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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과학 기술의 발달과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우리 사회는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 그 많은 변화들 속에서도 유독 부정적인 변화로 우리 사회의 미래가 위태할 정도로 농어촌은 피폐되고 있다. 농어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농촌이농 현상이 그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일한 만큼의 보람을 얻을 수 있는 농어촌이면 누가 떠나겠는가? 우리의 생명의 현장이요, 고향인 농어촌이지만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에 버리고 떠난 것이다. 버려진 농어촌에 빈집과 잡초만 무성하며, 할 수없이 남아 있는 노인들만이 외롭게 농어촌을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농어촌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농촌을 장으로 하고 있는 농어촌교회도 위기에 직면해 있다. 농촌이농 현상으로 농촌교회가 텅텅 비고 있으며 대를 이어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머잖아 농촌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현재 농촌의 대부분 교회들이 농촌경제의 악화와 교인수 감소로 인해 지원을 받지 않으면 지탱하기가 힘들 정도의 연약한 미자립 교회들로 전락되어 도시 교회의 큰짐이 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으며, 인적으로나, 경제적인 모든 부분에서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농어촌 교회는 유지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지역을 위해 아무런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농촌교회를 어떻게 목회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농촌교회는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가?  지난 날 도시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감당해 왔던 농어촌교회를 다시 일으킬 방법은 없는 것인지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거제도 최남단에 위치한 다대교회도 전형적인 농어촌 교회로써 다른 농어촌 교회만큼이나 약하기 짝이 없다. 15년 전, 필자는 현 교회에 부임하여 농어민 선교를 감당하고 있다. 그 동안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농어민 선교를 감당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부족하지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앞만 보고 열심히 뛰어 왔는데, 돌이켜 보니 세월만 보낸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그 동안의 작은 노력들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자 한다.

농어민 선교를 시작하면서      

나는 부산신학교를 졸업(84년)한 후 어떤 전도사님의 소개로 1985년 5월 통영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부교역자로 첫발을 디딘 통영교회는 내게 많은 시련을 안겨 주었다. 오래 전부터 누적되어온 담임목회자와 교인들간의 깊은 갈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내가 부임하게 되었는데 어떤 한 사건을 계기로 목사님의 도덕성 문제가 제기 되면서 교회가 혼돈 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부교역자로 더 이상 시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부임한지 3개월만에 교회를 옮겨야만 하였다. 그래서 시무할 목회지를 알아보던 중 현재의 다대교회를 소개받고 1985년 9월 13일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였다.

그 당시 다대교회는 49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로 충무에서 2시간(1시간 비포장) 더 가야하는 거제도 최남단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어촌교회였으며 아주 약한 시골교회였다. 이사하던 날 따라왔던 친구 전도사들이 이런 곳에서 어떻게 목회할 것이냐고 말하면서 한숨을 뒤로하고 돌아갔으며, 장롱이 들어가지 않아 문짝을 힘들여 떼내야 했던 옛날 시골 사택은 결국 우리 마누라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고 말았다. 지금은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여러 모양으로 좋아졌지만 그 당시엔 정말 오지에 속하는 섬 마을 동네요 교회였으며, 빈약한 재정으로 목회자 생활비 충당이 어려웠던 만년 미자립 교회였다. 그러다 보니 부임한 교역자들이 2-3년을 버티지 못하고 틈만 있으면 떠나가곤 했던 것이다.

나의 농촌목회는  계획하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큰 뜻(큰 교회 목회)을 품고 시작한 목회 계획이 산산히 부서지고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설은 땅 거제도에서 초라하게 목회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나를 이곳으로 내몬 것이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농촌(밀양) 출신이며 부모님은 아직도 그곳에 살고 계신다. 농촌 부자는 일 부자요 고생부자인데  어릴 때부터 일 구더기에 살면서 고생만 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나는 죽어도 농사를 짓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때에  나는 먹거리는 생명이요, 농업은 생명산업이기에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땅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는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노동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 전혀 몰랐다. 물론 거기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오직 공부 많이 하여 출세하라는 것 외에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긋지긋한 농촌에서 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원치 않는 농어촌 교회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처음엔 내 자신이 못난 것 같아 초라해 보여 실망도 했지만 할 일도 별로 없는 작은 농촌교회에서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방송통신대 영어과(3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여기서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내일의 좀 더 나은 교회를 가기 위한 준비의 기회로 삼으며 농민선교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농민선교의 뜻을 가지고 농촌목회를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농촌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남은 여생을 오직 농민선교만을 위해서 살리라고 다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농민선교를 통해 기존 신앙관념을 완전히 새롭게 정립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을 무한히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오늘도 묵묵히 일하고 있다.    

