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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Feb
대자본만 배불리는 한미FTA(서호성)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39.227.146 조회 수: 2566
대자본만 배불리는 한미FTA
저임금-장시간노동-구조조정으로 노동자 쥐어짤 것
서호성(seogija@hanmail.net
향린교회한미FTA대책위원회 회원
월간 「노동세상」 편집팀장)
설 연휴 동네 뒷산 길을 통해 북한산에 올랐다. 뒷산 꼭대기에 거의 올랐을 때 작은 아들이 돌멩이 같은 것을 들고 와서 “아빠, 호랑이 닮았지요?”한다. “그렇구나!”하고 자세히 보니 돌멩이가 아니라 시멘트 블록 깨진 거다. ‘아, 그렇지! 여기 산꼭대기까지 판잣집들이 많았지….’ 나무들이 제법 숲을 이루고 있지만 곳곳에 그 때 집터가 눈에 띈다.
오랜만에 가 본 어린 시절 살던 달동네
어린 시절 이곳 달동네에서 뛰어 놀던 기억이 밀려왔다. 가난한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나무판자나 왕모래 섞인 시멘트 블록으로 벽을 만들고 루핑으로 지붕을 덮었다. 공중변소(공동화장실), 공동수도 생각도 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가난한 농부들이 그랬듯 형과 큰누나를 안고 업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이곳에 와서 손수 집을 지으셨다. 그 후 아버지는 평생 노점상을 하며 단속반에 쫓겨 다니셨고, 형과 큰누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기술이 최고라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공장으로 들어가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기위해 청춘을 바쳤다.
그 때 부모님이 산 좋고 물 좋은 고향을 등져야 했던 것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낮은 쌀값을 기초로 급속한 경제개발을 추진, 농촌 경제가 피폐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만 400여만 명, 특히 1966년에서 1970년 사이에는 연평균 60만 명의 농민이 농촌을 떠났다. 이들 이농민들이 도시 변두리에 판자촌을 형성하고, 공장 노동, 일용노동 혹은 실업 내지 반실업 상태로 비참하게 생활했다.
한미FTA로 또 다른 형태 달동네 우려
아들에게 “예전에 여기 집들이 많았단다.”했더니 “100년 전에요?”한다. “아니, 30년 전….” 그리고 이 말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어쩌면 머지않아 또 다시 여기에 판잣집이 들어설지도 모르겠구나.’
그 순간 내 눈에 달동네 판잣집들이 어른거렸던 것은, 노무현 행정부와 통합신당, 한나라당 등 보수 세력들이 “2월 임시국회 때 한미FTA 비준안을 처리하겠다”고 한 보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미FTA가 발효되면 가뜩이나 위험수위인 노동자 실업률이 가파르게 높아지고, 여기에 농업이 무너져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농촌인구마저 도시로 몰려와 도시빈민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노동자 임금은 더욱 싸질 테고, 일하는 시간은 더욱 늘어날 테고, 걸핏하면 해고를 당할 것이다.
요즘 시대에는 이렇게 높은 산꼭대기에 판잣집을 짓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도시 곳곳에 있는 새로운 빈민 거주지인 고시원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겠지. 안타깝게도 고시원에서는 가족생활이 불가능 하겠구나….
모처럼의 가족 산행에도 불구,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나의 생각이 부질없는 피해망상일까?
실업률 상승, 농촌 붕괴, 양극화 ‘불 보듯’
94년 미국과 FTA를 체결(NAFTA)한 멕시코의 경우 99년 경제활동인구 중 20%가 실업자였고 최저임금은 87년에 비해 56% 줄었다. 96년 65%의 멕시코 노동자들(2억2673만 명)은 사회보장, 휴가, 보너스 등의 형태로 지급되는 임금 외 수당을 받지 못했고, 1000만 명의 아동이 노동에 시달렸다. 80년 대 초반 국내총생산 대비 노동수입은 40% 이상이었지만, 2000년에는 18.7%로 크게 떨어진 반면, 자본수입은 82년 48%에서 2000년 68%로 급증했다. 유엔이 발표한 2005년 멕시코의 지니계수(소득 분포의 불평등도를 측정하기 위한 계수. 0에 가까우면 소득 분포가 평등하고 1에 가까우면 불평등하다고 판단)는 0.55로, 0.57을 기록한 아프리카 최빈국 짐바브웨와 비슷한 수준이다.(2006년 3월17일자, 7월10일자 프레시안)
멕시코와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미FTA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사실은 비록 축소 왜곡됐을망정 한국정부 자료에서도 일부 드러난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입수한 산자부의 ‘시장개방에 따른 구조조정 지원 소요액 추산’(2005년11월) 보고서에 따르면 한미FTA가 발효되면 제조업에서 최대 6만7806명, 최소 7793명이 실직한다. 그나마 이 보고서는 ▲자동차․부품, ▲석유제품, ▲금속제품, ▲기계장비, ▲철강, ▲기타제조업 등의 실직자가 0명이라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를 반영하고 있어, 실제 실직자수는 보고서의 추정치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정부는 이렇게 축소된 용역보고서조차 공개하지 않고 오히려 한미FTA로 10만 여개의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거짓말했다.
