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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08

2008-Dec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서평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79.33.203 조회 수: 3099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서평


박창수


* 각주는 파일 참조

1. 들어가는 글


필자는 최근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그 중요한 배경에는 공화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해 온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을 깨우치고 설득해 온 짐 월리스와 같은 개혁적 복음주의자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주장이 매우 인상 깊었다.1) 이 개혁적 복음주의자들이 공화당 지지로 결집되어 있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권에 미약하지만 의미 있는 균열을 만들어 오바마 당선에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원제: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 마크 A. 놀 지음, 이승학 옮김, 엠마오, 1996년)의 저자인 마크 A. 놀(Mark A. Noll) 역시, 월리스와 마찬가지로 복음주의자들에게 지성을 사용하여 생각할 것을 촉구하였다는 점에서, 오바마 당선으로 상징되는 미국 사회의 긍정적 변화에 기여하였으리라 판단된다.


그럼 한국 복음주의는 어떤가? 미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온 한국 복음주의의 현실은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수는 근본주의적이고 소수만이 개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함석헌이 자신의 책 제목처럼 역설했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주장이 놀의 이 책과 오버랩되면서 현재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해 외치는 예언자적 통찰로 가슴에 다가온다. 필자는 미국에서처럼 한국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사용하여 생각하는 것을 멈출 때, 사회와 세계에서 반기독교적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놀의 이 책을 한국 복음주의자들이 필독해야 할 중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 책은 1995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한국에서는 1996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지금부터 10년도 훨씬 더 지난 책이지만, 현재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를 성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고 판단된다.


2. 개요


저자인 놀은 머리말에서, 이 책을 ‘상처 입은 연인이 보내는 편지’라고 표현한다. 놀은 먼저 자신이 “복음주의적인 개신교신자들의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함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이어서 자신이 지성적인 생활에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성적인 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복음주의자들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20여 년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적어도 미국 내에서 복음주의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이 완전 무결하게 공존한다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편지가 복음주의 운동을 포기하겠다는 절교 선언이 아니라, ‘여전히 복음주의적인 범주 내에서 기독교 신앙을 신봉하고 있는 한 사람의 지성적인 삶을 위한 허심탄회한 토로’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대강의 개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부 ‘지성적 스캔들’은 현대의 지성적 스캔들을 다루면서 왜 지성적 스캔들이 문제가 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제2부 ‘지성적 스캔들의 형성 과정’은 먼저 복음주의 지성의 형성을 부흥 운동, 교회와 국가의 분리, 기독교와 문화의 종합이라는 측면에서 다루면서 중요한 복음주의 지성인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소개하고 있고, 이어서 복음주의적 계몽주의를 자세히 설명한 다음, 근본주의의 지성적 재난을 강조하고 있다. 제3부 ‘지성적 스캔들의 의미’는 크게 정치사상과 과학사상으로 나누어, 정치사상에서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으로 대표되는 19세기 복음주의 정치사상을 다루고 있고, 과학사상에서는 19세기의 유산과 근본주의의 영향력을 다루고 있다. 제4부 ‘희망?’은 복음주의 지성의 르네상스는 진행 중인가를 질문하면서 이에 대해 정치사상, 과학, 철학 분야를 나누어 고찰한 다음, 복음주의와 지성의 생명력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록에는 복음주의의 3인의 석학이 밝히는 복음주의의 전망과 과제를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의미에 대해 놀은 이 책의 시작과 마지막 부분에서 두 번 언급하면서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먼저 시작 부분에서 놀에 의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20세기 복음주의의 지성활용의 실패를 의미한다. 곧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2)이란 “물리적 세계의 본질과 활동, 정부와 같은 인간 사회 구조와 경제계의 특성, 과거의 의미, 예술 창조의 본질, 바깥 세계의 지각(知覺)에 개입하는 제반 상황들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처럼 사고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18쪽)가 중요한 문제로 달려있는 ‘복음주의적 지성생활’의 영역에서, 20세기 복음주의가 그리스도를 위해 지성을 활용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지성적인 삶에 대한 복음주의의 무관심은 몇 가지 이유에서 기이함을 자아낸다. 현대 복음주의가 갖는 분명한 신념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붙잡아 왔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자연의 주재자요, 인간 제도(가정, 일, 정부)의 유지자이며, 조화와 창의성과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성경 속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 성경 신봉자들이 자연과 인간, 사회 및 예술에 대한 건전한 분석을 게을리해 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상황도 기이함을 나타낸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지성에 대해 현저할 만큼 정밀하고 창의적이며 풍부한 관심을 기울인 지도자들과 여러 운동의 영적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초기 개신교 전통(루터파, 개혁파, 영국 국교회)은 엄격한 지성적 삶을 발전시켰거나 시종일관 기독교적인 지성적 노력을 지속케 하는 신학적 원리들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14-15쪽)