다대교회와 지역상황  

다대교회 상황과 지역여건을 85년도와 99년도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소재지: 경남 거제시 남부면 다대리 102-1
● 교회창립: 1935.4.28.(64년)
● 표어:  새 역사를 창조하는 교회.

▶ 85년 교회예산 : 4,600,000원
▷ 99년 교회예산 : 40,200,000원

▶ 85년 교인수 : 장년부 - 25명, 청년부 - 2명, 학생회 - 25명,
                        아동부 - 35명
▷ 99년 교인수 : 장년부 - 50명, 청년부 - 6명,
                        학생회 - 10명, 아동부 - 20명

▶ 85년 직분자 : 전도사1, 권사2, 서리집사10
▷ 99년 직분자 : 목 사1, 권사3, 서리집사18

▶ 85년 다대마을 총인구-496명(남250,여246),  세대수-160호
▷ 99년 다대마을 총인구-416명(남210,여206),  세대수-141호

▶ 85년 남부면 : 12개 자연부락, 세대수 - 1,300세대,
                                             총인구 - 4,510명
▷ 99년 남부면 : 12개 자연부락, 세대수 - 879세대, 총인구 - 2,600명

▶ 경제생활여건 : 농업 - 40%, 어업 - 25%, 상업 - 10%, 기타 - 25%

필자가 다대교회에 부임할 당시 4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로써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아주 미약한 전형적인 농어촌 교회로 장년교인 20명, 일년 예산이 겨우 460만원 밖에 되지 않는 미자립 교회였다. 교인들은 대부분이 경제력이 약한 노약자와 부녀자들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 나마도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형편이 좀 나은 편인데 우리 교인들 중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 자급자족 형태의 영세소농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하거나 품을 팔아 살아가는 분들이었다. 경제력이 약한 농민들로 구성된 우리 교회는 재정적으로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 보니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 프로그램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 일할만한 일꾼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적 자원의 빈곤은 농촌교회의 최고의 문제다. 교회의 중심 역할을 감당할만한 인격과 신앙을 소유한 교인들이 거의 없었으며, 마을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지역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마을을 주도해 나갈만한 인물이 교회의 평신도 중에서 나와야 하겠는데 그런 인물도 없었다. 교회가 그런 인물들을 키우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우리 지역은 바닷가 어촌 마을의 특유한 샤마니즘적인 신앙과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선교의 벽은 너무나 높았고, 대부분 교인들이  신앙을 통한 인격의 변화와 성숙된 참 그리스도인으로 본을 보여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유,은사를 중시하는 샤마니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교회의 새로운 변화와 성장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이런 여러가지 여건 속에서 전도하기가 힘드는데 이농현상으로 교인들이 도시로 10가정이  빠져나가게 되니 우리 교회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약한 다대교회는 지역을 위해 아무런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으며 마을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그러니 교회는 자연히 하나의 종교기관으로만 인식되고 있었으며,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네들 끼리 모이는 집단으로 주민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었다. 모든 여건이 최악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농촌교회를 목회 해야 할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다른 농촌교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지역과 함께 하는 다대교회

1) 유치원운영

    필자는 농촌목회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교회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그래도 전도하는 일밖에 방법이 없다 싶어 개인전도(일반적 목회)를 열심히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기성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빛되게 살지 못한 것 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어서 개인전도를 통한 교회 부흥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저 사람 죽으면 교회 나가지요"라고 말하는데 무슨 전도가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 지역에 보내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선교정책을 연구하게 되었다.