노동기준강화는 무역보복 위한 구실일 뿐
일부에서는 한미FTA로 한국의 노동기준이 나아지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있다. 미국이 추가협상에서 한국 노동기준을 국제기준에 맞춰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이 얼마나 음흉한 나라인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미국은 한국 노동기준을 향상시키는 척 하며 이를 구실로 한국 자동차에 관세혜택을 주지 않을 수 있는 구멍을 만들었다.
먼저, 한국은 물론이지만 미국도 국제노동기준을 지킬 의지가 없는 나라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국제노동기구(ILO) 회원국이라면 상식적으로 비준해야 할 4개 분야(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아동노동, 차별금지)의 8개 핵심협약이 있다. 이 중 한국은 4개, 미국은 고작 2개만을 비준하고 있다. 30개 회원국 가운데 22개국이 8개 모두 비준했고, 체코(7개), 일본․호주․뉴질랜드․멕시코(6개), 캐나다(5개)만이 일부 비준한 사실을 보면 한국과 미국의 열악한 노동기준이 단번에 드러난다(한미FTA반대 범국민운동본부).
이와 함께 한미FTA 협정 서명본 19.2장에 노동기준강화를 무역보복과 연계시킬 수 있는 조항이 추가됐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협상을 시작할 당시 원본에는 이 조항이 없었다. 미국은 이 조항을 이용해 한국 노동기준을 핑계로 무역보복을 할 수 있다. 한미FTA가 발효되면 미국은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ILO 노동기준을 준수하지 않아 인건비가 낮아졌고, 이 때문에 가격경쟁력이 좋아져 자국 산업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 무역보복, 즉 관세혜택을 주지 않겠다고 할 게 뻔하다(송기호 변호사).
미국 다국적기업만을 위한 한미FTA
한미FTA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에게뿐 아니라 미국 노동자들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미국노총(AFL-CIO) 위원장 존 스위니(John Sweeney)씨도 “한미 FTA는 노동자의 권리와 환경에 대한 보호를 미약하게 하고, 공공의 이해를 조절하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의 능력을 저해하며, 다국적 기업의 투자와 이익을 강력하게 보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노총산별회의의 제프 보그트 정책국장도 “한미 FTA 체결은 분명히 이익을 발생시키지만, 그 과실은 한국 노동자는 물론 미국 노동자에게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양심’이라 불리는 노암 촘스키는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 창 펴냄)란 책에서 “(그게 무엇이든)새로운 무역협정의 목표는 투자자, 달리 말하면 다국적 기업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하고 증대시키는 데 있다. 각국 정부는 모든 협상을 비밀리에 진행한다. 국민이 반대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 단언했다.
그들의 ‘국익’, 우리 국민 국익과 달라
노무현 정부와 통합신당, 한나라당 등 보수세력들은 ▲미국에 FTA를 구걸하기 위해 ‘광우병 쇠고기’, ‘약값’, ‘스크린쿼터’, ‘배출가스기준 완화’ 등 소위 ‘4대 선결조건’을 본격적 협상 전에 모두 내주고, ▲부시정부가 미국 의회로부터 위임받은 무역촉진권한(TPA) 시한 마감일에 맞춰 협상을 졸속 진행하더니, ▲절대 안한다던 재협상도 미국 요구에 따라 진행하고, ▲미국 대선 전에 한미FTA를 마무리해야 한다며 국회 비준을 서두르고, ▲국회비준을 앞두고서도 협상 내용조차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한미FTA 협상은 미국사람들과 우리나라에 있는 ‘미국사람들’이 벌였다는 말이 있다. 또 한미FTA 서명본에 독도 인근 배타적 경제수역과 대륙붕에 대해 한국의 영유권을 부인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주장(송기호 변호사)도 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그들의 ‘국익’이 한국국민의 이익과 같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