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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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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nacom.or.kr/sermon/2003_9_7.mp31. 요한의 제자들
해 아래 새 것이 없지만(전1:9)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놀랍고도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이 살아오던 삶의 방식과는 너무도 다른
주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들을 바리새인이라고도 하고(눅5:33)
마가복음은 혹은 어떤 사람이 라고 두리뭉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주님 앞에 금식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은
무리 였는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어울려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은 어쩌면 가까이 할 수 없는 무리였는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금식을 강조하는 형식주의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있었나 봅니다.
바리새인의 금식 생활은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요한과 그의 제자들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요한에 대한 묘사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극단적인
청빈과 금욕의 생활을 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 산 사람이 요한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한의 제자들 역시 금욕적인 삶의 형태를 가졌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은 일 주일에 두 번씩(월, 목요일) 금식하였고
민족의 큰 절기(속죄일, 부림전 전날, 예루살렘 함락일인 아빕월 9일)에 금식하였으며 누가의 말을 통해서 본다면 그 외에도 수시로 금식했다고 합니다.(눅18:12)

더군다나 지금 요한은 감옥에 투옥된 상태였습니다.(마4:12)
그러니 요한의 제자들은 더 금식하며 기도에 전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스승이 오실 그이로 소개하였던 예수님이
자신들의 보기에는 능력을 행하고 말씀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기는 하지만
생활 면에서는 영 경건해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특히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며
강조하는 금식생활에 있어서는 영 볼게 없더라는 거죠
이렇게 되자 자신들의 스승에 대한 도리와 우리 스승이 더 경건하지 라는 생각에서
혹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스승보다 예수님이 더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로 괴로워 하다가 나와서 금식으로 주님을 꼬투리 잡은 것입니다.

이들은 묻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금식하는데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2. 예수님의 답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그릇된 신앙적 편견을 교정하기 위해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인집의 비유
본문 15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주님은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무턱대고 아무 때나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금식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비유하였습니다.
당시 결혼식의 축제는 일주일간 열렸습니다.
이 잔치 기간에는 금식의 날이 와도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대적 규례를 통해 예수님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곧 영적인 신랑인데 나와 함께 이 축제에 참여한 제자들이
금식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말씀을 통해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보게 됩니다.
먼저,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크나큰 기쁨과 회복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혼인 잔치 자리에서 신부와 신랑이 맛보는 것과 같은 감동과 감격이 넘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거듭남을 경험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에서는 맛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자유와
생명과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8-9장에서 그 해방의 감격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둥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다시금 회복되고, 중풍병 걸렸던 사람이 제 발로 걸어다니게 되는가 하면 귀신들려 죽어가던 사람이 새생명으로 회복되어 주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날 때 엄청난 천국의 자유와 생명을 맛보게 됩니다.

두번째로, 이 기쁨을 빼앗길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금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큰 기쁨과 은혜 가운데 살아가지만
세상은, 마귀는 우리가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시기합니다.
그리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서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자유를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마귀는
지금도 우리 사이에서 살아 역사하며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들 가운데 흘러가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 생명을 누리지 못하다록 끝없이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도
죽이고 도적질 하고 멸망시키는 사단의 계략에 넘어가
하나님을 향한 첫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동을 잃어버린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 대로 금식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식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다시금 불 일듯 일어나게 하여
주님을 향한 거룩한 열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일에 치우쳐 주님의 일을 빼앗겨 영적인 기쁨과 힘을 잃었을 때는
금식과 기도로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끊지 못하고 있는 죄의 습관 때문에
초라한 자신을 발견할 때 금식 기도로 승리해야 합니다.
세상적 쾌락으로 삼손처럼 힘을 잃었을 때
금식함으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생베 조각
본문 16절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평범한 진리를 이용해 깊고도 심오한 영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낡은 옷에 구멍이 났을 때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기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베 조각이 물에 젖으면서 수축해지면
오히려 옷을 더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낡은 옷'은 구약의 율법을 오해하여 타락한 당시의
유대 율법주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생베 조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금식의 문제보다 이제 더 깊은 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꿰매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신앙은 타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혼합주의, 혼합종교를 경계해야 합니다.
유교적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기독교로 덧칠하는 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불교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생각에 젖어 있으면서
적당하게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복을 누리려는
혼합주의를 우리는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행4:12).
우리는 옛 형식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기워 입지 말고 과감히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도는 형식만 변해서는 안됩니다.
겉모습만 경건의 모양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성품이 변해야 합니다.
본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새 포도주의 비유
본문 17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발효 작용이 아직 되지 않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될 때 낡은 부대는 터져 둘 다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새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 포도주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된 음료인 예수를 가리킵니다(고전11:25,행2:13).
또한 여기 '새 부대'는 거듭난 성도를 의미합니다.
종교적 아집과 교만으로 형식에 매여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저들에게는 그리스도 때문에 낡은 부대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수용할 부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변화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옛 것인 중풍병자에게 영육의 고침으로 사용된 새 포도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갈증을 만난 옛 것인 세리와 죄인들에게
사죄의 은총으로 가슴을 시원케 하는 새 포도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옛 것인 종교적 형식주의인 금식의 굴레에서 사람들을
혼인집으로 인도하는 새 기쁨의 포도주입니다.
우리는 새 포도주의 은혜를 받으려면 옛 사람의 행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우리에게는 기도 생활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점점 자신의 부대가 낡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앞에 복종시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우리의 부대는 날마다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일에 게을리 하는 동안
우리의 부대는 낡아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낡은 부대가 되어,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부담이 되고, 힘이 들고,
신앙 생활에 기쁨을 잃고 맙니다.

우리는 오늘 바리새인과 같이 종교적 형식과 종교적 오만에 가득찬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보았습니다.
저들은 옛 것만 고집하고 새 것을 배척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고, 낡은 옷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성도는 결코 외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근본이 변해야 합니다.
낡은 부대는 버리고 새 부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변화로
예수님으로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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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03년 7월 27일 오전 백부장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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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03년 7월 20일--손을 내밀어

  15. 2003년 7월 13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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