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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16

2008-May

희년의 사람들-도산(島山)에 담은 뜻: 안창호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23.189.10 조회 수: 5086

 

희년의 사람들-박창수 성서한국 경제분과 전문위원

 

도산(島山)에 담은 뜻 - 안창호

안창호 선생(1878~1938)이 그 호를 도산(島山)이라고 지은 것은 1902년,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미국으로 가던 뱃길에서였다. 드넓은 태평양에서 가도 가도 기다리는 육지는 나오지 않았고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지쳐갔다. 열흘 넘게 지난 어느 날 먼 곳에서 구름 사이로 산봉우리가 보였다. 하와이였다. “산이다! 육지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안창호 선생은 이 때, 망망대해에서 육지를 간절히 기다리며 지쳐가던 배의 승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도산(島山), 곧 섬의 산봉우리처럼, 망해가는 나라와 도탄에 빠진 동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하면서, 자신의 호를 도산으로 지었다.


도산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인 의사 집에서 하우스보이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공부하면서 학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길거리에서 동포들이 상투를 잡고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도산은 큰 충격을 받고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싸움은 인삼판매를 위한 구역다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미국인은 조선인에 대해 ‘조선인은 더럽고 싸움질을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산은 쓰러져 가는 조선을 살리기 위해서는 미국에 사는 동포들을 교육하고 동포들의 생계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며 미국인이 조선인에 대해 갖고 있는 나쁜 인상을 불식시키는 동포사업이 자신의 학업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동포사업과 학업을 동시에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도산은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려서 학업을 미루고 동포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도산은 낮에는 노동을 하면서 틈틈이 동포들의 집을 방문하여 집 앞을 쓸고 꽃을 심고 침을 뱉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당시 동포들의 일자리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일자리를 주선하는 사업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또 한인 교회를 개척하여 주일마다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도산의 헌신적 노력으로 미국인은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고, 동포들도 도산을 존경하고 신뢰하게 되었다. 훗날 미국 동포 사회는 땀 흘려 힘겹게 모은 돈을 조국 광복을 위해 지원하는 등 조국 독립 운동의 든든한 기지가 되었다.


1907년, 도산은 조선으로 귀국하여 신민회의 창립을 주도했다. 신민회 신입회원의 맹세에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국권회복을 위해 모두 바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산은 각 지역의 뜻있는 부자들을 설득하여 학교와 회사를 설립하게 하였다. 남강 이승훈은 도산의 호소에 큰 감명을 받고 오산학교와 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안태국은 서울과 평양과 대구 등에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문명개화 서적을 보급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도산은 부호들과 일반서민의 기부금으로 1908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다. 대성학교에서는 매일 아침 조회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등 애국정신을 고취하였다.


안중근 의거 직후 일제의 탄압이 혹심해지자, 1910년, 도산은 해외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다. 몽금포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면서 도산은 산에 올라 2시간 동안 하나님께 이 나라와 동포들에게 광명의 새 날을 누리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도산이 배 안에서 지은 <거국가>는 <대한매일신보> 등에 실려 독립지사들의 가슴을 울리며 애송되었는데, 그 중 도산의 애국정신과 일평생을 잘 보여주는 가사 한 소절이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 지금 너를 작별한 후 태평양과 대서양을 / 건널 때도 있을지며, 시베리아 만주들에 / 다닐 때도 있을지니 나의 몸은 부평같이 / 어느 곳에 가 있든지, 너를 생각할 터이니 / 너도 나를 생각하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도산은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하이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병환으로 1935년에 가출옥되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일제로부터 전향서 작성 요구를 받았으나 도산은 거부했다. 옥사를 우려한 일제에 의해 도산은 병보석으로 풀려나 입원하였지만 1938년, 결국 숨을 거두었다. 도산은 나라와 동포를 위해 학업의 좋은 기회도 포기했고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모두 바쳐, 온 힘을 다해 자신의 호인 도산(島山)에 담은 큰 뜻에 맞게 살았다. 도산은 자기를 희생하여 이웃을 살리는 희년(禧年)의 정신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우리 시대, 도산과 같은 희년의 사람들이 너무나 필요하다.

출처: <플러스인생>(전 <신앙계>) 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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