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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두 사람의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와 아펜젤러(H.G.Appenzeller)가 성서를 손에 들고 제물포 부두에 발을 내디딘지 115년이 되어온다. 한 세기가 흘러간 지금 우리는 지난 100여년 간의 한국기독교회가 걸어온 발자취와 쌓아온 성취들을 회고해 보면서 역사적, 신학적 반성과 비판을 통해 새 천년을 올바르게 맞이하기 위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야 할 싯점에 와있다.

복음이 '조선'의 토양 위에 뿌려진 시기는 국가존망지추의 위기 상황이었고 이후 국권의 상실, 남북분단 등 수난의 민족사와 함께 호흡하며 지내왔기 때문에 개신교의 종교운동은 신앙적 차원 뿐만 아니라 민족사 발전의 동력이었다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앙의 내면화 과정과 함께 그것의 외연과정으로써의 사회선교가 동시에 분석,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기독교가 한민족의 역사적 실천과제를 놓고 기독교 본연의 임무인 선교적 과제를 민족사적 과제와 일치시켜 전진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소고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가 농촌선교를 통하여 자기정체성을 어떻게 나타냈는지를 검토해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민족사와 교회사의 관계를 선후의 과제 혹은 단계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상호 침투적인 입장에서 보려고 하였으며 교회 즉, 신앙공동체가 갖는 독자적인 자기 내적 흐름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민족사와의 조응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이 글은 8·15 해방 이후의 달라진 상황 속에서 예장(통합)교단이 농촌선교를 어떻게 해왔는지를 살펴보고 있으며 주로 농어촌부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분량이 많아서 두 번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며 80년대 후반기 서술부터는 농어촌부와 함께 농민목회자협의회의 활동도 같이 논의할 것이다.

2. 농촌부의 침체기

   1) 8·15 이후 1950년대의 역사적 상황

     ⑴ 정치적 상황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일으키며 침략전쟁을 확대시켜 나가던 일제는 태평양전쟁(1941)으로 세계대전까지 일으켰다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 항복으로 미국군과 소련군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하였다. 8·15 이후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는 식민지 잔재의 청산과 통일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 주어진 해방은 점차 분단이 고착화되는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이렇듯 식민지 시대에서 분단시대로 이어진 것은 간접적으로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있었고, 직접적으로는 미·소의 분할 점령에 있었다.1) 따라서 1945년 9월 9일 총독부 정문에 게양된 일장기가 강하되고 대신 성조기가 높이 게양2)된 것이 상징하듯 지배 외세의 국가만 바뀌었을 뿐 종속관계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강대국의 한반도 정책에 조응하여 국내 세력은 민족자주의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이 점차 도태되고 친미적 단정(單政)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승만을 대표로 하는 이 외세의존 세력은 일제 잔재의 숙청과 통일국가 형성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면서 밖으로는 남북대결의 양상을 띄고 안으로는 독재체제를 굳혀 나갔다. 미?소의 냉전전략이 가지는 파괴력 앞에 성숙하지 못한 민족주체 역량은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3)

마침내 남한에는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가 들어서고, 1948년 9월 9일 북한에서는 인민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반공 이데올로기와 적화통일의 힘은 38선상에서 무력 충돌을 일으켜 민족사상 미증유의 참사를 낳고야 말았다. 6·25 전쟁 이후 "인플레이션의 격화, 대중 생활의 파탄, 부정, 부패의 만연, 치안의 난맥, 재정 적자, 사회불안"4)등의 미군정 3년 간의 유산을 그대로 인수받은 자유당 정권은 권력의 독재화로 줄달음치다가 학생과 시민들의 힘 앞에 그 행진을 멈추고야 말았다.

     ⑵ 농민생활 실태

8·15 이후의 한국경제체제는 식민지 경제구조에 미국의 원조가 가미된 것이었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민족 자본의 형성이 어려웠고, 공업구조 또한 일본 경제의 보조적 역할에 한정된 파행적인 것이었으며, 게다가 자본의 영세성, 기술의 낙후성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경제체제는 미국 원조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5) "이승만 정권의 원조 경제체제는 의존성, 독점성, 소비성을 조장하여 자립적, 민족적 경제 기반의 형성을 크게 저해했으며,"6) 이 경제체제 아래서 농민생활은 개선되지 못한 채 생존의 어려움에 허덕이게 되었다.

특별히 1950년에 실시된 농지개혁은 지주측에 유리한 불철저한 개혁으로써 "농민적 토지 소유를 이루어 자작농을 양성하려는"7) 본래의 목적과는 크게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 결과 종래의 소작인은 자작농이 되자마자 또 다시 소작농으로 전락해야 했고, 군소지주들 또한 광범위한 몰락을 면할 수 없었다.8) 농민생활은 계속 핍박을 받았으며, '보릿고개'니 '쌀고개'니 하는 단경기(端境期)를 맞을 때마다 굶주림에 배를 움켜 쥐어야만 하였다. 당시의 농촌 실정을 알려주는 소식을 들어보자.

오늘날 농촌경제의 실정은 일익(日益) 쇠퇴일로를 밟아가고 있다. 생산성은 점감(漸減)되고 외곡 수입이 격증하는 한편 잡부금의 중압하(重壓下)에서 곡가 붕락과 더불어 농촌 구매력은 두색(杜塞)되고 있다. 이밖에도 경영 단위의 영세화, 자작농의 소작화와 분배 농지의 재집중, 입도선매(立稻先賣) 농가부채의 점증, 농촌인구의 이농 경향 및 현물 교환 경제에의 후퇴와 화폐 경제로부터의 이탈화 경향 등으로 농촌 피폐상은 여러 형태로 현상화되어 가서 위기의 칭상(稱相)을 띠게 되었다.9)

농가 수입의 74.3%가 농업 소득이며 이 농업 소득의 78.5%가 곡물 판매 수입으로 되어있던 당시의 상황하에서 미가(米價)는 안정되지 못한 채 저수준을 유지하였다. 그것은 "농산물 가격이 싸야 경제 재건을 이룩할 수 있다는 잠재의식이 정치지도자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식량 값이 오르게 되면 으례 외국 도입에 몰두"10)했던 데에 연유하기도 하였다. 농촌 경제의 몰락으로 이농, 폐농 현상이 속출하여 농지의 황폐화는 물론 농민들의 무작정 도시 집중으로 광범위한 도시빈민층이 형성되었다.11)

  2) 8·15 이후 교회의 모습과 농촌부의 미재건

   정치 질서의 혼란과 독재화, 경제 체제의 대외 의존성, 농민 생활의 파탄과 몰락 과정이 점차 심화되어갈 때, 교회는 재건과 동시에 분열의 상처를 스스로 입으며 모진 길을 자초해 나아갔다. 참회와 반성을 통한 진정한 재건과, 그 에너지 응축을 통한 민족 향도자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슬프게도 그 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8·15 해방 후 교회는 즉각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의 처리가 가로 놓여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 생활까지 했던 '출옥성도'들의 재건 방침이 제시되었으나 그것은 냉정한 현실에 부딪혀 결국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은총의 신비를 근본적으로 결여한"12) 경건파(출옥성도를 비롯한 그 동조자들)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제기되는 가운데 남한과 북한에서는 1945년 12월초에 5도연합노회(五道聯合老會)가 회집되었고,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남부대회가 소집되었다.13)

북한 교회는 이후 공산정권과의 정면 대립 속에 어두운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하여 6·25를 전후해 수많은 교회지도자와 성도들이 순교, 월남함으로써 교회의 정통 보존이 불가능해졌으며, 공산 정권의 와해책인 '기독교도 연맹'의 조직과 활동으로 완전히 변질되어 버렸다.

남한 장로교회는 1945년 9월의 남부대회 후 이듬해 6월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1회 남부 총회에서 그 재건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교단 분열의 싹들이 억제할 수 없는 기운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분열은 신학교 문제로 표출되었다.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가 월남하여 경남지역을 기반으로 송상석, 주남선, 박윤선 목사와 손잡고 진해 성경강좌를 기반으로 경건,선명의 별도 신학교육을 시작하였던바"14) 1948년 경남노회의 고신(高神)인가 취소와 1949년 총회 결의에 의해 고려파가 분열되었다. 그리고 6·25 전란 중 "총회는 총회 산하에 오직 하나의 직영 신학교인 '총회신학교'를 둔다고 가결함으로써"15) 신학의 진보성과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던 조선신학교의 합법성을 부인하여 마침내 조선신학교가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분립하였다. 고신과 조신의 분열로 장로교만 3파로 분열된 가운데 또 다른 분열의 싹이 트고 있었다. 2차대전 후 심화된 미,쏘간의 냉전과 갈등에 따른 반공 이데올로기의 매카시즘적 분위기가, 6·25를 겪으며 반공을 체득한 한국교회에 불어닥쳐, '용공'시비를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WCC쪽 지지의 '통합'과 NAE쪽의 '합동'으로 분열되고만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 장로교회는 8·15이후 6·25를 겪으며 4개의 교단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8·15이후 1950년대 한국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였다. 일제의 가혹한 통치아래 숨죽였던 모든 문제들이 해방과 함께, 신앙 정조의 선명성, 신학방법론상의 차이, 지역간 갈등 등으로 폭발하였고, 여기에 6·25전란 후 모질고 깊은 상처를 입은 한국 민중에게 갖가지 형태의 부흥, 성령운동, 이단 사상이 난무함으로써 그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한국교회 전체가 내부적 분열과 혼란의 진통속에 빠져 들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교회는 민족을 향한 희망찬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민족이 당하고 있는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였다. 아직까지도 사회적 최상 과제인 농민,농촌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갔다.

