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27 09:44
[이색화제] 농사꾼 정경식의 공생농법·순환농법
"벌레도 잡초도 다 생명입니다"
농사꾼이라면 원수처럼 생각하는 벌레, 잡초와 함께 농사를 짓는 농부. 전북 부안의 정경식씨(41)는 2000평 밭에 100가지 작물을 재배하며 먹을 것 빼고는 모두 땅으로 되돌려준다. 논벼에 비해 수확량이 적다는 이유로 멸종위기에 처한 밭벼를 되살리고 보급하는 일도 한다. 그가 농사에 한(恨) 맺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20년 넘게 농부로 살아온 이유는….안철환 전국 귀농운동본부 출판기획실장
"인 간이 어떻게 잡초나 벌레를 이길 수 있습니까? 잡초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먹으려고 농사 짓는 작물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농사가 1만년 역사를 갖고 있다지만 잡초는 그 이전, 아니 어쩌면 인류보다 더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 손이 가야 자라는 농작물과 달리 잡초는 스스로 오랫동안 자신의 생명을 이어왔기 때문에 잡초와의 전쟁에서 사람이 이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벌레도 마찬가지지요. 핵전쟁이 나 인류가 멸망해도 벌레와 잡초는 살아남는다고 했습니다. 벌레만 해도 사람들이 익충과 해충으로 구별하지만 익충이란 육식곤충을 말하고 해충이란 초식곤충을 말합니다. 그런데 보통 초식생물이 온순하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그럼 이런 구별이 왜 생겼겠습니까?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 자신만 편리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생긴 것입니다. 자연에는 그런 구별이 전혀 없거든요.”
20여년 넘게 무농약 유기농사를 지어 온 정경식씨의 농법은 이렇게 잡초와 벌레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농사에 참여하는 또다른 농사꾼으로 삼는 ‘공생농법’이라 하겠다.
정씨 농장에는 대부분 땅이 볏짚과 잡풀로 덮여 있다. 즉 맨땅이 없는 것이다. 잡초도 베어 그냥 그 자리에 깔아준다. 쌓인 짚더미를 들춰보면 지렁이가 우글우글하다. 간혹 쥐구멍 같은 구멍도 있는데, 바로 두더지들이 파놓은 구멍이다. 두더지는 농작물을 파먹기도 해서 농부에게는 매우 괘씸한 방해꾼이지만 정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놈들도 먹고 살아야죠.”
만약 농약을 치면 두더지는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빈대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과 같다는 것이다. 대신 농약을 안 쳐서 땅이 살아나면 두더지뿐 아니라 농사에 유익한 지렁이 같은 놈들도 많이 생긴다. 지렁이는 흙속을 휘젓고 다니기 때문에 항상 땅을 갈아준다. 애써 기계로 갈 필요가 없다. 또 지렁이는 흙을 비롯해 볏짚 같은 유기물을 먹고 부드러운 흙과 유익한 퇴비들을 만들어 준다. 지렁이가 만든 퇴비는 가축들의 분뇨퇴비보다 훨씬 좋다.
정씨 농사를 도와주는 또 다른 벌레는 거미와 무당벌레다. 이놈들은 진딧물이나 그 밖에 병해충들을 잡아먹는 데 그야말로 도사들이다. 정경식씨네 밭 어디를 가도 거미들이 이곳 저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칠성무당벌레도 지천이다.
물론 이런 익충들이 해충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만약 이 해충을 모조리 먹어치우면 나중에는 익충조차 농장을 떠나버릴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좋은 것들만 남기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를 살려주는 데 있다.
그래서 정경식씨는 밭 곳곳에 진딧물해충들이 좋아하는 양배추나 케일 같은 작물을 심는다. 이것들을 배추밭이나 토마토밭에 심으면 진딧물들이 다른 데는 안 가고 양배추와 케일에만 낀다. 일종의 미끼인 셈이다.