오늘날 농어촌 교회의 모든 문제는 농어촌의 문제다. 농어촌을 장으로 하고 있는 농어촌 교회는 농어촌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개인전도를 통해 교인 몇 사람 더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농어촌을 변화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며 이를 위해 목회계획을 짜는 것이 정말 농민선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사회구조적인 모순으로 비롯된 농촌교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 활동적 측면의 일반목회가 아니라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목회가 되어야 하며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장기적 계획과  전망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농민선교에 삶을 헌신할 것인가 말 것인가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됐다. 농민선교를 위해 일평생 투신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선교를 통해 생명을 지킬 뿐만 아니라 무너져 가는 농업을 일으키고 농촌을 살린다면 이는 단순히 농촌교회만을 위한 일이 아니요 민족구원의 길이기에 이 농민선교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사역으로 어렵지만 누군가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농민선교 사역을 위해 헌신하리라 다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지역과 함께 하는 교회'를 내 목회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고 본격적인 농민선교를 위한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지역 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교회가 하는 일에 공감하며 동참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던 중 어려운 일이지만 주민들의 자녀들 교육에 도움을 주는 것이 가장 쉽게 주민들을 묶어 갈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닫고 유치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필자가 처음 부임했을때 우리 지역은 유치원이 없었기 때문에 취학전의 아동들이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제직회에서 어렵싸리 허락을 받고,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여 학부모님들의 동의 가운데 20명의 어린이를 모아 교사 한 명을 초청하여 선교원을 시작하였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칭찬은 기대 이상이었으며 약한 농어촌교회이지만 지역을 위해 무엇인가 일 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다대교회 창립 이래 처음 있었던 일이었으며 이로 인해 교인들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주민들은 교회를 새롭게 인식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조용하던 교회가 늘 북적대기 시작했고 생동감이 넘쳤으며 또 다른 기대감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를 한번도 와 보지 않았던 자모들이 아이들 때문에 들락거리기 시작하면서 지역과 교회간의 담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선교원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2) 유정란 작목반 구성

    필자는 선교원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가능성과 자신감 속에 다른 일을 계획하게 되었다.  더욱이 개인전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역 주민들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선교정책을 생각하면서 농어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민감한 경제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농어민들의 경제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87년 12월 때마침 경남노회 농어촌부의 농촌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그 세미나에 참석하여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환경을 지키고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신앙운동으로써의  유기농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무농약, 무비료로 농사를 짓고, 톱밥 발효사료로 유정란을 생산하는 것을 배운 후 이것이 우리 농업의 나아갈 방향임을 깨닫고 우리 지역에 적용해 보기로 하였다.

  그 당시 벼농사 외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교회 청년들과 동네 청년들에게 적은 땅에 서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유정란을 생산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뜻있는청년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정란을 생산하는 현장을 청년들과 함께 탐방했다. 그리고 난 후 청년들이 몇 차례 모여서 함께 논의 한 끝에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유정란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유정란 작목반을 구성하게 되었다. 드디어  6명의 청년이 6000수를 키우기로 하고 양계사를 짓는 대공사가 4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이런 일이 우리 동네로써는 처음 있는 일이라 주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며 교회를 통해 진행되는 일이기에  동네에서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나약한 교회로 동정이나 받고 교인들 자기끼리만 모이는 종교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주민들의 가슴속에 심어 주게 되었다.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부분인데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일거리가 있고, 그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보람되게 살 수 있으면 아무리 농촌이라 할지라도 떠날 이유가 없으며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오지 않겠는가?  그러면 위기를 맞고 있는 농촌문제와 농촌교회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문제는 농촌에 그런 삶의 현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런 농촌 현장을 청년들과 함께 만들어 보기로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유정란을 생산하는 청년들이 농촌을 떠나지 않고 농촌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며 농촌 교회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농촌교회 치곤 젊은 청년들이 많다.

유정란을 생산한 이 후에 계란을 판매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농촌교회 지키는 운동에 도시교회들을 대상으로 선교비 지원보다 계란을 하나 먹어 주는 것이 농촌교회를 직접적으로 선교하는 일이요, 생명을 지키는 실천적인 신앙운동임을 교육하면서 이 생명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 결과 짧은 시간 내에 그 많은 계란을 판매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한 때 필자에게는 계란 전도사란 명예(?)로운 별명이 따라 다니게 되었다.