농촌부의 재건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것이 10년동안 재건되지 못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첫째는 교단 분열로 인해 내부 갈등이 심화되면서 밖의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으며 둘째는 일제하에서 전개됐던 농촌활동의 맥이 살아오르지를 못하였다. 농촌사업의 신학적 근거와 방법에 있어서 이미 그 한계가 나타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일찌기 날카로운 비판을 받은 바 있거니와 그 활동에 종사했던 많은 유수한 지도자들이 일제말에 변절하거나 해외로 도피하여 해방 후 재건의 인력과 지도자가 부재한 상태였던 것이다. 셋째는 6·25동란이 나라의 모든 생활 질서를 뒤흔들어 놓아 제도적인, 그리고 기구적인 노력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넷째는 6·25전의 좌우대립과 전란 이후에 만연된 반공 매카시즘은 농민, 노동자 활동을 좌경, 용공시하는 풍토를 조성하였다. 좌우익의 대립으로 엄청난 인명(人命)이 살상되는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농촌문제에 본격적으로, 공식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적어도 정부기관의 공식적인 조치 이외에는 당분간 태동하기 어려웠다.

  3) 농촌부 활동의 재개(1955-1961)

     ⑴ 농촌지도위원회 시절(1955-1957)

  해방 후 10년 동안 위의 여러 요인들에 의해 재건되지 못했던 농촌부는 1955년에 들어와 다시 공식적인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1955년 4월에 열린 봄 총회에서 '농촌지도위원회'가 결성되고 그 지도위원장에 김형우가 취임하면서 새로 시작된 것이다. '농촌부'라는 본래의 조직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 과도적 성격의 명칭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과 한계가 있었으나, 농촌활동의 공식기구가 총회 내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는 면에서 이것은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서기 겸 총무는 장순철이 맡았고 지도위원 중에는 일제때 농촌부 총무를 역임한 배민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농촌지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각 노회 내에 농촌지도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조직 사업이 재개된 것이다. 그리고 년 3회에 걸친 '농촌지도자강습회'를 계획하였다.16) 아직 상근, 유급 총무를 둘 형편이 되지 못했고, 재정 형편이 여의치 못했던 당시, 할 수 있는 일에는 뚜렷한 한계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서 활동에 있어서는 일제때 발행했던 「농민생활」이 1954년에 속간되어 계속 발행되었다.17)

여기서 우리는 잠시 배민수 박사에 대해서 일별해 보고 지나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일제 때 농촌부 총무를 쭉 맡았었고, 이제 농촌활동이 재개된 상황에서도 총회 때마다 늘 언권 요청을 하여 농촌 사정을 총대들에게 설명하고 호소하는 농촌부의 대부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 때부터 1950년대까지 배민수를 떠나서는 농촌부 활동에 대한 해석 기반이 약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제 때 농촌활동을 하던 중 농촌부가 폐지된 이듬해인 1938년 유재기와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놓여난 적이 있었거니와 "일제말 체포령이 내리기 직전 탈출하여 도미하였다가"18) 8·15해방 후에 미 점령군을 따라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미군정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고 미군이 철병함에 따라 1949년 12월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민간사절로 커다란 공헌을 세우고 전쟁 중인 1952년 11월 13일 귀국하였다.19) 그는 미국에 체재하는 동안 "전 미주(美洲)를 편력하여 한국 소개와 전쟁에 대한 강연 행각으로 한미 친선과 한국 구제를 촉진시켜 다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약 1,000회의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20) 그는 본래 애국의 충정을 남달리 강하게 지닌 인물로써 "동란 조국을 못잊으시고 이제 동포와 고배를 같이 나누고자"21) 전쟁 중에 귀국하였다. '동란 조국에 돌아와서'라는 제하의 강연을 통해 자신의 우국충정을 설파하여 많은 청중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으며 곧 이어 성미(誠米)운동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현금 조국은 극단의 통제주의와 개인주의 두 주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이 두 악사상(惡思想)에서 활로를 얻기는 상부상조의 운동뿐인 것이다.…함께 먹고 함께 입고 함께 싸우는 사랑의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장래는 암담한 것뿐이다."22)고 주장하면서 매 식구 한끼밥 쌀에서 한 숟갈씩 성미로 떼어놓았다가 주일마다 교회에 올 때 지참하고 올 것을 요청하였다.

1953년 그는 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 농촌지도본부 총무로 취임하였는데 이 기관에서는 총회 농촌부와의 관계하에 총회신학교 졸업반 농촌강습회 실시, 농촌계몽대 파송 등의 일들을 담당하기도 하였다.23) 그는 또 "1953년 연말에 금융조합 연합회장의 중책을 맡아 초도 순시하기도 하여"24) 활동영역을 일반 정치계에까지 넓히기도 하였으며, 1961년에는 다시 총회농촌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가 농촌부 일에서 손을 뗀 후, 즉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약 7년간 농촌부 활동이 정지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역할과 비중이 매우 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한국 농촌을 연관지어서 생각하여 예수의 갈릴리 선교를 농촌 선교의 신학적 근거로 삼았으며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자(愛神), 우리는 농촌을 사랑하자(愛農), 우리 노동을 사랑하자(愛勞)"25)는 3대 강령을 내걸기도 하였다.

1956년도에 들어서면서 농촌지도위원회의 활동은 다소 활기를 띤다. 전년(1955)에 계획했던 '농촌문제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노회별 강습회도 실시하였다(3개노회). 그리고 대전 기독교연합봉사회 농촌부와의 협력하에 총회신학교 졸업반 학생 중 지원자 34명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실시하였고, 3개 노회(충남, 김제, 군산)에 농촌계몽대를 파송하였다. 또한 농촌청소년 지도사업의 일환으로 4H사업을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26) 이 4H사업은 당시 교단지인 기독공보를 통해 "덴막이나 미국의 농촌운동이 국민고등학교나 4H운동 등 청소년 교육 사업에서 출발한 것을 잘 알고 있거니와 민주적인 지도 일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이 인적(人的) 개발운동이 중심 제목이 아닐 수 없다."27)고 주장, 권면되고 있었다. 1957년도에는 3개 노회 주최로 강습회가 여전히 실시되었고, 신학교 졸업반 농촌강습회도 실시되었다. 4H 구락부 활동에 대한 각 지교회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각 노회소속 고등성경학교 과목 중에 농촌수의과 과목을 넣어줄 것을 요구하였다.28)

      ⑵ 농촌지도위원회에서 농촌부로(1958-1961)

1957년 농촌지도위원회는 그 명칭을 농촌부로 변경해 줄 것을 총회에 청원하였는데 이 안이 수락되어 1958년부터는 농촌부로 활동하게 되었다. 과도적 조직 형태의 모습을 벗고 본래의 자리로 환원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변화에 따른 사업상의 새로운 시도들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오던 신학교 졸업반 및 개척 전도자 강습회가 예산 관계로 시행되지 못하는 퇴행의 일면도 엿보이고 있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농촌부 주일을 6월 둘째 주일로 정해줄 것을 청원한 것과 북미 장로교 선교 5개년 계획 중에 총회 농촌부 사업 추가 청원의 건이 보류되어 있는데 그것을 총회가 결정하여 실시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29)

