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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25

2008-May

희년의 사람들-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23.189.10 조회 수: 2631

 

희년의 사람들-박창수 성서한국 경제분과 전문위원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고당(古堂) 조만식(1883~?). 그는 한국 기독교가 낳은 위대한 인물이다. 고당은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여 거국적인 “물산장려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그는 비폭력 비타협 독립 운동 노선을 견지하고 항상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검소하고 실천적인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조선의 간디’로 추앙받았다. 또 고당은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애국 청년들을 배출했고, 일제하 민족 독립 운동의 단일 대표체였던 신간회의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으로서 당시 해외 독립 운동보다 더 힘들었던 국내 독립 운동을 이끈 교육가이자 독립 운동가였다. 그리고 고당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시무한 산정현 교회의 장로로서, 한국 교회를 섬긴 신앙인이었다.


해방 직후 고당은 이북의 정치 중심지인 평양에서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는데, 함석헌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후 이북엔 정치적 인물은 조만식 단 하나”(<사상계> 1956년 6월호)였다. 당시 이북에서 고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알고 있던 소련 군정은 고당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직을 제안하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신탁통치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당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고당은 자신이 대통령 되는 것보다 나라의 진정한 독립을 우선시한 큰 정치인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당시에 신탁통치안이 우리 민족의 자치를 배제하지 않았고 또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일단 신탁통치를 받아들인 후에 통일국가를 세우고 분단을 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타당하다. 그러나 일제하 36년의 가혹한 식민 지배를 받다가 해방을 맞은 민족이 다시 열강에게 한시라도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고당과 같은 순수 민족주의자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당은 자신이 신탁통치를 계속 반대할 때 소련 군정으로부터 어떤 해를 당하게 될지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당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고려호텔에 연금되고 말았다. 그가 숨을 거둔 때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한국전쟁 기간인 1950년, 인민군이 평양에서 퇴각할 때 살해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당은 농업을 중시하여 청년들에게 농촌으로 가라고 역설했고, 동시에 상공업 증진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민족 산업을 중시하였다. 1932년 1월 <신동아>에 실린 설문 “세계 개조 사안” 중 불경기 타개책에 대한 “경제제도 개혁안”에 대한 고당의 답변은 놀라운 통찰을 보여 준다. “우선 세계적 불경기 타개책으로는 국제간 개인 간을 물론하고 일체의 공사채를 절대로 해방하겠고 일부 국가에 편재한 금을 약소국가에게 최저 이부로 대부하도록 명할 터입니다.”


고당의 기독교 민족주의는 국가 간 개인 간 빈부 격차 문제를 비판적으로 통찰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특히 고당의 ‘공사 채무 탕감’(공사채 해방) 제안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계 빈곤 국가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나라가 진 막대한 채무를 탕감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전 세계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약소국가에 대한 최저 이자 대부’ 제안도 오늘날 빈곤의 세계화 현실에서 매우 시급하고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한편 고당은 “재산가들은 현하 우리의 처지가 어떠한 형편에 있는가를 깨달아 고리대금에나 눈이 어두워 덤비지 말고 제 산업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조선일보> 1925년 1월 26일자)라고 역설한 바 있었다.


이상과 같은 고리대 반대와 최저 이자 대부, 그리고 채무 탕감은 모두 구약 성경의 희년의 경제법에 포함된다. 곧 고당은 개인적, 국내적, 국제적 차원에서 희년 경제관을 피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쳤고, 민족독립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제안 받은 대통령 자리도 거부하고 끝내 그 생명을 내 놓은 고당. 희년 경제관만큼이나 그의 생애도 희년 정신을 실천한 삶이었다. 고당은 희년의 사람이었다.

 

출처: <플러스인생>(전 <신앙계>) 200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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