3) 한울타리 공동체를 창립하고    

    농민선교 5년째 유정란 생산자공동체 결성과 사업 성공은 농어촌일지라도 무엇인가 함께 일하면 된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으며, 지역주민들에게도 상당한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는 생산자들의 십일조 생활이 만년 미자립 교회의 딱지를 떼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에 필자는 새로운 용기를 얻고 몇 사람으로 국한된 유정란 작목반 외에 전 교인들과 뜻을 함께 할 수 있고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조합)를 구성하게 되었으며 그 이름을 한울타리공동체라 정하고 새로운 일들을 추진하게 되었다. 1992년 11월 조합원 15명, 출자금 3천만원으로 출발하여 거제도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유자를 차로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교인들이 중심이었다. 출자 조합원들이 농한기 때인 겨울에 한 달 동안이나 유자 가공을 하게 되므로 교인들이 인건비를 벌게됨으로써 경제적으로 상당한 도움이 되었고, 이 작업을 통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으며 교인들이 단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자청 생산은 한울타리의 새로운 변화로써 재정, 조직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 후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상근 직원을 채용하게 되었고, 300평(2천4만원)의 땅을 구입하여 40평(5천만원) 규모의 조립식 공장 및 사무실을 짓게 됨으로서 공동체의 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다대교회가 화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때 이 유자청 판매의 일정 수입을 교회건축 헌금(3년에 걸쳐 5천만원)으로 내놓게되어 오늘날의 아름다운 다대교회를 건축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지역에서 생산되는 돌미역은 해녀들이 직접 바다에서 돌에 붙어 자생하는 것을 채취하여 태양에 건조한 것으로 품질이 우수하고 맛이 좋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주는사람이 없고 양식미역보다 가격도 비싸고 해서 판매할 길이 없어 어민들에게 굉장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것을 우리 공동체에서 전량 수매하여 전국에 공급하게되었다. 이일로 인해 미역을 생산하는 어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되었으며 그들도 함께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역을 계기로 수산물(멸치,미역,새우,다시마,멸치액젓)도 늘어나게 되었다. 98년부터는 도시 소비자생활협동조합과의 논의를 통해 유기농 채소(상추,배추,미나리,쑥갓,깻잎,토마토,오이 등)를 본격적으로 생산하여 공급하고 있으며, 순수한 우리 콩으로 만든 손두부도 만들어 공급하고 있는데 소비자들의 반응이 아주 좋은 상태라 그 규모가 더 커질 전망이다.

공동체의 유통은 대부분 서울,부산,마산 한살림, 부산,창원,대구 우리농촌살리기 천주교 운동본부,부산,마산 YWCA,전국 생협 등 도시소비자생활협동조합, 뜻을 같이 하는 여러 교회들 등 생명운동을 하고자 하는 단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단체들과 함께 늘 협의해서 진행하고 있다.    

한울타리공동체의 현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표어:하나님을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농어민을 위하여.
● 조합원:18명(기독교인13,주민5)
● 출자금:8천만원
● 직원:5명
● 일년 총 매출액:5억(98년)
● 순수익:5천만원
● 생산판매품목 : 유정란, 돌미역, 새우, 멸치, 토마토, 오이, 고추,
                          가지, 감자, 고구마, 치커리, 상추, 배추, 돌미나리,
                          열무, 깻잎, 파, 돼지, 유자청, 손두부.

그리고 생산자 공동체인 한울타리공동체는 조합원들이 무농약으로 생산한 모든 농산물을 전량 공동판매 및 유통을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산자들에게 자연농업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소비자교육을 통한 의식변화 운동 전개, 소비자 여름교실운영, 농촌자연학교 체험현장으로 개방하는 등 많은 일들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공동체의 수익금 중 3백만원으로  2박3일간 동네 노인네들 40분을 모시고 서울효도관광을 시켜드리기도 하였으며, 지역학생들에게 장학금(2명 1백만원)을 지불하여 지역 주민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다대교회의 나약한 이미지를 완전히 불식시키게 되었고 지역을 이끌어 가는 교회로 부상하게 되었다. 즉 개인전도의 한계를 지역선교로 바꾸므로써 새로운 교회의 미래를 열게 된 것이다.

공동체가 처음에 출발할 때는 참으로 미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생산자인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며, 청년들이 농촌을 떠나지 않고 농촌을 지키고자 다시 들어오고 있다. 필자가 다대교회 부임할 때 중학교 2학년이던 학생 주영진(30세)이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에 뜻을 가지고 들어와 사무국장으로 전담해서 일하고 있으며, 대학 친구인 전용현(30) 형제도 부산에서 들어와 일하고 있으며, 나태열(26),진호균(25)군도 다대를 떠나지 않고 농촌을 지키고 농촌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들 실무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오늘의 한울타리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들에게 늘 고마움을 갖고 있다.

뜻으로 시작한 한울타리공동체가 땅을 살리고 생명있는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여 도시에 있는 소비자들에게 공급함으로써 이 생명운동이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 속에서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관(官)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98년 1월에 농협에서 우리 공동체의 활동을 좋게 평가하고 3천5백만원을 무상으로 지원하여 하우스 300평을 짓게되어 시설채소를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우리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노농연대 차원에서 대우조합원들의 명절 선물 납품에 우리 공동체를 참여케 하므로써 우리 공동체가 새롭게 도약하 할 수 있었으며 지역의 농어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데  행운으로 주어진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나 싶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하고 많은 사연들과 어려움, 그리고 갈등도 있었으며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절망감에 쌓이기도 했다. 해산의 고통이 없이 생명이 탄생할 수가 없듯이 과정의 어려움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내일의 소망을 가지고 묵묵히 달려갈 것이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 한울타리공동체가 가야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판매의 어려움, 뜻을 가진 사람들의 부족, 자본의 영세성, 자연농업으로 농사지을 생산자 확보 등등... 극복해야할 과제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한울타리공동체는 단순한 경제사업이 목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생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코자 하는 원대한 포부와 꿈을 가지고 시작한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 운동기구이다.  이 신앙고백이 있는 한 한울타리공동체의 미래는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울타리공동체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계획을 하고 있다.