당시 농촌상황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물론 상황은 여러 가지 구조적인 원인이 가로놓여 있었으나 "농사방법이 원시적이다. 놀고 먹는 사람이 많다. 관혼상제가 성행하여 경제 지탱이 어렵다. 고리대금이 흥행한다. 술, 담배가 지나치다. 농한기에 주색잡기가 많다 입체 농업에 어둡다."30)는 현상적인 진단 또한 매우 절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농촌 현실에 대해 농촌부는 어떠한 적극적 대처를 마련하고 있었던가? 1957년 5월 NCC는 농촌피폐의 원인이 중농정책이 서지 못한데 기인한다는 점과, 정부나 외국인의 사업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한국 농촌 실정에 맞도록 유도해야 한다31)고 주장하고 보다 적극적인 인식을 하고 있는데, 이에 비해 농촌부는 "모든 교회로 하여금 종적으로는 총회, 노회의 지도하에 있고 횡적으로는 정부 행정적 지도하에 국가 재건에 공천하여 나아가서는 전도 목적을 달성토록 할 것"32)을 주장하고 있다. 농촌부의 문제 인식과 대처 자세로는 피상적이며 다소 안일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1959년부터 농촌부의 활동이 정지되는 1961년까지 농촌부는 침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다할 사업이 거의 시행되지 못하였고 몇 가지 청원을 총회에 상정한 것이 전부였다. 물론 1959년도가 '합동'과 '통합'으로 교단이 다시 분열된 해이며, 그 여파가 수년간 지속됐었다는 점을 여기에서 감안하여야 하리라. 1961년 배민수 박사의 농촌부장 이후 그의 부재로 농촌부는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였다. 농촌 관계 사업은 이제 전도부와 사회부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1969년 농촌부가 8년만에 다시 재건되고 1971년 총무 체제로 기초를 다질 때까지 전도부내에서 곽재기 목사에 의해 인계 작업이 조용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3. 새로운 상황하의 농촌부(1966-1970)

  1) 전도부 내에서의 농촌 사업

1955년 농촌지도위원회로 부활한 농촌부는 어려운 재정형편, 지도자 및 실무자의 빈곤, 교단 분열로 인한 혼란 등의 요인으로 힘있게 농촌선교 활동을 수행하지 못하고 1961년 배민수 농촌부장을 마지막으로 7년 간의 활동에 막을 내렸다. 일제 저항기 때의 농촌부 폐지가 타율과 강압에 주로 그 원인이 있었다면 이번의 활동 중지는 순전히 자체 역량 부족에 근거하였다. 역사적으로는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하여 제3공화국이 들어섰고, 한일협정과 함께 공업화, 도시화의 거센 흐름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려는 때였다.

농촌부의 향후 활동은 그로부터 5년 후 1966년도부터 타부서인 전도부의 사업 속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1971년부터 1987년까지 만 16년 간을 농촌부 총무로 일한 곽재기 목사가 미국의 데모인(Demoine) 노회의 파송으로 전도부 내의 농촌 전도 분야 전임전도사로 부임한 것이 바로 그 해였기 때문이다. 농촌부 사업의 기초와 틀은 곽재기와 함께 1966년부터 전도부의 농촌 사업 속에서 다져졌으며, 그 이후의 농촌부 사업이 그 맥락 위에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농촌부 사업의 공백기는 사실상 전도부의 곽재기에 의해 감당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 기간 곽재기가 실시했던 사업들을 살펴봄으로써 농촌부 활동의 줄기를 짚어보고자 한다. 1967년의 총회록을 통해 그 방향을 살펴본다.

금년도에 농촌전도는 과거와 같이 자립운동과 부흥집회를 계속하는 한편 특히 북미 장로회 데모인 노회에서 파송한 곽재기씨를 농촌전도분야에 전문 간사로 책임을 지우고 특히 시청각 전도에 중심을 두고 자동차를 준비하고 시청각에 관한 모든 장비를 갖추어 그는 활동해 왔습니다.33)

'자립운동'과 '부흥집회' 즉 영육의 양식을 공급한다는 입장은 일제 저항기 때의 농촌부 방향의 맥락 위에 서있는 것으로써 그 방법이 강단의 설교와 강의의 형태를 벗어나 과학기술문명의 산물인 영사기를 이용하였다는 점이 차이였다. 그리고 실무자의 인건비와 사업비는 전액 해외에서 지원되었다.

1986년도에 들어오면서 시행 사업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급속도의 산업발전과 대도시의 근대화에 따라 인구의 격증, 생활 개혁이 도시와 농촌이나 적지 않은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34)이라고 사회 상황을 진단하면서 "건전하고 균형잡힌 농촌지역 사회의 발전과 자활 자립책이 수립되지 않는 한 건전한 조국의 근대화는 바랄 수 없다"35)고 진단하고 있다. 교회의 할 일을 농촌교회 자립과 지역사회발전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 진단의 이러한 인식하에 시청각 자료를 활용한 전도사업이 지속되었으며, 서울 시내 의과대학 기독학생들을 중심으로 동기 방학 기간 동안 무의촌 진료반을 편성, 순회 진료와 전도 집회를 실시하기도 하였다.36)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사랑의 정신은 오늘날 한국 농촌교회와 도시교회처럼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없다"37)는 취지로 도시-농촌교회의 자매결연 사업을 추진하였다.

  2) 농촌부의 두 번째 재건

전도부내에서 곽재기 목사가 농촌사업을 착실히 추진하고 있는 동안, 휴지기에 들어가 있던 농촌부가 다시 되살아났다. 7년간의 동면에서 깨어나 1969년에 이르러 그 두 번째 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군명 목사를 부장으로 하여 재조직된 농촌부는 여러 가지 부족한 여건하에서도 과거의 경험과 유산들을 되살리려고 노력하였다. 지도자 강습회, 시범지역 설정 등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결의하였다.

한편 전도부에서는 꾸준히 사업을 추진하였다. 1969년도에는 시청각 전도, 문서 전도, 농촌교회 부흥사경집회(31회) 등의 사업과 함께 장학금 지급 사업을 실시하였으며,38) 1970년도에 이르러서는 기(旣)사업들의 활기찬 추진과 더불어 마을 문고 운동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39) 해가 바뀜에 따라 새로운 사업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는 모습에서 발전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다시 활동을 재개한 농촌부는 11월 첫 주일을 농촌주일로 정할 것과 도시-농촌교회 자매 결연 추진, 농촌사업연구회 개최, 농촌 신용협동조합 강습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총무 선정의 건(件)이었다. 상근 총무가 부재(不在)한 상태에서의 사업 계획과 집행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본부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총무 1인을 두는 일과(1년간 임시로) 인선 및 대우 방법을 본부에 일임해 주시기 바라는"40) 청원을 총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농촌부가 필요로 하는 총무가 바로 이웃한 전도부 내에서 준비되고 있었으니 이 또한 그리 범상한 일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4. 정상 궤도에 오른 농촌부

1971년도! 70년대의 문턱에 들어가면서 농촌부는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였다. 마침내 상설사무국과 함께 상근 유급 총무를 두게 된 것이다. 총무에는 전도부에서 5년 간 농촌 사업 실무를 담당해온 곽재기 목사가 선정되었다. 몇 년만의 일인가! 일제 저항기 때, 1928년 농촌부가 신설된 후 5년 만인 1933년에 배민수 목사가 총무를 맡아 수년간 활동한 이래, 그리고 1955-1961년 어간의 한차례 재건 기간 이후 오랜 휴지기(7년간)를 지나 새 출범을 시작한지 3년 만에 갖추게 된 조직상의 기초적 완비였다. 상근 총무가 없는 사업의 계획과 집행은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거니와, 도시화, 산업화가 급격히 추진되고 있고, 농업 사회 자체내의 기술과 인력의 발전과 양성이 누적되어 온 70년대의 사회에서는 그 체제가 아니고서는 농촌 선교 사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여타의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총회 차원의 적절한 대처였다.

곽재기 총무가 농촌부 일을 맡으면서 농촌부 사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으며, 이 흐름은 그가 정년 퇴직으로 물러나는 1987년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전도부에서 농촌 분야의 일을 맡은 때부터 환산하면 20여 년의 긴 세월이었다. 이 기간(1966-1987)은 반만년 역사상, 단위 기간 당 변화의 폭과 깊이가 가장 넓고 깊게 진행된 격변의 시기였기에, 그에 대응한 농촌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해 보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관심과 주목을 끄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는 먼저, 인간 곽재기에 관해 그와의 면담 내용을 근거로 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사업을 논하려 한다. 그를 떠나서는 농촌부 사업을 설명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의 신상에 관한 살핌은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1) 곽재기 목사와 농촌부

곽재기 목사는 1922년 충남 금산군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역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는 국민학교 5학년 때, 금산군까지 선교지역으로 담당하고 있던 선교사 마노덕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예수믿기로 결심하고서는 11세 때에 세례를 받았다. 형과 함께 세례를 받고 그 부락에서는 첫 번째 기독교인 가정이 되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그는 당시로써는 쉽지 않은 배움의 길을 걷게 되어 5년 과정인 경북 안동 농림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임학(林學)을 전공하였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이듬해인 1942년 안동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의 젊은이들 앞에 놓인 두 가지 행로, 즉 군대에 징용으로 가는 일과 회사 취직을 통해 징용을 면하는 길, 둘 중에서 후자를 선택하여 미쓰비시 계통의 동산농사 주식회사에 취직,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파송되어 키니네 농장 일을 보았다. 8·15 해방을 그곳에서 맞고 3개월 후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 충남 재산관리처에 번역관으로 취직하여 3년간 일을 보다가 1948년 대전 YMCA간사로 6·25 발발 전까지 근무하였다.