이런 정씨의 공생농사는 작물들 상호간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수수나 옥수수는 영양분을 엄청나게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지력을 떨어뜨리는 대표적 작물이다. 반면 뿌리혹박테리아처럼 공중 질소를 고정하는 세균을 갖고 있는 콩과식물은 뛰어난 질소비료 생산능력으로 땅을 비옥하게 한다. 그래서 콩밭에 옥수수를 함께 심으면 옥수수에 따로 비료를 줄 필요도 없고 지력도 보호할 수 있다. 그리고 고추 사이 사이에 들깨를 심으면 들깨 특유의 향이 고추에 생기는 담배나방 벌레를 막아준다.
공생농법에는 잡초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늘밭에 가면 마늘과 냉이가 한 장소에서 서로 사이좋게 엉켜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냉이를 따로 심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냉이가 마늘을 지탱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냉이가 마늘에 기생해서 자라고 있는 듯도 보이지만 이 또한 공생적인 관계다. 상업적 목적으로 단일작물만 농사짓는 사람들이라면 귀찮은 냉이를 다 뜯어버리겠지만 정경식씨는 잡풀조차 작물과 공생관계를 맺어주며 키운다. 그리고 잡초 같지만 냉이는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려주는 아주 고마운 풀이다.
오랫동안 짚과 풀로 덮어놓은 밭은 자연피복 효과가 있어서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잡초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자라는 민들레 돌나물 쇠비름 등은 약용, 식용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일석이조다. 가끔 자연식이요법을 해야 하는 환자들이 무공해 청정풀을 찾아 멀리 정경식씨 농장을 방문하곤 한다.
정경식씨의 공생농법은 곧바로 순환농법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돌려짓기가 그것인데, 돌려짓기의 핵심은 사람이 먹을 것만 거두어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땅에 다 돌려준다는 데 있다. 벼를 수확하면 볏짚은 그대로 땅에 깔며 보리를 거두면 또한 보릿대는 땅에 돌려준다. 그래서 같은 작물을 계속 재배함으로써 영양분이 편중되어 생기는 연작 장해를 피할 수 있다. 나락만 거둬들이고 나머지는 땅에 돌려주므로 영양분이 유지될 뿐만 아니라 다른 작물을 이어심고, 그 짚이나 풀을 또 돌려준다. 그래서 땅에 영양분이 골고루 쌓이게 되는 것이다.
순환농법에서 사람의 똥도 예외일 수 없다. 정경식씨는 5년 전 원래 살던 흙집 위쪽에다 양옥을 지으면서 집안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했지만, 곧 이 신식 화장실을 잠가버리고 옛날에 쓰던 흙집 화장실로 돌아왔다.
“양옥을 짓고나서 보통 후회한 게 아닙니다. 굳이 양옥을 지은 것은 남들이 그렇게 힘들다는 무농약 농사를 짓지만 이렇게 버젓한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죠. 그런데 살아보니까, 양옥이라는 게 다른 것은 둘째 치더라도 순전히 자원낭비, 환경오염의 주범이더라는 겁니다. 널려 있는 장작으로 난방하면 될 일을 보일러를 돌리기 위해 비싼 돈 주고 난방기름을 사야 하고 그게 또 얼마나 공기를 오염시킵니까. 더 아까운 것은 좋은 퇴비로 쓰일 사람의 분뇨를, 그것도 귀한 물을 퍼부어 가며 버리다니 도저히 양심에 걸려서 쓸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당장 화장실 변기 뚜껑을 테이프로 막아버리고 언덕 밑의 재래식 화장실을 쓰기로 한 거죠.”
정씨네 재래식 화장실은 두 칸으로 나뉘어 있다. 한 칸은 사람이 볼 일을 보는 곳이고 옆칸은 똥을 퍼내는 곳이다. 퍼내는 화장실엔 똥 푸는 바가지와 양동이가 항상 대기중이다. 화장실 밑의 구조는 가운데에 칸막이가 있고 맨 아래 조그만 구멍이 있어 똥이 쌓여 밑에서부터 발효된 점액들만 그 구멍을 통해 옆의 퍼내는 칸으로 옮겨가게 되어 있다. 이렇게 숙성된 똥은 매우 좋은 퇴비가 된다. 정씨네 화장실은 동네에서도 유명해서 가끔 이웃들이 퍼가기도 한단다. 화장실은 정씨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원래 이 흙집을 지은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그 지혜가 놀라울 정도다.