청교도들과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18세기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들, 그리고 찰스 핫지를 비롯한 19세기 미국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근면하고 엄격한 정신 활동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지성을 포기한 그 후의 미국 복음주의자들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선조들과는 달리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 아래서 포괄적인 사고를 추구하지 않으며, 기독교적 관점에서 전영역에 걸쳐 형성된 지성을 추구하지 않는다.”(15쪽)


그래서 헨리 블레마이어가 영국의 신학적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묘사한 입장이 바로 미국 복음의자들에게 더 적합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세속적인 지성과는 달리 사회적, 정치적, 혹은 문화적 생활에 밀접하고도 현저한 영향을 미치는 생명력 있는 기독교적 지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세계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엄격하게 개인적인 행위만을 주로 다루는 매우 협소한 사고의 영역 이외에도, 세속적 지성에 의하여 구성된 준거틀과 세속적 가치 평가를 반영하는 판단의 틀을 수용하여 지성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은 기독교적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15-16쪽).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놀에 의하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여기서는 스캔들을 ‘거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이란, 복음주의가 지성적인 측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같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거치는 것’(스캔들, skandalon)(고전1:23)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곧 복음주의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두드러져 나타나는 기독교의 한 형태’인데, 사도 바울에 의하면, 십자가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스캔들이 된다는 분명한 종교적 의미에서, 복음주의는 지성적인 스캔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3. 평가


이 책의 저자인 놀의 예리한 통찰들은 곳곳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평에서는 그 통찰들 가운데 세 가지만 언급하고 나서, 작은 실수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 번째 예리한 통찰은, 부흥 운동과 국교 분리(국가와 교회의 분리)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배경 하에, ‘실용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원리에 대한 관심을 압도’(103쪽)하게 된 정황을 기술하는 부분이다.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결과-새로운 지지자-였고, 그렇지 못할 경우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지지자의 등장이 다른 모든 요소들보다 우선적이어야 했다.


부흥 운동과 국교 분리의 결과는 신자들로 하여금 또한 실용적 변증, 기능적 신학으로 기울게 했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하곤 했다. 가장 쉽게 교회를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무엇인가?


지성과 관련해서 결과적으로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던 상황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의 원리가 삶의 모든 부분을 밝혀 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혁명과 남북전쟁 사이의 세월 동안 진리의 문제를 실용성의 문제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어떤 메시지가 가장 효과적인가?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을 회심시켜 교회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결과에 대한 중압감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연, 하나님과 사회, 하나님과 아름다움, 혹은 하나님과 인간 지성의 형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나 에너지가 거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103쪽).


놀은 이처럼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스며들어 있는 실용주의와 결과주의라는 폐단이 어떻게 복음주의 지성을 목 졸랐는지를 예리하게 분석하였다. 실용주의와 결과주의는 한마디로 교회 성장주의라고 이해된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지성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필요조건은, (비록 놀이 명시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지만, 놀의 통찰을 뒤집어 생각하면) 바로 교회 성장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놀의 이와 같은 통찰은 오늘날 한국 복음주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 복음주의 지성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길은 우선 교회 성장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예리한 통찰은, 19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미국에 존재하면서 큰 해악을 끼쳐 온 ‘신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이상한 동거’에 대해, 놀은 그 근본적 이유에 대한 단초를 알려주는 부분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가로 유명한 데이비드 하비는 그의 책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에서 ‘신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이상한 동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대체로 이 시기에 공화당원들은 기독교 우파와 연합을 추구했다. 후자는 과거에는 정치적으로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1978년 정치 운동으로서 팔웰(Jerry Falwell)에 의한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의 창립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제 공화당은 기독교적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중략: 인용자)