이미 결혼한 그는 피난 생활의 와중에서 1951년 통역 장교를 지망, 육군에 들어가 1958년까지 만 8년 간 군무에 봉직하였고, 군대 생활 기간 중에 공병으로 바꾸어 공병 대위로 전역하였다. 전역 후 그는 신학 공부의 의지를 갖고 유학의 길에 올랐다. 6·25 사변 중 평양 입성 시 처참했던 상황을 목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으로 일할 것을 다짐했던 것이 신학의 동기였으며 따라서 그는 전역 후 가족들의 생계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조국을 떠났었다.

미국으로 간 그는 아이오아(Iowa) 주의 듀북(Dubuque)대학에서 기독교교육학을 4년간 전공하였고 계속해서 3년간 신학을 공부하였다. 수료 후 한국 농촌을 위해 일할 열심으로 앞길을 모색하던 중 총회 전도부의 농촌 전도 담당 전임전도사로 내정되었고, 데모인 노회 소속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교회에서 그의 사례비와 사업비 일체를 지원해 주기로 결정하였다. 1966년도에 귀국하여 1년 간 다시 장신대에서 수학한 후 대전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교단 내에서 공식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

수년간 전도부 내에서 농촌 전도 사업을 전담해 오던 중 1969년에 다시 농촌부가 부활되었다. 농촌부에서는 일할 일꾼이 필요하였고, 총무 채용 건이 총회에 상정되었다. 곽재기 목사 또한 전도부에 소속되어서는 농촌 사업이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밖에 취급되지를 않기 때문에 사업상 독립성과 자주성을 확보해야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인건비와 사례비는 미국에서 지원되고 있으니 재정확보의 어려움도 없었다. 마침내 그는 1971년 농촌부로 부서를 옮겨 보다 넓은 미래 앞에 앉게 되었다. 농촌부 선교 사업의 기초와 틀이 그의 손과 끌에 내맡겨지게 된 것이다.

  2) 1970년대의 역사적 상황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발생한 정치적인 격변은 유신체제의 등장이다. 종래의 국제적 냉전 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미국은 아시아에서 고수해 왔던 냉전적 반공 대결정책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반공 논리로 정권 안보를 해오던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국제 긴장완화 기류가 끼쳐올 정치 기반 약화 현상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강압 정치의 수단을 강구하였고, 이것은 전례없는 독재 정권인 유신정권의 출현으로 드러났다.

정치적 독재화와 함께 경제 성장의 그늘 아래 수많은 노동자층이 형성되었고 이농현상이 급증하였다. 1966년도에는 53.6%로 전체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했던 농업 인구는 1970년도에는 45.9%, 1975년에는 38.2%, 1980년에는 28.4%로 급격히 감소하게된 것이다.41) 농촌을 떠난 이농민들은 도시 노동자로 유입되거나 또는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하여 빈민촌을 형성하였다.    경제의 전반적인 구조가 외채의존적, 수출주도형이었으며 이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저임금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저임금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저농산물가격정책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농촌 경제의 빈궁화, 급격한 공업화 추진은 종래의 농촌사회 질서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아 바야흐로 붕괴의 단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절대적 빈곤으로부터는 어느 정도 벗어나 '보릿고개' 등은 없어졌으나, 고도 성장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는 농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증대되었다. 협상 가격차는 점차 벌어져 농촌의 궁핍도가 더욱 심화되었고, 농가호당 부채액은 점점 증가하였다. 젊은층이 도시로 유입됨에 따라 농촌 노동력은 부녀층, 노년층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고 농약과 비료의 과다 사용은 농민 건강과 함께 토지를 크게 오염시켰다. TV의 광범위한 보급은 건전한 농민문화를 파괴시키고, 농민의식을 마비시킴으로써 농민으로써의 정체성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70년대 이후의 한국 농촌은 한마디로 정신적, 경제적, 문화적 모든 삶의 전반적인 황폐화 바로 그것이었다. 이토록 생활 전반에 걸친 붕괴 현상은 민족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자의존적 수출주도적 공업화 정책의 피해가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자 그 피해 당사자인 농민과 가해자의 정권사이에 갈등과 마찰이 발생하였다. 농민들도 사회적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운동으로써의 농민운동은 70년대 초반의 준비 기간을 거쳐 7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되었다. 1972년 가톨릭농민회의 탄생, 1974년 크리스챤아카데미의 농민교육과정 개설, 1976년 YMCA의 농촌개발사업실시 등은 침묵과 굴종만을 강요당해온 농민들의 목소리를 사회적 이슈로 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가톨릭농민회는 농협민주화투쟁,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 경지정리피해보상투쟁, 강제경작반대투쟁, 을류농지세부당성 개선투쟁, 새마을사업 강제집행 반대투쟁, 저농산물가격 반대투쟁, 농민운동탄압저지투쟁 등의 생존권 투쟁을 조직적, 집단적, 지속적으로 전개하는데 중심역할을 담당하였다.42)이러한 농민운동의 활발한 전개는 1980년대에 개신교내의 기독교농민회를 조직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3) 1970년대의 농촌부

급격한 사회변화, 농촌변화를 의식하면서 새로 출범한 곽재기의 농촌부는 그 일정한 한계에서나마 과거에 비하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하였다. 농촌부는 먼저 그 조직이외에 7인의 실행위원과 8인의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본부 사업을 달성하기 위한 후원회를 조직하였다.43) 그리고 새로운 체제의 내용을 담는 규칙을 다시 제정하고 기구(총회농촌부 기구표, 노회,교회농촌사업기구)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으로 자매결연실천, 농촌교회 자립책의 한 과제로 신용협동조합의 운영,지도 장려, 농어촌 교회문고 설치, 새 농사법 및 농어촌교역자지침서 발간 등을 계획하였다.44)

그리고 결성된 조직을 유명무실하게 방치하지 아니하였다. 실행위원회와 연구위원회가 그 첫 번째 모임을 가졌다. 1971년 2월 16일 대전제일교회에서 열린 실행위원회는 장래의 농촌부 사업을 책정하기 위해 기초조사사업을 시행키로 하고 각 노회를 분담 순방하기로 하였으며 지역사회 특별사항들을 발굴, 연구키로 하였다. 그 기초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농촌사업에 열성 있는 동지와 농축장, 또는 농업과 관련있는 기업체를 발굴할 것.
② 농촌연구에 권위 있는 학자, 공직자 및 실적 있는 인사를  발굴할 것.
③ 자매교회 결연 형태를 조사하며 그 효과적 방법을 연구, 지도할 것.
④ 각급 교육기관의 농업상태를 알아볼 것.
⑤ 잠재한 농약 비방(秘方), 신안 농기구, 쥐잡는 기계 등을  발굴하여 그 활용을 후원할 것.45)

과거의 농촌사업과는 그 출발부터 방식을 달리하였다. 기초조사 사업을 시초사업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새로운 발상이었을 뿐더러 종래의 즉흥적, 비과학적 형태를 비로소 벗어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수용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역력하였다. 농업관계기관이나 조직, 그리고 인사(人士) 등의 조사 발굴을 염두에 둔 것은 특히 인상적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사회내의 농업 분야가 해방이후 꾸준히 발전하여 그 학문적 수준과 전문적인 정도, 영역의 확장에서 광범위한 향상이 있어 왔으며, 아울러 수많은 인적 자원들이 양성되어 왔다는 점이 가로 놓여있다. 농업전문기관이나 종사자들의 자문과 협력에 눈을 돌린 것은 그러므로 시의 적절한 일이었다.