정씨는 불편하기만 한 새집을 포기하고 다시 흙집으로 돌아와 살 계획이다. 산에 지천인 잔가지들이나 요즘 시골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폐목을 연료로 하는 흙집은 연료비도 안 들고 공기오염도 적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나오는 재와 목초액이라는 부산물이다. 재는 똥이나 퇴비를 발효시킬 때 아주 유익하게 쓰이고 목초액은 해충을 몰아내는 무공해 농약이자 비료다.
그래서 정씨는 흙집을 보수하면서 특히 목초액을 만들어 내는 굴뚝 장치에 정성을 기울였다. 굴뚝이 시작되는 부분에 항아리를 놓고 그 위로 굴뚝을 연결했는데 항아리 밑에는 굴뚝에서 찬공기를 만나 액화되어 떨어지는 목초액을 받을 수 있게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항아리는 구들의 열이 한번 모였다 나갈 수 있도록 하여 열 효율을 높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또 하나는 연기가 굴뚝에 좀더 오랫동안 남아있게 해서 더 많은 목초액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한 마디로 항아리는 열 효율도 높이고 목초액도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만든 아이디어인 것이다.
이렇게 공생농사, 순환 농사를 하다보니 정씨 농장은 주종목이 없다. 2000평밖에 안 되는 그의 농장에 100 가지가 넘는 작물들이 서로 뒤섞이고 이어가면서 자란다. 아마 이렇게 작은 규모에 그렇게 많은 작물을 짓는 농사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정씨 농장의 또다른 특징은 무논이 없다는 점이다. 모두 밭농사만 한다. 하다 못해 벼조차도 밭에서 키운다. 이제는 잊고 있지만 원래 벼는 물에서 자라는 것과 밭에서 자라는 것 두 종류가 있다. 밭벼는 주로 산간마을에서 짓던 작물로 조선 말까지만 해도 종자가 200여 가지나 됐다. 그러나 다수확정책을 위주로 한, 소위 근대화 농법에 밀려 밭벼는 두 종류밖에 남지 않았다. 수확량이 논벼의 반밖에 안 된다는 이유로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씨는 왜 소출이 적은 밭벼를 고집할까?
“저는 논벼 농사에 회의를 갖고 있었어요. 우선 논벼는 물을 너무 많이 먹습니다. 옛날에는 하늘이 내려주는 빗물에 의존했지만 요즘은 그런 천수답은 사라지고 다 지하수를 퍼올려 쓰거든요. 어떻게 보면 수자원 낭비인 셈이죠. 저희 집에선 수수, 보리, 율무, 통밀 등 예닐곱 가지를 섞은 현미 잡곡밥을 먹고 있어요. 백미만 먹는 주식문화로는 인류가 절대로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봅니다. 백미가 뭡니까? 그것은 쌀 영양분의 65%를 차지하고 있는 쌀 눈이 다 잘려 나간 것이에요. 게다가 30%나 되는 쌀겨까지 벗겨버린 그야말로 쭉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백미를 주식으로 하면 반찬도 많이 먹게 되고 금방 소화가 되니까 세 끼니를 꼬박 챙겨먹어야 됩니다. 저희집은 하루 두 끼만 먹는데 옛날 사람들이 가난해서 두 끼만 먹은 게 아닙니다. 현미 잡곡밥은 소화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영양가도 풍부해서 반찬도 많이 필요치 않고 세끼까지 챙겨먹을 필요가 없거든요.
