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시작 (막1:1-8)
이번 주부터는 4복음서를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만 하니까 마가, 누가 요한이 싫어도 하고
우리가 이미 봄에 공부한 대로 각 복음서의 관점이 조금씩 달라서
각기 다른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복음서만 공부하게 되면 다른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풍성함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모르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가 설교에 능하지 못하고 말이 어눌해도 열심히 설교 준비하고 할테니
여러분들도 집중해서 4복음서의 각기 다른 영성과 관점을 살펴보면서
우리 예수님을 더욱 깊이, 바로 알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짧은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가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많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처럼 예수님을 미화해서 표현하지도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처럼 예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단순하게 그리고 직설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가복음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단순히, 섬김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들은 마가복음의 중심 구절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10:45)"고 주장하는데
이 말처럼 그의 삶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예수님의 12제자는 아닙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께 대하여 배운자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마가는 열두 살 가량의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믿게 되었습니다.
첫째 마가는 베드로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마가를 자신의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둘째 마가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배웠습니다.
마가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였는데 집을 자주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내 주었습니다.
이곳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을 때 성도들은 이것에 모여서 기도하였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도, 사도행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은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이런 관계로 마가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생하게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마가는 바나바와 바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외삼촌인데 바울과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할 때
마가를 데리고 갔고, 그 후에 마가는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에는
바울에게 가서 바울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마가의 배경으로 마가의 신앙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마가 다락방의 신앙, 마리아의 헌신적인 신앙,
바나바와 바울의 따뜻하고 열정적인 신앙,
어릴 적에 본 십자가의 신앙 이것이 마가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어느 복음서보다도 더 생명이 있습니다. 더 열정적입니다.
더 단순합니다. 더 뜨겁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삶이요,
가르침이 아니라 행함이요, 생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마가복음을 통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고 닮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마가는 이러한 신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앙을 형성한 후에
보고 배운 바를 자신의 삶에만 흔적을 남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붓을 들어 주를 알지 못하는 무수한 이방인들을 위하여
마가복음을 기록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약한 자들, 나보다 못한 자들을 염두에 두며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누는 삶을 실현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러한 마가의 모습을 본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기도와 눈물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가 뒤에 베드로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내 모든 삶의 모습들로 복음을 전하고
은혜를 흘려 보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처음 시작하면서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1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막1:1)
이 말씀만 보아도 마가의 성격을 알 수 있겠지요.
꾸미기를 싫어하고 간결한 문체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늘에 계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이 땅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지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시고 우리들처럼 사람으로 사셨던 주님을 말하는 단어가
예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분은 나와 같이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을 겪으셨으며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아픔을 경험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삶을 충분히 경험하신 까닭에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사람들을 아신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을 경험하시면서 사람들을 아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자라는 뜻이지요.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죄인을 위해
내어 주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처음 시작하는 1장 1절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압축하여 한마디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많으나, 적으나 그는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듣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농부들에게는 좋은 값을 받고 농산물을 팔게 되었다는 말이 참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이겠지요.
그런데 참으로 복된 소식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었던 죄와 사망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다는 소식보다 더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소식은
전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주시는 소식 이외에는 다 가짜요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소식만이 참된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이 복음의 자유가 여러분의 삶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복된 소식이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야 합니까?
첫 번째로는 말씀이 주어져야 했습니다.
2절은 말하기를 ‘이는 선지자 이사야’라고 말하면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역사하실 때는 항상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말씀으로 약속하시고, 말씀으로 명령하시고, 말씀을 보내사 우리를 위로하십니다.(시107:19-20)
예수님의 능력과 생명이 우리 안에 복음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구약의 무수한 사람들을 통해
말씀들을 허락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딱딱하고 굳은 심령에 복음으로 새 생명이 움돋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 안에 임해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사 말씀을 듣게 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에 반응하게 하시며 순종하게 하실 때
마침내 우리는 풍성한 복음의 능력을 맛보며 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말씀 앞에서 겸손히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말씀의 권능을 인정하여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아멘으로 화답하는 역사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말씀 앞에서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거룩한 순종의 역사가 있을 때 마침내 예수님은 잉태되고
그분의 은혜와 생명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자신을 일컬어 소리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의미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껍질에 불과하고 오직 예수님이 알맹이요 의미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가운데 서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없는 광야로 나갑니다.
그런데 그가 오직 복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예수로 충만하매
사람들이 광야로 나옵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예수의 소식, 하나님의 뜻을 듣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몰려 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색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도자가 먼저 말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거룩한 헌신이 뒷받침될 때
그의 말은 비록 광야에서 들리는 소리였으나
무수한 사람들의 심령에 파동을 일으키며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요한과 같은 사람입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무수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세상 속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요한처럼 오직 예수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더 묵상할 것은
요한은 자신이 증거하는 말씀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절제하고 통제하였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버립니다.
외동 아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요를 거부합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 모진 바람에 자신을 맡긴 체로
자신의 삶의 어느 한 면도 복음의 거침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말과 그들의 삶을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증거자의 삶을 참으로 중요한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를 위해, 내 이웃의 구원을 위해 나의 삶을 절제하고
이방인들을 위해서라면 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 말하던 바울처럼
오직 복음의 도구로 내 모든 것이 사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실 그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되길 축원합니다.