이후부터 신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후원된 대기업과 보수주의적 기독교들 간의 불경스러운 연합은 점점 더 공고해졌고, 결국 이들은 공화당으로부터 (1960년대에 유의했고 영향력이 있었던) 모든 자유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해 오늘날처럼 비교적 동질적이고 우파적인 선거 세력으로 전환시켰다. 역사적으로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겠지만, 한 사회 집단이 물질적·경제적·계급적 이해관계에 반해 문화적·국민주의적·종교적 이유를 위해 투표하게끔 설득되었다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 그러나 ‘설득된’이라는 단어를 ‘선택된’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도덕적 다수의 핵심을 구성하는 (또한 국민의 20퍼센트 이상인)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복음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의제를 더욱 촉진하기 위해 대기업과 공화당의 연합을 열렬히 포용했다는 증거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국가를 우측으로 돌리기 위한 방법을 전략화하기 위해” 1981년 창립된 국가정책협의회(Council for National Policy)를 구성했던 기독교적 보수주의자들의 음성적이고 비밀스러운 조직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3)


하비는 기독교 우파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신자유주의 옹호 세력인 공화당 및 대기업과 손을 잡은 이유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의제를 더욱 촉진하기 위해’라고 밝힌다. 하비는 거기에서 그칠 뿐 근본적인 이유로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근본적인 이유의 단초는 바로 놀이 말해 준다. 놀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놀은 ‘자유주의적 경제 사상’에 대한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반응을 다루면서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이상한 동거’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남북전쟁 전 시대의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정치 경제 체제에는 신이 부여한 특성이 있다고 강하게 가정하기에 이르렀다. 역사가들이 볼 때 19세기의 상황에서 “자유주의”라는 말은 존 로크(John Locke)와 아담 스미스(Adam Smith) 등과 관련되어 개인주의 및 자유시장의 전통을 의미했다(오늘날에 정치적 “보수주의”와 연관된 많은 특징들이 19세기 “자유주의적” 경제의 대들보였다는 것은 최근 몇 십 년 동안에 일어난 흥미 있는 언어 현상들 중의 하나이다).”(114쪽).


놀은 자신의 논점이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경제 관습을 수용했어야 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경제 관습을 수용했던 과정’이라고 밝힌다. 19세기 당시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문제들은, ‘자본과 노동의 문제’와 같이 초기 산업화에 의해 발생되었는데, 이런 문제들은 성경의 원리들을 따라 사고하는 사람들,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진리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에도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만이 대답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복음주의 안에 이런 식의 사고는 거의 없었다. 복음주의자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 자유주의적 경제 관습을 수용한 것이다.


놀이 주목한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경제 관습을 수용했던 과정’은 한마디로 성경의 원리들을 따라 사고하지 않은 과정으로서, 복음주의자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 자유주의적 경제 관습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견해를, 이 책의 부록 “3인의 석학이 밝히는 복음주의의 전망과 과제”에서 리처드 마우(Richard Mouw) 풀러 신학교 학장도 피력한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은 아직 공공생활의 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사고하지 않는 불간섭(unthinking noninvolvement)에서 사고하지 않는 간섭(unthinking involvement)으로 변화했다. 이것은 다시 오늘날 많은 적극적인 복음주의 정치 운동에서 발견되는 승리주의적 사고 구조로 변화되었다. 우리는 신중한 신학 사상의 인도를 받고 있지 않은 것이다.”(376쪽).


성경의 원리들을 따라 사고하지 않는 복음주의자들의 잘못이 바로,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 존재하는 ‘신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이상한 동거’에 대한 근본적 이유이다.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원리들을 따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온 주범인 반(反)기독교적 신자유주의를 피상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성을 포기한 복음주의가 역사에 끼치고 있는 비극적 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예리한 통찰은, ‘증거 구절의 나열’(proof-texting)과 같은 복음주의의 성경 사용 관습에 대해 비판하면서, 성경에서 상황으로 가고, 다시 상황에서 성경으로 가는 소위 ‘성경과 상황의 해석학적 순환’에 대해 강조하는 부분이다. 놀은 19세기 전반의 복음주의에 대한 사회적, 지성적 도전을 먼저 언급한다.