실행위원회에 이어 그해 5월에는 연구위원회도 개최되었다. 연구위원회에서는 노회 농촌부장을 소집하여 2박 3일간의 세미나를 갖기로 결정하였다.46) 연구 작업의 착수에 앞서서 노회 실무자들과의 협의 자리를 마련한 것 또한 방법상 순리였다. 7월 하순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열린 이 모임에는 4가지 주제에 대한 강연과 토의가 있었다. 농어촌 교회 자립을 위한 사업(김성원 박사), 국가의 농촌정책과 관련된 사업(박기혁 박사), 농어촌교역자문제(김영환 목사), 농어촌교회사업 설정과 실제문제(김문협 박사)47)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각 부분별 권위자의 강연과 토의로 진행된 이 회의는 실질적인 방향 설정과 정책 모색을 하기에 충분한 비중있는 모임이었다. 이렇듯 사업 수행을 위해 권위자 및 담당자들이 모여 토의의 과정을 가진 것 자체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로써, 사업 수행의 수준을 향상시켜 주었다. 이 회의는 다음의 일곱 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최신 영농법과 기술지침서를 발간하여 교회가 새 시대 농사에 선구자의 역할을 하게 할 것.
② 지역사회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적절한 사업을 교회연합 또는 개체가 운영하는데 후원과 지도를 하게 할 것.
③ 농촌교회 자립사업의 하나로 신용조합을 실시하도록 지도, 장려할 것.
④ 신학교육과정에 농어촌교역자 양성 과목을 두기로 건의할 것.
⑤ 농촌교회 목회와 농촌사업에 공헌이 있는 교역자와 교인에게 총회장의 표창장과 그 대우 제도를 제정할 것.
⑥ 농어촌 교역자 목회지침을 발간할 것.
⑦ 총회, 노회 농촌부 기구 조직을 강화하며 기금조성방책을  수립할 것.48)

제1항을 통해 농민 경제생활의 향상을 꾀하고 있으며, 제3항을 통해 농촌교회 자립책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업의 효과적인 추진을 위해 '지역사회연구위원회'의 구성을 제안하고 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농민과 농촌 교회의 경제수준 향상을 제1차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농민들의 생활이 궁핍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에 대한 교회적 이해이며 대처이다. 단지 그 해결 방법에 있어서 기술향상을 통한 소득증대 방법이라든가, 신용협동조합을 통한 경제적 자구책을 강구함으로써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자세이기 보다는 외곽적이고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 아쉽게 생각된다. 제 4,5,6항을 통해서는 교회지도자, 즉 목회자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7항을 통해서는 중앙과 지방 조직간의 유대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농촌부는 또한 농촌사업기구를 결성하였다. 이 기구는 총회농촌부 기구와 노회-교회 농촌사업기구의 두 가지로 구분되며, 중앙기구-노회기구-지역사회-각 지교회를 잇는 체계적인 조직이었다. 농촌선교사업 수행을 위해 이만한 조직성과 체계성을 갖춘 것은 그 구체적 실천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획기적인 구상이었다.

총무체제가 출범한 첫 해의 사업이 이러하였다. 조직, 정책, 실천방안, 사업 프로그램 등 앞으로 지속될 농촌부 사업의 기반이 준비된 것이다. 농촌부 역사상,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도약이었다. 정책과 사업 결정의 합리적 절차와 과정 선행의 점에 있어서나, 조직의 체계적 결성과 그 활용도에 있어서나, 그리고 그 사업 계획의 실천면에 있어서 이 만한 정도의 준비를 갖춘 것은 농촌부 발전의 맥락에서 볼 때 참으로 놀라운 비약이고 변신이었다. 희망찬 내일이 1971년도의 '모퉁이 돌'에 새겨지고 있었다.

1972년, 2차 년도에 접어들면서 이 기초돌은 다시 한번 다져지고 확대되었다. 실행위원회, 연구위원회, 노회 농촌부장 수련회 등이 계속 개최되어 조직 가동이 활성화되었고, '농촌사업후원회' 조직도 구체화되었다. 신용협동조합 조직을 위해 농촌지도자 수련회가 개최되었으며, 『새농사법』 『농촌복지지침』 등의 집필이 의뢰되었다.51)

위의 두 사업은 이미 지난해 연구위원회와 노회 농촌부장 영성 세미나에서 추진하기로 결의한 것이었다. 여기에 새로운 사업으로써, 농촌 교역자 자녀장학금 사업이 실시되어 228명의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며,52) 농어촌 교역자 의료보험 사업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53) 이 계획은 C.O.C와 농촌부가 협의하여 농어촌교역자(목사와 전도사)의 건강보장을 위해 실시한 사업으로 '농어촌교역자의료위원회'가 별도로 조직되어 추진되었다. 1972년 현재 9개 노회 총 519명(교역자와 가족포함)이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54) 농촌부는 또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 간의 유대를 위해 "200명 이상 모이는 교회는 농어촌교회를 위하여 교회 예산의 10%를 보조하도록"55) 한 내용을 총회에 상정하였다. 이 청원은 단순한 물질적인 지원의 수준을 넘어서는 신앙적 깊이를 내포한 것으로써, 교회공동체의 본질 회복과 사회경제적 모순의 신앙적, 선도적 해결 방안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73년도의 사업은 지속사업이 대부분이었다. 농촌부장수련회, 농촌지도자 신용협동조합수련회, 농촌교회 지도자수련회 등이 계속 개최되었고, 농어촌 교역자 자녀 장학금 지급사업, 농어촌 교역자 의료보험사업이 계속 추진되었다. 의료보험사업은 반응이 좋아 12개 노회 355명의 교역자들이 가입하였다.56) 새로운 사업도 몇 가지 착수하였다. 교회문고사업이 이 해에 처음 추진되었다. 교회 문고란 도서관 건물 구실을 하는 책장과 책, 그리고 이를 관리, 운영하는 독서회로 구성된 교회 도서관으로써 "농어촌교회와 지역사회가 사회적 격차에서 오는 결과로 도서관이나 문고가 없어 도서이용도 할 수 없고 책을 구입할 경제적 능력도 없어서 낙오되는 현상에서 좀 더 힘을 합하여 책을 볼 수 있도록 시작한"57) 사업이었다. 다음 '농촌교회와 농촌개발사업'도 실시되었다. "농촌교회와 지역사회의 공동개발과 생활개선, 생활수준향상, 농사기술지도를 위해서.... 춘천지구에 10여만 평 농지에 특수농작물 율무 100톤 계약 재배를 착수"58)한 것이다. 실험적으로 실시한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면 그 범위를 확장할 의도를 가진 사업이었다.

1974년도에는 전년도 사업들이 계속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농촌 지도자 신용협동조합수련회가 개최되었는데, 천안중앙교회에서 열렸던 제5회 수련회 때 실시했던 설문 조사 결과가 눈에 뜨인다. 29명의 수강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중 지역교회 자립책을 위한 건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교인들의 생활향상을 도모해야 한다.
② 토지를 구입하여 특용작물을 재배함이 좋다.
③ 농촌교회 청년에게 1인1기 주의로 기술자를 양성하여 취미를 붙여 정착시킨다.
④ 신용협동조합을 통한 자금 조성이 필요하다.
⑤ 지역사회에 적당한 산업도입이 필요하며,
⑥ 교역자에게 부업을 주어 생활 안정이 필요하다.
⑦ 교인에게 기술 지도를 하고 영농 가축자금을 지급하는 것이 필요하다.59)

교인과 교회의 경제적 향상을 위해서는 기술지도, 신협 조직, 산업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목사, 전도사, 평신도로 구성된 수강생들의 응답 내용이었다. 이 해에 새로 착수한 사업들로는 농촌교회(22교회)에 부흥강사를 파견한 일과, 농촌교회 공로전도사 표창 등이 있으며, 60년대 후반 곽재기 총무가 전도부에서 일할 때 실시했던 시청각 및 문서전도사업이 계획되었다.60) 1974년도의 신(新)사업들은 주로 직접적인 전도 사업들이었다. 일제저항기 배민수 총무 시절의 전도 사업들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들이었다.

1975년도에 들어오면 국제 교류활동이 먼저 눈에 뜨인다. 우선 1975년 9월 제네바에서 열리는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통한 인간 개발 국제대회'(33개국)에 곽재기 총무가 참여하였으며, 뉴질랜드, 카나다, 네델란드, 일본 등 세계 교회와의 자매 결연을 통해 한국의 농촌 공예품, 수공예, 자수품 등을 상호교역하기로 하였다.61) 제네바 대회의 참여는 그동안 꾸준히 추진해 온 신용협동사업의 새로운 차원의 발전이었으며, 상호교역 활동은 세계 교회와의 신앙적 연대, 한 형제 자매로서의 동질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외에 기독교회관내의 신용협동조합 창설을 농촌부가 주도하여 설치하기도 하였다.62)

1976년은 농촌부의 사업추진이 한 단계 도약하는 해였다. 곽재기 총무를 파송하고 생활비와 사업비 일체를 지원해 온 미국 데모인 노회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재정 지원이 이 해에 마감되었다.63) 농촌부 사업의 해외의존성이 다소 감소되고(적어도 인건비에 관한 한) 자립 추진의 방향이 노정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 성장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다. 두 번째로, 꾸준히 시행해온 신용협동조합 사업이 결실을 맺어 지도자 교육이 아닌 신용협동조합 기간요원 수련회가 개최되었다.64) 11노회 38개 조합이 결성되어 이제는 그 실무자들을 위한 모임이 열린 것이었다. 신협 사업의 새로운 궤도 진입이었다. 그리고 75년도에 처음 "농어촌교회 및 지역사회 고리채 문제 해결 첩경은 먼저 주식인 양곡 해결이 긴요함으로"65) 양곡은행을 추진키로 하였고, 아울러 가축은행 사업도 계획하였다. 또한 이때껏 실시해오던 농어촌의료보험사업은 정부에서 실시, 계획중인 의료보험 관계로 1977년 7월 15일까지 종결하기로 결정하였다.66)

1977년부터 농촌부 총무의 인건비는 총회 예산에 책정 되어 인건비에 관한 한 자립을 성취하였다. 또한 "교역자 도시 편중으로 60%를 차지하는 농촌교회의 자립 발전에 큰 지장을 주고 있으므로 총회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67) '교역자생활비평준화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교회가 십일조를 실시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리고 "농어촌선교와 지역개발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지역사회와 교회를 개척, 발전, 부흥시키며 이를 담당할 목회자 양성을 목적"68)으로 '농어촌개발선교장학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김진홍 목사를 지도목사로 선정하였다.