이러한 삶과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열심은 마침내
마가가 말하는 생명과 열정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마가가 경험한 마가가 말하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을 경험하며 맛보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번 주부터는 4복음서를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만 하니까 마가, 누가 요한이 싫어도 하고
우리가 이미 봄에 공부한 대로 각 복음서의 관점이 조금씩 달라서
각기 다른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복음서만 공부하게 되면 다른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풍성함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모르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가 설교에 능하지 못하고 말이 어눌해도 열심히 설교 준비하고 할테니
여러분들도 집중해서 4복음서의 각기 다른 영성과 관점을 살펴보면서
우리 예수님을 더욱 깊이, 바로 알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짧은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가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많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처럼 예수님을 미화해서 표현하지도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처럼 예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묘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단순하게 그리고 직설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가복음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단순히, 섬김으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들은 마가복음의 중심 구절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10:45)"고 주장하는데
이 말처럼 그의 삶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예수님의 12제자는 아닙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께 대하여 배운자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마가는 열두 살 가량의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믿게 되었습니다.
첫째 마가는 베드로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마가를 자신의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둘째 마가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배웠습니다.
마가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였는데 집을 자주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내 주었습니다.
이곳이 우리가 소위 말하는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을 때 성도들은 이것에 모여서 기도하였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도, 사도행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은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이런 관계로 마가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생하게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마가는 바나바와 바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외삼촌인데 바울과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할 때
마가를 데리고 갔고, 그 후에 마가는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에는
바울에게 가서 바울의 수종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마가의 배경으로 마가의 신앙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마가 다락방의 신앙, 마리아의 헌신적인 신앙,
바나바와 바울의 따뜻하고 열정적인 신앙,
어릴 적에 본 십자가의 신앙 이것이 마가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어느 복음서보다도 더 생명이 있습니다. 더 열정적입니다.
더 단순합니다. 더 뜨겁습니다. 이론이 아니라 삶이요,
가르침이 아니라 행함이요, 생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마가복음을 통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고 닮아가기를 소원합니다.
마가는 이러한 신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앙을 형성한 후에
보고 배운 바를 자신의 삶에만 흔적을 남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붓을 들어 주를 알지 못하는 무수한 이방인들을 위하여
마가복음을 기록합니다.
은혜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약한 자들, 나보다 못한 자들을 염두에 두며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누는 삶을 실현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러한 마가의 모습을 본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기도와 눈물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가 뒤에 베드로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내 모든 삶의 모습들로 복음을 전하고
은혜를 흘려 보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처음 시작하면서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1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막1:1)
이 말씀만 보아도 마가의 성격을 알 수 있겠지요.
꾸미기를 싫어하고 간결한 문체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늘에 계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이 땅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지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시고 우리들처럼 사람으로 사셨던 주님을 말하는 단어가
예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분은 나와 같이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을 겪으셨으며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아픔을 경험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삶을 충분히 경험하신 까닭에 요한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사람들을 아신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을 경험하시면서 사람들을 아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자라는 뜻이지요.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죄인을 위해
내어 주시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처음 시작하는 1장 1절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압축하여 한마디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많으나, 적으나 그는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듣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농부들에게는 좋은 값을 받고 농산물을 팔게 되었다는 말이 참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좋은 소식이겠지요.
그런데 참으로 복된 소식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었던 죄와 사망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다는 소식보다 더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소식은
전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가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주시는 소식 이외에는 다 가짜요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소식만이 참된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이 복음의 자유가 여러분의 삶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복된 소식이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야 합니까?
첫 번째로는 말씀이 주어져야 했습니다.
2절은 말하기를 ‘이는 선지자 이사야’라고 말하면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역사하실 때는 항상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말씀으로 약속하시고, 말씀으로 명령하시고, 말씀을 보내사 우리를 위로하십니다.(시107:19-20)
예수님의 능력과 생명이 우리 안에 복음으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구약의 무수한 사람들을 통해
말씀들을 허락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딱딱하고 굳은 심령에 복음으로 새 생명이 움돋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 안에 임해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사 말씀을 듣게 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에 반응하게 하시며 순종하게 하실 때
마침내 우리는 풍성한 복음의 능력을 맛보며 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말씀 앞에서 겸손히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말씀의 권능을 인정하여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아멘으로 화답하는 역사 있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말씀 앞에서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거룩한 순종의 역사가 있을 때 마침내 예수님은 잉태되고
그분의 은혜와 생명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자신을 일컬어 소리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의미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껍질에 불과하고 오직 예수님이 알맹이요 의미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가운데 서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없는 광야로 나갑니다.
그런데 그가 오직 복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예수로 충만하매
사람들이 광야로 나옵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예수의 소식, 하나님의 뜻을 듣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이 몰려 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장소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색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도자가 먼저 말씀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거룩한 헌신이 뒷받침될 때
그의 말은 비록 광야에서 들리는 소리였으나
무수한 사람들의 심령에 파동을 일으키며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요한과 같은 사람입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무수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세상 속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요한처럼 오직 예수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더 묵상할 것은
요한은 자신이 증거하는 말씀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절제하고 통제하였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버립니다.
외동 아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요를 거부합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 모진 바람에 자신을 맡긴 체로
자신의 삶의 어느 한 면도 복음의 거침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말과 그들의 삶을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증거자의 삶을 참으로 중요한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예수를 위해, 내 이웃의 구원을 위해 나의 삶을 절제하고
이방인들을 위해서라면 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 말하던 바울처럼
오직 복음의 도구로 내 모든 것이 사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실 그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되길 축원합니다.
이러한 삶과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열심은 마침내
마가가 말하는 생명과 열정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마가가 경험한 마가가 말하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을 경험하며 맛보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