첫째, 우리 사회의 최고의 모순인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상경제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초대교회와 같은 신앙공동체를 일으켜 보고자 한다. 가령 이스라엘 기부츠를 연구하고 접목하여 우리 현실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여 한국교회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며, 시대와 역사를 바꾸는 디딤돌이 되고자 한다.

둘째, 새로운 삶의 체험, 영성 훈련의 도장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 동안 현실 도피적인 창구 역할을 해왔던 한국교회의 병폐의 하나인 기도원과 같은 곳이 아니라 자연과 노동과 공동체적인 영성훈련을 통하여 참 신앙과 현대인에게 안식을 주는 영성훈련장으로 키울 계획이다. 그리고 농민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뜻 있는 지도자, 사명자를 길러내는 도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셋째, 남북통일을 준비하는 공동체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모델로써의 공동체로 이 후의 북한사회를 치료하고 변화시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한울타리공동체를 지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우리의 경험들이 70년대의 우리농촌과 같은 북한사회를 위해 많은 역할을 하리라 확신한다.

넷째, 한국기독교의 토착화운동의 현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민족생활학교를 만들어 영성훈련과 아울러 한국인의 얼을 심고 학생들을 훈련시킬 수 있는 훈련장이나 대안학교로써의 작은 학교를 만들어 갈 계획이다. 신앙으로 재조명된 전통적 가치관 교육, 전통적인 예절 훈련, 전통음식 교육, 전통음악, 의복, 건축 놀이 등등... 우리의 소중한 것을 재현해 내며 훈련할 수 있는 대안학교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 세계화의 시대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요, 우리의 자랑스런 가치를 세계 만방에 심어서 미국화된 기독교(제국주의적)로부터 복음을 해방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꿈이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 의지하고 전진해 나아갈 계획이다. 이 모든 계획들이 이 시대의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통해서든지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울타리공동체를 시작할 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역사을 체험한 믿음이 있기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감당해 갈 것이다.    

4) 그 외의 농민선교활동  

    첫째로 우리 교회에서는 분기별로 '다대마을 교회 이야기'를 발간하고 있다. 전에는 한울타리 회지에 교회선교소식을 같이 실어오다가 99년부터 분리하여 교회소식지로 발간하고 있다. 앞으로 마을의 모든 소식을 담아내는 마을 소식지로 확장할 계획이다. 그 동안 발간해온 한울타리 소식지는 평범한 목회가 아닌 사명으로 농민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우리 교회의 선교활동을 대내외에 알리는 중요한 매체였었다.

둘째로 해마다 우리 교회에서는 노인들이 많은 농어촌 현실을 감안하여 '침술의료선교'를 실시하고 있다. 서울 강남노회 침술의료선교 팀과 연계해서 12월 달에 2박3일 동안이나 무료침술로 노인네들에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 기간에 동네 전 노인들을 초청하여 노인잔치도 벌이게 된다. 전 노인네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속에 해마다 진행하고 있다. 간접선교의 효과적인 측면에서 귀한 봉사활동이라 생각된다.

셋째로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좋은 영화보기'를 매월 실시하고 있다. 건전한 비디오문화 확립과  문화적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온 농촌 학생들에게 꿈을 갖게 하는 일로써 학생들이 늘 학수고대하고 있다. 남부면 전 중학생들이 거의 다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남부면 학생들의 축제인 '길거리 농구대회' 3회째 실시하고 있으며 학생들을 묶어내는 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넷째로 다대교회 학생들을 중심으로 풍물팀인 '울림터'를 운영하고 있다. 국악을 통한 선교활동을 펼치고자 함이며 많은 출연 요청으로 학생들이 즐거워 하면서 열심히 하고 있다.

다섯째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한번씩 농사강연을 열고 있다. 작년에는 자연농업학교의 조한규 장로를 초청했었고 올해는 태평농업으로 유명한 이영문씨를 초청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환경농업을 농촌교회의 중요한 선교활동으로 삼고 전개하고 있다.

