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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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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nacom.or.kr/sermon/2003_8_24.mp3가다라 지방에서의 예수님의 영적 권위는 사탄도 지배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의 사람들은 물질적 손해를 입자 예수님께 떠나시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주님은 다시 배를 타고 본(本) 동네인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여기 본 동네라고 함은 이곳이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시자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신적 권위와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2:1-12)과 누가복음(5:17-26)에 비해 압축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사람들의 믿음의 행위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면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였습니다.

죄로 얼룩진 인생에게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통 중풍병은 노후에 많이 찾아오는 것인데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소자야'라고 하신 말씀을 볼 때 상당히 젊은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풍병의 상태도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라는 표현을 볼 때 아주 심한 상태였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만난 인생들에게 한가지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예수님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 한 분만이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함께 교독한 본문을 통하여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시는 예수님을 만나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1.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

가버나움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느 집에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문 입구가 막힐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중풍병자는 네 명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질병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왔으나 도무지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침상 채 달아 내렸습니다.
집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흙먼지가 날리고 지붕에서 침상이 내려오니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저들의 행동이 무례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의 문제만 생각하는 염치가 없는 자들이라고 비난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물도 헤치고 나올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지붕을 뚫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은 저들의 갈급한 심령의 상태를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적극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기적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장애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저들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기의 이성으로 돌아가고, 경험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똑한 체 하며 합리적인 방법을 추구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인생은 참으로 부질없는 일을 하고 맙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하면 안 되는 것 같지만 반드시 되고 맙니다.
믿음으로 하면 죽는 것 같지만 살아납니다.
믿음으로 하면 망하는 것 같지만 흥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은 단합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적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한다 할지라도 믿음이 좋은 친구가 내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2절)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 '안심하라'는 말씀은 죄책과 불안으로 살아온 인생에게 평화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보고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기적을 행할 수 있어도, 결코 죄사함의 선포는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어 버린 인생을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엡2:1).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롬8:2).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문제는 먹을 것이 아닙니다. 입을 것도 아닙니다. 주택문제도 아닙니다. 돈의 문제도, 직업의 문제도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다툼과 전쟁이 있고, 불행이 있고, 결국 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죄의 문제를 숨기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죄 문제는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평안을 얻을 수 있고, 기쁨을 얻을 수 있고,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위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가면을 벗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죄를 숨기려고 해도 죄의식이 여러분을 끊임없이 괴롭힐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죄 용서 받은 자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왜 많은 사람들이 술과 도박과 마약에 빠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현실 도피의 방편이요,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몸짓입니다.
또한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용서 받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중풍병자를 걷게 하시기 전에 죄문제를 취급하셨습니다.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면 중풍병에 걸려서 걷지 못할 때보다 더 많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심비에 새겨지길 축원합니다.

2. 사람의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에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도전을 하였습니다.
서기관은 바리새인과 함께 종교적으로는 완벽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24:25)라고 책망하셨습니다.
27절에서도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교활하고 가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겉모습은 지적으로 보이고 고상한 것 같은데 우리의 속은 참으로 더럽습니다. 시기와 질투, 탐욕, 증오심, 악한 생각들이 그칠 줄 모르고 솟아나고 있습니다.
고부간의 관계, 부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친구관계 등을 통해 얼마나 많은 지옥 생활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신앙이 없으면서도 신앙이 있는 것처럼 종교 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욕심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욕심으로 가득찬 우리는 아닙니까?
돈에 관심이 없는 체 하면서 돈에 눈이 먼 우리는 아닙니까?
사랑을 노래하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미움으로 가득 차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속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에 너무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가? 어떤 집에 살고 있는가? 어느 학교 출신인가? 그 사람의 배경이 좋은가? 등등 갖가지 외적인 요소를 보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능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오실 메시야가 유대 땅에 오셨지만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메시아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신앙적 편견, 믿음과 동떨어진 고정관념 때문에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축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축복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걸고넘어지는 사람은 언제나 걸고넘어지는 기질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모든 것이 좋지 않게 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향해 신성모독을 하는 자로 속으로 욕하였습니다.
그래서 4절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보고 계십니다.
시편 139편 1절에서 4절까지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9-10)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못하는 서기관들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보통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 쉬울 것입니다. 어떤 증거가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것은 능력이 없으면 거짓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죄사함의 문제'가 더 컸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권세'에 시비를 거는 서기관들 앞에서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요, 또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분임을 증명한 사건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처음부터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신앙을 체험한 사람의 경건의 모습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람은 방자히 행동하는 자요, 교만한 자입니다.
또한 무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도가 겪는 모든 일의 결국은 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게 있어서 지상 최대의 뉴스는 죄사함의 소식입니다.
죄 문제는 인간이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주님 앞에 선 사람 중에는 중풍병자처럼 문제를 가지고 와서 문제를 해결 받는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서기관처럼 매사에 따지고, 부정적인 사고로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의 베푸신 기적 앞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사함의 은총을 받은 성도라면 이제는 행동하는 믿음으로 인생의 문제를 주님께 가져감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만을 돌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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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8월 3일 오후 새초부터 새말까지

  11. 8월 3일 오전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12. 2003년 7월 27일 오전 백부장의 믿음

  13. 2003년 7월 27일 오후 하나님의 요구

  14. 2003년 7월 20일--손을 내밀어

  15. 2003년 7월 13일 오전

  16. 2003년 7월 13일 오후

  17. 2003년 7월 6일 오전

  18. 2003년 7월 6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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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003년 6월 29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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