“이민으로 미국의 인구는 엄청난 수로 증가했고, 사회 융화라는 커다란 문제가 나타났다. 거대한 공장들이 지어졌고, 공장 소유주들은 공공 생활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유를 얻은 노예들은 남부에서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북부에서도 단순한 생존만이 가능했다. 성경은 점차 비현실적인 신화의 책이라는 공격을 받게 되었고, 생물학에서 등장한 새로운 사상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류의 독특성을 모두 거부했다”(154쪽).


그러나 이와 같은 사회적, 지성적 도전에 대해 교회는 무기력했다. 놀은 다음과 같이 복음주의의 절망적 상황에 대해 탄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의 지성적 근거를 되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자신들의 기초가 거의 허물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여전히 성경이 인간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을 준다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어떤 답을 준다는 말인가? 이런 사회적, 지성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시간을 투자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복음 전도에 투자했던 것만큼의 에너지를 이러한 문제에 투자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슬프게도 일관된 기독교 사상을 형성하는 일에 참여했던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154-155쪽).


그리고 놀은 성경 전체의 문맥과 조화를 이루면서 ‘성경과 상황의 해석학적 순환’에 의한 성경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증거 구절의 나열’(proof-texting)을 비판한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복음주의자들은 성경 자체와 조화를 이루면서 성경에서 출발하여 현대의 상황에 이르는 사고, 그리고 현대 상황에서 다시 성경에 이르는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자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즉 꾸준한 연구보다는 즉각적인 인용의 습관이 더 성행하고 있었다.”(155쪽).


결국 기독교의 역동성은 손상을 입게 되었으며, 지성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이전 시대의 효과적인 복음 전도와 도덕적 열정에 필적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심각했다.


“인간의 죄성, 하나님의 은혜, 혹은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사역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신학적 자유주의가 출현하게 되었으며, 세속적인 정신이 문화 일반에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정통 복음주의의 후예들(이들은 곧 근본주의자라고 불리게 된다)은 근본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고수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일반 세상의 문제들에서 도피하여 내면적 영성에 담긴 매력, 혹은 종말 예언의 지엽적인 설명을 파고들게 되었다.”(155-156쪽).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인간의 삶의 문제들에 답을 준다고 믿으며 중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이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증거 구절의 나열과 같은 피상적인 성경 사용이다. 이런 잘못된 성경 사용 관습을 청산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문맥을 살피면서, 성경에서 상황으로, 다시 상황에서 성경으로 순환하면서 인간의 삶의 문제들의 원인과 대안을 찾기 위해 깊이 생각하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의 부록에서 리처드 마우 역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복음주의 학자들은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좀더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성서학과 역사학, 철학, 그리고 과학이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숙에 이르게 하는 목표에 참으로 부합하는 것이라는 점을 과거보다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학자의 소명을 좀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방식으로 성경적 계시의 측면을 상황화시켜야 한다.”(376-377쪽).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작은 실수를 두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353쪽에서 디모데후서 2:14-17의 전체 성구를 기록했는데, 문맥을 볼 때 2장이 아니라 3장의 14-17절이 맞다. 왜냐하면, 그 앞에서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감동”(God-breathed)으로 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고전적인 본문인 디모데후서 3장”을 언급하고 있고, 그 뒤에서 역시 디모데후서 3장 14-17절에 나오는 성구들, 곧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된다는 표현을 직접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실수인지 역자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실수는 단순히 3을 2로 바꾼 숫자의 실수가 아니라 성구 자체를 전혀 엉뚱한 구절로 전체 성구를 기재해 놓았기 때문에, 다음 판이 출판될 때 반드시 교정되기를 바란다.


다른 한 가지 작은 실수는 다음과 같다.