또 지금의 백미농사는 지하수도 낭비지만 땅도 낭비하는 겁니다. 벼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기간은 6개월도 안 됩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그 땅을 그냥 방치하고 있는 거예요. 뿐만 아닙니다. 백미는 평평한 들녘에서 재배해야 하는데 사실 들녁은 지주들과 땅투기꾼들 덕분에 땅값이 좀 비싸졌습니까? 땅 살 돈을 은행에 넣으면 이자가 더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농사의 경제성도 떨어지지요. 현미 잡곡을 주식으로 하면 보리나 밀, 수수, 율무 등과 함께 이어심기, 섞어심기를 할 수 있어 땅의 효율도 높이고 지력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잡곡 농사를 지으면 쌀이 많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논벼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밭벼는 수확량이 적지만 대신 돌봐주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생명력이 아주 좋아 한번 심어 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잘 자란다. 가끔 풀만 매주면 되는데, 그것도 전에 심은 보리나 밀대로 땅을 자연피복 해주니 별로 자라지 않는다. 그만큼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정경식씨는 이제 갓 40대에 접어든 젊은 농사꾼이다. 하지만 이미 무농약 농사 경력 20여 년의 옹골찬 농사꾼이다. 정씨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무농약 농법을 체화하고 나름대로 공생, 순환의 밭농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20여년이라는 세월이 그에게는 거의 생존을 위한, 나아가 농자(農者)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투쟁 기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농부의 한을 뛰어넘어 농부 본연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그는 남들이 마다하는 농부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
“나는 경남 사천에서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빈농 집안의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리 큰 농사는 아니었으나 형제 모두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농사를 배우며 자랐죠. 우리는 학교 가는 일 빼고는 모든 시간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와 농사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온 식구가 농사에 매달려도 우리집은 항상 가난했고 그런 현실을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놀면서도 저렇게 잘 사는데(당시에는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모두 노는 사람으로 생각했었죠) 뼈마디가 쑤시도록 일을 하는 우리는 왜 가난해야 하는가? 이것인 내 인생의 첫 의문이었습니다.
나는 밝고 건강하게 자라야 할 사춘기에 힘든 농사일과 나 자신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가난에 치여 점점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친구와도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학교 공부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를 마쳤지만 공부라고는 취미도 없었기에 시험도 안 보고 들어갈 수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공부 못 하는 자식에게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공부만 잘하면 논밭 다 팔아서라도 대학교에 보내주겠다는 게 아버지의 일관된 희망이었습니다. 이 힘든 노동과 가난에서 벗어날 길을 아버지는 자식이 공부 잘해서 출세하는 것뿐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겁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자식이었습니다. 누구네 집 자식들은 공부 잘해서 공무원도 되고, 좋은 회사에도 취직하고, 하다못해 기술이라도 배워 공장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번다는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며 야단치곤 하셨죠.
점점 열등감에 빠지게 된 나는 농사말고는 아무 것에도 관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장래 희망도, 취미 생활도, 친한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부 잘해서 도시로 유학 가는 친구들이 얄미웠고 매일 야단만 치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심한 열등감과 반항심으로 나날을 보내면서도, 무언가 한 가지만은 꼭 내 일을 하겠다는 오기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수업 중에 하릴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니,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경식아, 경식아, 산으로 오라, 산으로 오라.’ 나에게는 틀림없이 들렸습니다. ‘그래 나는 산으로 가야해, 산으로…’ 나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이후, 나는 고향 산천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를 부르던 산을 나의 고향 산천으로 생각한 겁니다.
나는 농부가 되는 것은 끔찍하게 여기는 아버지와 격렬하게 싸우며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생활은 거의 투쟁이었습니다. 나는 농사를 못 짓게 하는 아버지의 한, 농사꾼을 무시하는 주변 환경과의 싸움을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아직 어려서인지 아버지의 한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나는 아버지와 싸운 끝에 두 번이나 가출하게 됩니다.
최초의 가출은 고3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하우스 농사를 지을 때였습니다. 저 혼자의 힘으로 농사 지을 계획을 갖고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비닐 하우스를 짓기 위해 용돈을 모은 돈으로 비닐을 사고 골조는 돈이 없어 산에서 대나무를 캐다 직접 지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아버지 몰래 밤에 나가 토마토, 오이, 무 등 여러 가지 작물들을 진짜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언젠가는 나의 노력을 인정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열심히 했죠. 학생인 나에게는 적지 않은 수입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그저 아르바이트 하는 것이려니 했는지, 아니면 농부가 되지 말라는 잔소리가 더 이상 귀찮았는지 아무 관심도 안 가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아버지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점점 언짢은 표정을 지으시더니 어느날 노발대발하며 저를 무조건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놈아, 우리 동네에서 네 또래가 열 명이나 되는데, 너말고 단 한 명이라도 집에 붙어 있는 애가 있는지 봐라. 다들 열심히 공부해서 도회지로 나가 있는데, 너 혼자만 천덕꾸러기가 되어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 야 미친 놈아!’