1978년에는 새로운 사업은 없이 기존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양곡은행 계획이 미국 노회의 자금 도착으로 2개처에 실시되었고, 전년도에 결성된 '농어촌교역자생활평준화대책위원회'가 그 구체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역점을 두고 꾸준히 시행해온 신용협동조합 사업은 15노회에 모두 56개 조합이 창립되고 자산은 12억원을 넘어서게 되었다.69)

1979년에는 대담한 사업이 하나 시행되었다. 호주에서 젖소를 600두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농촌부가 350두, 남양만 활빈교회가 250두 도입하여 농가에 분양키로 하였다.70) 새로운 사업으로는 종봉을 도입하고 밀원을 조성한 양봉사업이 있었다. 그리고 이해부터 "남전도회 전국연합회와 공동으로 전국 농어촌 교회 중 가장 효과적인 교회 성장 및 선교, 그리고 지역사회발전과 선교에 공이 큰 교회를 노회의 추천을 받아 총회장 표창을 하고 부상(50만원)을 지급하고 격려"71)하기로 하였다. 신용협동조합 사업은 꾸준한 노력 속에, 아시아 교회에도 그 성과가 알려져 "지역교회 성장 및 선교에 미치는 영향이 인증되어"72) 아시아 교회 교역자(대만 300명, 태국 40명)들이 수련을 받으려고 내한하기도 하였다. 신협활동의 아시아적, 세계적 연대가 점차 이루어져 가는 발전적인 모습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 농촌부는 농촌 사회변동에 따르는 변화인식과 대책마련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 첫째가 "공업화에 따라 야기되고 있는 토지 공해, 물 공해, 농작물 공해가 극심해가고 있는 농어촌 현실에 대처하기 위하여 무공해 농업기술지도 및 효소 비료, 효소 사료의 개발, 보급 사업을 추진"73)하려한 것이요, 둘째가 "급변하는 농어촌 상황은 교회 자립, 성장, 개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안으로 노회와 시찰에 교회 상조, 공제계획을 추진"74)코자 한 것이다.    농업문제의 해결을 기술 개발에서 찾으려는 의도가 여전하여, 그 한계가 노출되고 있긴 하지만, 농촌 사회변화를 의식하고 대응하려는 자세가 표출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농업문제에 대한 구조적 인식이 점차 진행, 파급되고 있던 70년대 말의 상황에서, 그리고 농민운동 단체들이 온갖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농민 권익 실천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하고 있던 절박한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농촌부의 변화대처 방안은 소극적, 비본질적, 안이한 방법이라는 비판을 가할 수도 있으나, 정치체제와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교회의 본질적 사업인 '전도'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는 농촌부 사업의 일관된 흐름과 맥락에서 볼 때 그 이상의 일은 고안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4) 1980년대의 농촌부

1980년대는 민족사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간이다.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이 12·12군사쿠데타와 5·17광주학살 사건을 통해 억압과 착취의 도를 한층 심화시킨 기간이요, 이에 따라 농민생활은 더욱 황폐화되어 농촌이라는 삶의 터전 자체가 붕괴되는 위기에 봉착한 기간이다. 특히 '개방농정'으로 인한 피해가 농업 모든 분야에 미쳐, 수많은 농민들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비통한 현실이 연속된 기간이었다. 또한 민중정신이 시대를 끌어가는 주도적 정신으로 자리를 잡은 기간이기도 하였다. 교회와 신학도 시대의 질고를 같이 나누려는 자세로 사탄과의 투쟁에 앞장섰고, 그 역사적 현실을 수용하는 신학적인 응답을 진지한 자세로 모색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변화의 진폭이 매우 큰 시기에 농촌부는 어떻게 자기 논리를 정립하고 사업을 수행하여 나아갔는가? 70년대의 농촌부가 그 이전의 침체와 부진을 씻고 조직과 체제 그리고 사업의 추진 면에서 확고한 기초와 틀을 갖추었다면 80년대는 그것을 밑받침으로 새로운 변환이 가능하기도 한 기간이었다. 농촌부는 어떠한 입장을 선택하여 나아갔는가?

새로운 변신을 꾀하기에는 전통의 끈이 너무나 강한 탓이었을까? 농촌부는 시대변화를 수용하기보다는 70년대의 자기내용들을 그대로 고수하며 나아갔다. 실무책임자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 신학과 정책, 그리고 사업의 변화가 모색되기보다는 이전과의 지속성이 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 80년대 농촌부 선교정책의 명암이 담겨있다. 그러면 이제 그 구체적인 사업들을 통해 그것을 확인해 보기로 하자. 1980년도의 사업을 개요 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농촌교역자 자녀 장학사업(계속사업)
② 농촌지도자수련회(계속)
③ 신용협동조합사업(계속)
④ 양봉사업(계속)
⑤ 교역자 생활비 평준화 사업(계속)
⑥ 양곡협동조합사업(계속)
⑦ 농어촌교회공로전도사표창(계속)
⑧ 자매교회 결연사업(계속)75)

신규사업은 없고 모두 계속사업들이었다. 농촌부의 현실조건(인력, 재력)으로는 위의 사업들을 차질없이 수행하는 것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총무와 직원 1명으로는 벅찬 감이 있는 규모였다. 이런 때에, 즉 농촌부 고유의 독자적인 사업을 10년 정도 지속해오며 기반과 흐름이 잡힌 때에, 농촌부를 사회부안에 편입시키는 내용을 포함한 '총회기구개혁안'이 작성되었다. 농촌부는 처음 이 계획의 보류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총회기구개혁안에 암시된 사회부 편입안에 대하여 결사 반대하며 오히려 농촌사업의 확장을 위하여 힘쓸 것을 결의하였다."76) 농촌부의 입장에서는 그 개혁의 동기가 어디 있든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81년도에는 지속사업 이외에 두 가지 신규사업을 시행하였다. 첫째는 '한국농촌개발선교위원회'를 창립한 일이고, 둘째는 농어촌탁아소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선교위원회는 1981년 3월 군산노회 임피제일교회에서 개최한 전국 농촌지도자수련회에서 "각 노회 대표들이 자발적으로 노회내 농촌개발과 선교사업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키며 활성화하여 계속성 있게 유기적으로 추진하기 위해"77) 조직된 것으로 1981년 5월 8일 정식 발족하였다. 조직 결성의 동기가 민주적, 상향적이었던 점에서 농촌부 조직활동의 내밀한 농축을 느끼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다음 탁아소 사업의 동기는 다음과 같다.

지금 한국 농촌은 실력이 격감하여 농촌인구가 점점 감소되어가고 있으며 일손은 부녀와 나이 든 노장년층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농번기에 노동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부녀들이 십분 활동하며 노동할 수 있도록 그 어린이들을 수용하여 돌보아주고 양육할 수 있는 탁아소 사업은 절실히 요구되며 또한 그 성과도 크게 기대되는 바 있습니다.78)

설치된 탁아소는 모두 7군데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그 재정 통로가 해외에 있었다. 서독의 KNH와의 협의와 지원에 의해 가능했던 사업이었다.

1982년도의 사업 중 주목을 받는 것은 제1회 농어촌정책세미나의 개최이다. 1982년 8월 서울 성 프랜시스코 회관에서 30개 노회 6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세미나는 새로운 변화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80년대의 복지선교'라는 주제 강연이 곽재기 총무에 의해 행해졌고 5개의 발제 강연이 이어서 진행되었다. 개교회를 중심한 선교정책(민정웅), 노회를 중심한 농어촌 선교정책(김창열), 총회를 중심한 농어촌선교정책(한응수), 종합적 농어촌선교정책(김진홍) 등의 5가지 주제의 발제였다.79)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종합토의 결과 채택된 내용들이다. 그 내용의 획기적 성격과 망라성에 감탄하며 그대로 옮겨 본다.