여섯째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해마다 한번씩 지역주민 교양강좌를 열고 있다. 그동안 다녀간 강사들 중 요즈음 유명 인사가 된 구성애 선생을 5년 전에 초청하여 자녀들의 성교육에 대한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유태인의 천재 교육이란 제목으로 건국대 교수인 류태영 박사를 초청하여 강의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으며, 가나안 농군학교 교장인 김범일 장로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으며 큰 도전을 받았는데, 그 때마다 남부면 전체 주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곤 하였다. 우리 지역의 정신적인 메카로써의 역할을 앞으로도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일곱째  YWCA와 연대해서 '아나바다장터'를 열어 지역 주민들이 물건(옷,책,신발 등)들을 서로 바꾸어 쓰고 나누어 쓰면서 자원 재활용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필요치 않은 물건은 내어놓고 필요한 물건은 바꾸어 가는 장터로써 열어보면 참 재미있으며 의미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에서는 해마다 '전국농어촌교회 지도자세미나와 사모세미나'를 격년제로 해서 개최하고 있다.  이 경비(년 4백만원)는 전적으로 부산 대성교회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부산 대성교회는 필자의 농민선교에 뜻을 같이 하고 농촌교회를 단순히 구제하는 차원에서의 지원이 아니라 선교 정책적인 차원에서 전적으로 후원해 주고 있는 교회이다. 사실 도시 교회에서 농촌목회자 세미나는 탁상공론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도시교회의 이러한 후원이 절실히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외도 여러 가지 우리 교회의 선교 활동들이 있지만 특징적인 것을 간추려 적어 보았다. 사실 내어놓기가 부끄럽기 그지 없다. 하지만 이런 목회 경험을 이야기하고 서로 나눔으로서 더 낳은 농민선교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리해본 것이다.    

맺는 말

21세기는 새로운 목회의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구시대적인 안일한 목회 패턴으로는 21세기를 열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통일한국의 내일을 준비할 수 없으며, 그러한 교회는 도태되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농촌)교회의 농민선교는 농업을 하나님과 연관시킨다든지 혹은 생명구원의 선교 사역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교의 수단으로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농사일을 돕거나 일회적인 농산물 판매 알선 정도에 그쳤으며, 이런 일들을 통하여 농촌교회가 자립하고 성장하는 일에 도움이 되면 된다는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이런 구시대적인 목회관념으로는 농촌의 문제와 환경문제, 사회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없다.

먹거리는 생명이요,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원래 흙으로 빚어 만들었기 때문에  흙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거리를 생산하는 곳은 농촌이다. 그래서 농업은 기본이요 생명산업이다. 이 소중한 농촌,농업,땅 즉 생명을 지키고자 것은  이 시대의 농촌교회가 담당해야할 귀중한 농민선교 사역임을 자각하고 이런 측면에서 농민선교의 방향을 잡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의 농촌교회의 사명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것이요,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이다. 사실 이 일이 농민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은가? 모든 농촌교회가 이런 사명을 감당하고 도시교회가 함께 해 준다면 정부도 하지 못하는 농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며 민족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갈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농촌교회는 교인들만의 교회가 아닌 지역교회로써 거듭나야 할 것이며, 도시 교회의 짐이라는 멍에로부터 벗어나 도,농간에 역할 분담하는 농촌교회로써 위상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민선교는 장기목회가 되어야하며 진정 농민 선교만을 위해 삶을 묻어 일할 수 있는 그런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필자의 15년 동안의 농민선교의 경험을 풀어 보았다. 한울타리공동체 및 여러 가지 목회 프로그램이 중요하지만 이것이 목적은 아니다. 이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영성이요, 영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어떤 목회 프로그램도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음을 필자는 늘 실감하고 있다. 특히 공동체운동은 그렇다. 공동체가 영성 훈련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목회 또한 농촌목회의 하나의 대안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각 나름대로 지역의 상황과 교회의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지역에 맞게 창조적 목회를 해야할 것이다.

이제 농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피폐해지는 농촌에 미래가 없다고 할 그 때에 교회는 저들의 소망이 되어야 하며 길을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농촌의 미래는 전적으로 농촌교회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과언이 아니다. 농촌의 어려움은 농촌교회의 새로운 기회요 사명이다. 가는 길이 험난하고 어렵지만 새로운 농어민선교를 감당하고자할 때 새로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 보나콤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5-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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