극도로 흥분하신 아버지는 낫을 들고 하우스로 달려가 그 동안 애지중지 키운 작물들을 무참하게 잘라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단지 농사 짓는 자식이 미워서만이 아니라 농사꾼으로 평생을 살면서 맺힌 한을 폭발시킨 거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온정성으로 키운 작물들을 인정사정없이 짓밟아버리는 아버지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나는 더 이상 고향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하고 대책없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습니다.
그 길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부산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상경자들이 그렇듯이 저도 공장에 들어가 약 1년간 일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그만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기계에 끼어 들어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덕에 군대에도 못 가게 된 데다 보상금으로 받은 50만원으로 가축을 사 다시 고향에서 농사를 짓기로 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하셨지만 그래도 자식이 고생하며 지내다 손가락까지 잘려 오랜만에 돌아온 게 안타깝기도 하고 내심 반가우셨는지 별말씀이 없었습니다. 나는 보상금으로 소 3마리, 돼지 2마리, 염소 20여 마리를 사다 길렀습니다. 나는 마치 카우보이처럼 소 등에 올라 타 염소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열심히 키웠습니다. 소를 타고 다니며 가축을 키우는 내 몰골이 꼴불견이었는지 동네에서는 나를 흉보는 말이 많았습니다. 젊은 놈이 칠칠치 못 하게 손가락을 잘려 군대에도 못가고 도시에서 쫓겨나 꼴사납게 소나 타고 다니며 가축이나 키운다는 그런 눈치들이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이웃 아주머니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내 염소가 콩밭을 다 망쳐 놓았으니 당장 물어내라며 억지를 부렸습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런 모함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또다시 난리가 났습니다. 촌구석에 남아 농사 짓겠다는 것도 못마땅한데 이젠 이웃에 손해까지 입힌다며 그 전보다 더욱 화를 내셨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흥분하셔서 염소고 뭐고 다 때려 죽인다고 하셨습니다. 그 옛날에 열심히 지은 채소들을 박살내버린 것도 서운한데 전후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달려드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이번에는 나도 대들었습니다. 그리고 뛰쳐나와 장대비가 퍼붓는 들판을 염소 떼를 몰며 헤매고 다녔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빗물과 함께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날 그렇게 속내의까지 빗물에 적시며 헤매다보니 염소는 그만 죽은 새끼를 낳았습니다. 거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돼지와 소 값이 폭락하는 파동이 일어 많은 축산농민들이 가축 새끼들을 강물에 던져버리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나는 너무 좌절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와 다투기도,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아가면서 버티기도 힘들어졌죠.
다시 집을 나왔지만 갈 데라고는 부산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노숙자가 되어 깊은 좌절감속에 방황했습니다.
그렇게 한 보름 쯤 지난 어느날 우연히 내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다 준 ‘신동아’라는 잡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잡지 속에는 쟁기질을 하고 있는 노인 사진과 함께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건강한 자나, 건강하지 못한 자나 누구든지 평등하게 함께 살자’ 라는 내용의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풀무원 공동체’이야기였습니다.
나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한 느낌에 젖어 혼자서 주절거렸습니다. ‘맞아! 내가 갈 곳은 이곳이야’라고 말이죠. 막힌 가슴은 탁 트이고 내가 그렇게 찾던 희망을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무작정 경기도 양주로 달음질쳤습니다. 저는 두 번째 가출로 새 인생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20년 전, 1979년의 일이었습니다. 내 나이 21살 때였죠.”
풀무원공동체 생활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다름 없었다. 그곳에선 약 30명의 공동체 식구들이 남녀노소 구별없이 즐겁게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사가 싫어 모두 고향을 등지고 있는 현실과 너무나 달랐고, 농사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자신의 처지에서 볼 때 그곳은 거의 천국이었다.