“진지한 지성적 노력이 적어도 복음주의 전통 내에 있는 수많은 개신교도들에게 규범이 되어 왔다는 것을 이전의 역사가 보여 주지 않는다면(‘보여 준다면’으로 수정해야 함: 인용자), 현대 미국 안에서의 복음주의의 정신 상태는 스캔들로 묘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58쪽).


왜냐하면, 필자의 의견과 같이 수정해야만 문장의 의미가 ‘이전의 개신교는 진지한 지성적 노력을 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현대 미국 복음주의는 스캔들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되고, 게다가 다음 문장이 이런 의미를 담아 다음과 같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그것이 개신교 역사가 드러내 주는 바이다. 대체로 개신교 운동의 지성적 역사는 실로 엄청난 주제이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20세기에 들어 지성에 대한 복음주의의 태만은 지성에 본연의 권리를 주고자 한 길고 긴 개신교의 노력의 역사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입증하고자 한다.”(58-59쪽).


4. 나오는 글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복음주의의 과제에 대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을 기술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놀은 복음주의자들의 잘못된 태도 중의 하나인 ‘처음 인상으로부터 최종 결론으로 옮아가는 성급한 직관주의’를 비판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이 서로에게 주의 깊게 귀 기울일 것을 강조한다. 필자는 여기에 복음주의 지성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자체, 더 나아가 기독교 전체와 세계 인류 전체가 소생할 수 있는 중요한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복음주의자들이 서로에게 주의 깊게 귀기울인다면(남침례교는 기독교 개혁 교회의 말을 존중하고, 메노파는 부흥 운동의 충고를 귀담아 들으며, 복음주의 좌익과 복음주의 우익이 이전 어느 때보다 서로 대화한다면), 로마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 그리고 동방 정교와의 좀더 폭넓은 기독교적 대화를 통해, 그리고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과의 좀더 폭넓은 대화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명확해지리라고 예견할 수 있다.”(355-356쪽).


그런데 이와 비슷한 견해를, 이 책의 부록 “3인의 석학이 밝히는 복음주의의 전망과 과제”에서 리차드 마우도 피력한다.


“복음주의 지성은 그것이 발전해 감에 따라, 이것이 결론이라는 식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시험적이고, 겸손하고, 개방적이어야 한다. 다양한 전문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자신이 복음주의 지성을 완벽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엮어진다. 지성과 의지, 감정, 선교적인 활동, 복음 전도, 깊은 연구, 후진 양성, 그리고 학문 활동-이 모든 것도 그분 안에서 함께 엮어진다.”(377쪽).


같은 부록에서 달라스 신학교 교수인 대럴 박(Darrel Bock)도 강조한다.


“우리는 함께 일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태도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폭과 깊이의 한계가 있는 사람들이고, 서로 다른 전공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일하고 있으며, 특정 분야에 있는 어떤 한 사람이나 그룹이 우리들이 지금까지 이야기한 다른 모든 분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중략: 인용자) 오히려 폭 넓게 규정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재발견하는 교회론이 필요하다. 나 혼자서는 결코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꿈도 꾸지 못할 그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정보와 배경, 그리고 전문 지식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만물박사 식의 접근 방법을 지양하고, 함께 일한다는 생각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매우 다른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380쪽). 


이 견해는 대천덕 신부도 “20세기의 재난과 분열된 복음”이란 작은 글에서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온전한 권고(뜻, 가르침, 경륜, the whole counsel of God)는 무엇인가?”(행20:27)를 눈물로 질문하면서, 수세기에 걸친 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은 20세기의 전환점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온전한 권고를 선포하는 데 실패한 것, 곧 분열된 교회의 분열된 복음이라고 지적했다.4)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성급한 직관주의를 버리고, 이미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나누어 주신 씨앗들을 서로 소중히 여기며, 겸손히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고 배우면서, 한 몸을 힘써 지키며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사역자들을 비롯하여 복음주의자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영성은, 바로 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각각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며 서로에게 배우고, 자기 사역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역들을 돌보면서 그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영성인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 바로 영성의 핵심으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빌2:2-5).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분열된 복음이 초래한 20세기의 비참한 재난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몸 힘써, 온전한 복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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