① 총회 농촌부는 선교 2세기의 농촌선교를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총회 농촌부 산하에 '농민선교 정책전문위원'을 선출하여 다음의 업무를 담당하여 계속 추진케 한다.

ㄱ) 농민선교신학 정립
ㄴ) 농민 권익보호를 위한 정책 수립
ㄷ) 농민교육의 효과적인 정책 수립  
ㄹ) 농민문화창달을 위한 정책 수립
ㅁ) 농촌과 농촌교회의 통계 작성
ㅂ) 국내 농민단체와의 유대 협력
ㅅ) 국제적 농민 기구 및 단체와의 유대협력, 상호교류
ㅇ) 기타 총회 농촌선교 정책수립과 실시에 관한 사항 연구


② 총회 농어촌 교회 자립기금 조성안으로 본 교단내 각 교회가 연 예산의 1%를 상회비에 책정해서 주실 것을 총회에 제안한다.

③ 총회 농촌부 직영 중앙지도자훈련원을 설립한다.

④ 농촌교역자 양성을 위해 총회 직역신학교에 농촌교육 과정을 필수과목으로 넣어줄 것을 총회에 청원한다.

⑤ 농촌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해 총회 직영신학교에 농촌교육 과정을 필수과목으로 넣어줄 것을 총회에 청원한다.

⑥ 각 노회는 노회 예산의 10%를 농촌대책 기금으로 적립하여 농촌 미자립교회 자립사업에 대부하여 주실 것을 촉구한다.

⑦ 각 노회는 노회 단위에서 총회가 이미 결의한 바 '교역자생활평준화정책'을 실현화하여 실시하여 줄 것을 촉구한다.

⑧ 각 노회는 연 1회 이상 농촌지도자 훈련교육을 실시하되 강사는 총회 농촌부가, 기타 경비는 노회가 부담한다.

⑨ 농촌선교 지원의 긴급성에 대한 홍보 활동은 활발히 전개하되 교단 기관지인 기독공보에 '농촌선교란'을 열고 농촌선교 관계기사를 정기적으로 게재하여 주실 것을 요청한다.80)

실로 엄청난 선언이다. 80년대에 들어 더욱 강하게 휘몰아치는 시대의 바람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듯 농민선교정책상의 방향전환을 선언하는 위대한 사건이었다. 과거에, 이렇듯 모든 영역을 총괄한 종합적인 방향 설정이 언제 있었던가! 농촌교회의 재정 자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기술 개발을 통해 그것을 달성해 보려던 사업 흐름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농민선교의 본질에 근접한 시도들이었다. 먼저 농민선교신학 정립의 항에서 신학적 방향 전환을 꾀하고 있으며, 농민권익보호를 위한 정책 수립의 항을 통해서는 농민들을 대변하여 그 생존권을 억압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항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국내외의 농민운동단체와의 연대설정으로 표출, 확산되고 있다. 농민 교육을 통한 의식화에도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황폐화된 농민문화 재건도 거론하고 있다. 한가지 조항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의 참여와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이 일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농민선교정책전문위원'을 선출하고 조직하려는 일은 그러므로 뜻깊은 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사업으로 표출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983년도와 그 이후의 보고 내용(총회록)에서 실천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 때 한 집단의 일시적인 해프닝이었던가? 정책 토의자와 농촌부 실무자간에 의식상의 괴리가 가로놓여 있었던 때문인가? 실천의 주체가 형성되지 못해서 그랬었던가? 하여튼 이 엄청난 획기적 선언은 그야말로 '선언'으로 그치고 말았다.

1983년도에는 "농촌교회 자립기금 조성을 위해 전국교회가 교회 결산액의 1%를 5년간에 1회 상납금으로 해줄 것"81)을 결의하여 총회에 헌의안으로 제출하였다. 그리고 늘어나는 업무량을 감당하기 위해 간사 1인(한응수 목사)이 보강되었다.

1984년도에는 한국교회 100주년기념 행사가 열렸다. 서울의 반도유스호스텔에서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전국 농촌교회지도자대회'가 개최된 것이다. 뜻깊은 행사였다. 선교 2세기를 전망하는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는 자리였다. 이 모임에서는 피폐해져 가는 한국 농어촌과 농촌교회를 염려하며 한국 농촌복음화와 2세기를 향한 농촌선교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결의를 다짐하였다. 그 결의 내용을 살펴본다.

한국교회 100주년을 맞이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1984년 3월 26-28일 서울 반도유스호스텔에서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전국 농촌지도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피폐해져 가는 한국 농어촌과 농촌교회를 염려하며 한국 농촌 복음화와 2세기를 향한 농촌 선교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사명과 결의를 다짐했다.

농민은 농업을 업으로 하여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농촌경제와 사회의 붕괴 위에 새나라를 건설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분과토의를 통하여 우리의 의사와 결의를 다음과 같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표명하는 바이다.

① 농촌 교회는 농민구원의 방주로써 영적인 안식처일 뿐 아니라, 농촌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써 지역주민의 생활과 문화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② 선교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자립, 성장, 봉사, 선교를 병행하되 든든히 서가는 교회로써 자립에 역점을 두어 농어촌교회 자립을 지원하여야 한다.

③ 농지는 농민의 것이 되어야 하며 정부는 농산물 가격 보장과 농가 축산을 보호, 구축해야 한다.

④ 농민의 복지를 위하여 기업 자본을 환원하여 농가소득을 증대하고 농민의료보험을 실시해야 한다.

⑤ 새나라 건설을 위하여 미신적인 행위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하며 새마을 운동은 농민 스스로의 운동이 되게 하여야 한다.

⑥ 농민과 농업을 토대로 한 신뢰성있는 농정을 바란다.

⑦ 총회 차원에서 '농민선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농촌교회 평신도 육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82)

먼저 농민은 농업을 업으로 하여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농민 인권선언으로 출발하여 결의 내용의 포괄적인 기초를 정립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를 '지역주민의 생활과 문화의 중심', '농민구원의 방주'라고 규정함으로써 교회가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삶의 중심 센타가 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으며, 이를 수행키 위한 기본 조건으로써 농어촌 교회의 자립과 농민생활의 향상을 언급하고 있다. 이 결의 내용에서 특기할 사항은 '농지는 농민의 것이 되어야 하며'에서 알 수 있듯이 토지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과 농산물 가격보장에 대한 정부의 정책 전환을 촉구하고 있는 점이다. 오늘날 농민문제의 기본모순이 토지문제에 있으며, 주요모순이 농산물 가격 문제에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 위의 내용은 농민문제의 핵심과 본질을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정부에는 농정의 신뢰를 얻도록 촉구하고, 농민들에게 종교적 차원의 미신적 행위타파를 말하고 있다. 이 결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농민문제에 관한 사회과학적 인식의 일면과 하나님의 선교신학적인 측면이 보이면서도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입장이 완전히 정리되지 못하고 혼재(混在)되어 모자이크식으로 얽혀 있는 모습이다. 1982년도의 세미나 토의 결과보다는 사실 이 결의 내용이 농촌부의 현실을 반영해 주고 있다. 느린 듯 하면서도 꾸준히 쫓아가는 거북이의 모습을 여기서 그려볼 수 있다. 아무튼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환의 의미는 담겨있는 다짐이었다.

1984년도의 두 번째 인상적인 사건은 어촌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목포노회의 헌의안에 의한 것이었거니와 농촌부를 농어촌부로 명칭을 바꾸고 어촌 담당간사 1인을 총회에 요청하기로 결정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에 따른 어민과 어촌교회가 엄존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교단 차원의 어민선교대책이 아직껏 수립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책과 반성의 입장에서나, 그 사업의 공식적인 수행의 첫 발을 내디뎠다는 측면에서 이는 대단히 의미 깊은 일이었다. 이외에 1984년에는 남양만 지역사회개발사업(EZE프로젝트)이 전개되었고,83) 『농어촌백서』 발행을 결의하였으며, 농촌선교도서인 『교회와 농민』(영농 기술편) 6,000부를 출판하기도 하였다.84)

1985년, 이제는 농촌부가 아니라 농어촌부로 바뀌었다. 먼저 명칭변경에 따른 조직 개편과 사업수행이 계획되었다. 16인으로 구성되는 어촌선교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실무 간사의 인건비 책정, 어촌선교 간담회 개최, 어촌선교세미나 개최 등의 행사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촌선교를 위한 복지관과 의료선교원에 대한 프로젝트를 (미국)북장로교회 총회에 제출하기로"85)하였으며 '의료선교선'을 건조하기로 결의하였다.86) 어촌선교 첫 해의 사업으로는 실로 눈부신 바 있다. 제1회 어촌선교세미나가 목포 산성교회에서 21세기 어촌선교(한완석), 낙도선교전략(안기창), 어촌지역사회개발(유왕열), 수산동향과 시책(김좌기), 노대교회선교(박일상) 등이었다.87) 어촌선교를 위한 기본적인 작업들이 착착 진행되었다.

