사인 그에게 취했던 권위적이고 모멸적인 태도 역시 죽음의 한 원인으로 꼽혔습니다. 한 씨가 남긴 유서에는 교수 사회의 비리와 파벌주의가 잘 담겨 있습니다.
자유로운 지성들의 공동체가 돼야 할 대학이 오히려, 앞장서서 '사람값'을 깎아내리고 있는 셈입니다. 수직적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선 지식인들 역시 제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자살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해야 하나
'사람값을 제대로 쳐주는 사회'로 거듭나는 게 절실합니다. 대체로 미국보다는 유럽이 이런 사회에 가깝습니다. 과거와 많이 달라졌지만,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북유럽 국가들이 그나마 이런 사회에 더 가깝습니다. 석유 등 화석연료에 덜 의존하면서, 재생가능 에너지를 활용하기 위한 노력에 가장 적극적인 사회 역시 아직까지는 북유럽 사회입니다. 생태주의자들의 활동 역시 가장 두드러집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진로를 모색하는데 유용한 힌트가 그나마 많이 담겨 있는 곳은 북유럽 사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에서는 직업의 귀천을 따지는 문화가 거의 없습니다. 권위와 서열이 느슨한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문화입니다. 노르웨이에서 만난 젊은 보수당 국회의원은 의원실 전화를 직접 받고, 일정 관리와 자료 정리도 직접 한다고 했습니다.
코스콤 비정규직에게 쏟아졌던 "랜선이나 깔던" 따위의 말은 이런 문화 속에서 듣기 어렵습니다. 올해 2월 안타깝게 목숨을 끊은 시간강사 한 씨 역시 이런 문화 속에서라면, 학자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등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치·사회적 발언에서 소외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라면, 고(故) 허세욱 씨의 삶도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직장에서 쫒겨난 사람이,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는 까닭에, 경영자들이 함부로 직원을 내쫒지 못합니다. 복지 안정망이 탄탄한 까닭에, 실업자는 직장에 다니던 시절과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리며,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랜드 비정규직이 겪고 있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키워드…'협동'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들 사회와 한국과의 차이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사람값 제대로 쳐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일까."
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들 사회가 한국에 비해 조금 두드러진 특징들을 가로지르는 키워드 몇 개가 떠올랐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마련한 게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기획입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협동' 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경쟁'에 내모는 한국과 달리, 이들 사회에서는 "경쟁은 아이들에게 해롭다"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경쟁을 자제하면서, 협동을 장려하는 게 교육의 주요 목표라는 뜻입니다.
오는 10월 1일 게재될 "키워드로 읽는 북유럽" 기획 첫 번째 기사는 '협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