다음 1984년도부터 추진해온 『농어촌선교백서』 발간을 위한 심포지움이 개최되었다. 백서 발간 자체가 대단히 의의있는 일이거니와 이 준비를 위한 사전 작업이 수행된 것이다. 농업구조의 현황과 개선방향(박기혁), 농민선교신학(서정운), 농민과 선교(김용복) 등의 강의와 농촌교회 실태(민정웅), 농촌사회현장(김영원), 농촌선교의 과제(김진홍) 등의 분과발제가 있었다.88) 이후 백서 발간을 위해서 3개의 위원회, 즉 농촌교회분과, 농촌사회분과, 농촌선교분과로 나뉘었고 각 분과에 4인씩의 위원이 선정되었다. 이밖에 각 노회 농어촌부의 활동도 활기를 띠어 독자적인 세미나 등의 행사를 가졌으며 85년도에만 총 16노회에서 이 사업이 실시되었다.

1986년도,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해였다. 그동안 추진해온 지속 사업들의 결실을 맺고 신규사업들도 자리를 잡아갔다. 사업과 조직의 규모도 제법 짜임새 있고 또 방만해졌다. 이 해의 조직 현황과 사업실태를 총괄해 본다.

먼저 조직을 살펴보면 ① 임원회, ② 실행위원회, ③ 연구위원회, ④ 농촌분과위원회, ⑤ 어촌분과위원회, ⑥ 의료선교위원회89) 등이 결성되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업의 확대가 조직의 확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추진 사업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농어촌교회 지도자수련회가 여러 가지로 실시되었다. 농산물유통간담회, 제2회 영농기술세미나, 제1회 장신대 신대원생 수련회, 신안 도서지구 지도자수련회, 농어촌교회지도자 세미나, 노회농어촌세미나 보조 등의 지도자 모임들이 각 곳에서 개최되었다.

② 어촌선교는 목포를 중심한 신안지구 도서선교와 동해의료선교가 착수되었다.

③ 미자립교회 보조사업 : 미자립교회 65개처를 총회농촌부가 중개하여 보조하였다.

④ 농어촌교역자 자녀장학사업: 장학사업은 자매장학금과 거제도 장학금, 일반장학금의 3종류로 지급되었으며, 한 해에 180명 정도의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⑤ 양곡은행대부: 이 양곡은행 사업도 그동안 뿌리를 내려 이제는 38교회가 이것을 실시하게 되었다.

⑥ 한발로 인한 양수기 지원이 33교회에 1대씩 있었다.

⑦ 남양만 지역사회개발 사업이 진행중이며

⑧ 농수산물 유통센타가 설치되었다(종로5가 이화동).

⑨ 문서를 통한 농어촌선교사업, 『교회와 농민』(선교편)발행 및 보급, 기타 수 종의 책과 전도책자를 공급하였다.

⑩ 농어촌백서 발간준비, 백서위원회가 구성되어 현재 집필 중에 있다.90)

조직과 사업규모가 70년대 초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농어촌부 역사를 통해서 보면 사업은 굴곡없이 꾸준하게 진행되고 확장, 발전해 왔다. 그리고 단위 사업의 규모도 이제는 매우 커져서 본격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이 해에 처음 장로회신학대학원생들로 구성된 '장신대 농어촌선교연구회'의 제1차 동계수련회를 위해 강사 및 기타 재정을 지원해준 일이다. 사명감 있는 농촌교역자 양성을 그토록 원하고 있었던 농어촌부로써 자발적으로 조직된 이 단체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농어촌부의 선교사업이 이토록 침체에 빠지지 않고 든든하고 꾸준하게 성장해 온데는 실무 책임자인 총무의 역할이 대단히 컸으리라 생각된다. 총무가 교체되지 않고 장기간 맡아온 것의 긍정적인 부분이 사업수행상의 연속성으로 드러났으며 무리 없는 확장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다음 호에 계속)

각주)

1) 강만길, 『한국 현대사』(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5), p. 163.

2) 송건호,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 『해방전후사의 인식』(서울:한길사, 1979), p. 20.

3) 한국민중사연구회, 『한국민중사』,(서울: 풀빛, 1986), p. 221.

4) 송건호, Op.cit., p. 22.

5) 강만길, Op.cit., p. 221.

6) Ibid.

7) Ibid., p. 227.

8) 한국민중사연구회, Op.cit., p. 247.

9) 安霖, "농업경제의 위기", 「사상계」,(1954. 10), p. 15.

10) 朱碩均, "농촌경제의 현실과 그 번영책", 「사상계」,(1957. 3), p. 15.

11) 한국민중사연구회, Op.cit., p. 274.

12)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1982), p. 365.

13)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서울 : 총회종교교육부, 1956),

   pp. 47, 50.

14) 서정민, "해방전후의 한국기독교계동향", 「기독교사상」(1985. 8), p. 36.

15) 민경배, Op.cit., p. 375.

16)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40회 회록』,(1955), p. 351.

17) 「농민생활」은 농촌부 문서활동의 대표적이었던 책으로써 주로 농사기술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수록되었다. 비록 몇 년 후의 것이지만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벼2기작 성곡기, 벼의 조파조식 재배, 벼의 종자소독의 필요성, 벼의 일생, 뻐터리 양계, 감자2기작재배, 농가에 적합한 돈사, 음식물로 병고치기, 농업실험 등(1960년 3월호).

18) 기독공보, 1952. 11. 24.

19) 기독공보, 1952. 2. 25.

20) Ibid.

21) Ibid.

22) 기독공보, 1952. 11. 25.

23)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41회 회록』,(1956), p. 54.

24) 기독공보, 1953. 12. 14.

25) 배민수, pp. 147-148.

26)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40회 회록』 (1965), pp. 53-55.

2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42회 회록』 (1967), p. 122.

28)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43회 회록』 (1958), p. 276.

29) 기독공보, 1956. 11. 19.

30) 기독공보, 1957. 5. 27.

31) 기독공보, 1957. 5. 27.

3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44회 회록』 (1959), p. 112.

33)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52회 회록』 (1967), p. 52.

34)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53회 회록』 (1968), p. 41.

35) Ibid.

36) Ibid., p. 42.

37) Ibid.

38)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54회 회록』 (1969), pp. 54-55.

39)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55회 회록』 (1970), pp. 57-58.

40) Ibid, p. 37.

41) 강만길, Op.cit., p. 257.

42) 한국민중사연구회, Op.cit., p. 348.

43)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56회 회록』 (1971), p. 141.

44) Ibid.

45) Ibid., p. 142.

46) Ibid.

47) Ibid.

48) Ibid, p. 144.

49) Ibid, p. 145.

50) Ibid, p. 145.

5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57회 회록』 (1972), pp. 48-49.

52) 장학금 사업은 두 가지로 진행되었는데, 그 하나는 일반 장학 계획으로써 노회가 주동하여 노회가 장학금을 조성, 지급하되 총회는 노회에서 지급하는 액수만큼을 보조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매장학계획으로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한미장로회장학회'와 제휴해서 미국 가정과 자매결연을 맺어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계획이다.

53)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57회 회록』 (1972), p. 51.

54) Ibid, p. 52.

55) Ibid, p. 53.

56)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58회 회칙』 (1973), p. 127.

57) Ibid.

58) Ibid, p. 128.

59)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59회 회록』(1974), p. 156.

60) Ibid, pp. 158-159.

6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0회 회록』 (1975), p. 175.

62) Ibid.

63)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1회 회록』 (1976), p. 147.

64) Ibid, p. 149.

65) Ibid, p. 154.

66) Ibid, p. 154.

67)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2회 회록』 (1977), p. 150.

68) Ibid, p. 152.

69)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3회 회록』 (1978), p. 152.

7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4회 회록』 (1979), p. 170.

71) Ibid, p. 175.

72) Ibid.

73) Ibid, p. 176.

74) Ibid.

7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5회 회록』 (1980), pp. 185-194.

76)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6회 회록』(1981), p. 208.

77) Ibid., p. 209.

78) Ibid., p. 216.

79)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7회 회록』 (1982), p. 321.

80) Ibid., p. 322.

8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8회 회록』 (1983), p. 310.

82) Ibid., pp. 380-381.

83) 이 프로젝트의 주요내용은 주민교육사업, 농업개발 사업으로써 활빈교회에 지역개발본부가 설치, 진행되었다.

84)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69회 회록』 (1984), p. 375.

8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70회 총회 회록』 (1985), p. 265.

86) Ibid., p. 273.

87) Ibid., pp. 270-271.

88) Ibid., p. 271.

89)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제 71회 회록』 (1986), p. 372.

90) Ibid., pp. 372-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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