정씨는 그곳에서 무농약 유기농사를 배웠고, 농약과 비료에 의존한 관행농법이 도시의 공업화를 위한 저곡가 정책과 다수확정책의 일환이라는 것, 그래서 관행농법에 따르면 농촌은 피폐될 수밖에 없으며 농부의 지위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라는 것을 배웠다.
비로소 아버지가 왜 그토록 농부의 삶을 거부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기쁨도 누렸다.
하지만 마냥 그곳 생활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공동체는 농사를 천직으로 하려는 사람에게 천국일지는 몰라도 농부의 한을 풀고 농사의 근본을 회복하기에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의 한이 서려 있는 농촌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제는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던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풀무원 생활에서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다. 단지 갖지 못한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의지가 살아 있었다.
“아버지의 한이 서려 있는 농촌, 자기 자식만은 절대 농사 짓게 하지 않으려는 농촌, 노인네들만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농촌, 뼈빠지게 농사 지어봐야 빚만 남는 농촌, 그래서 희망이란 찾아볼 수 없는 농촌으로 나는 되돌아왔습니다. 비록 재산이라고는 결혼식 때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산 새끼 밴 소 1마리와 송아지 1마리, 닭 3마리, 쌀 2가마, 그리고 호미와 괭이 등 농기구 몇 자루뿐이었지만 이런 가난이 저에게는 하나도 문제될 게 없었습니다.
1983년 제가 들어간 곳이 전북 부안에서 농민운동을 하던 오건씨가 임대한 농장이었습니다. 경상도 사람인 제가 아무 연고도 없는 전라도에 가서 무농약 농사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풀무원 공동체에서와 달리 이곳 땅은 농약과 비료로 다 죽어 있었기에 할 일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었습니다. 농약으로 죽은 땅을 살리는 것은 사실 황무지를 개척하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게다가 가진 돈 한푼 없는데 땅 임대료도 내야 하고 생활도 해야 하기 때문에 전망이 불투명한 무농약 농사를 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농사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맨처음 시작한 것은 주위에 있는 나무 찌꺼기, 마른 소나무 잎, 겨울 억새풀 등을 모아서 작두로 썰어 논에도 깔고 인분과 섞어 퇴비를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손님이 오면 대소변도 아무 데나 보게 하지 않고 인분을 받을 수 있도록 했고, 땔나무는 직접 해서 난방비도 들지 않았습니다.”
“농사도 처음부터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급에 꼭 필요한 식량과 양념류 등 작물을 골고루 심었습니다. 모종은 그럭저럭 탈없이 자랐습니다. 속성 퇴비를 만들어 볏모를 키워 모내기를 끝내고 고추 모종도 키워 밭에 심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죽은 땅이라서 풀매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나는 거의 하루 10시간 이상 밭에서 보냈습니다. 나도 힘들었지만 아내는 더 심했습니다. 아기를 업은 채 밭일을 해야 했고, 업고 일하기가 힘들면 방에다 가두어 두기도 하고, 통에다 넣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서 온종일 풀매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된 나날이 지나면서 벼는 건강하게 자라 이삭이 패면서 나락이 점차 익어가기 시작했죠. 그러나 어느 날 벌레가 나타나더니 잎을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잎은 점차 하얗게 변해갔습니다. 당연히 마을 농민들은 너도나도 서둘러 농약을 쳐댔습니다. 벌레 먹기 전까지는 우리 논을 보고 ‘허허, 농약 안 쳐도 농사 잘 되는구먼’하며 신기해 하던 동네 사람들의 입에서 ‘역시 농약 안 치면 농사가 안 된다니까. 에이 이 사람아, 빨리 농약 사다 치소. 굶어 죽으려고 그러는가? 뼈 빠지게 농사 잘 지어 놓고 벌레 좋은 일 하려고 그러는가?’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래도 농약을 안 치니, ‘저 친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비웃는 말까지 들려왔습니다. 아내와 나는 어찌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알고 있는 벌레 퇴치 방법은 막걸리, 효소, 식초, 그리고 생선 곤 물을 섞어 나락에 뿌려 주는 게 전부였죠. 아주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는 그렇게 많은 벌레가 죽을 리 없습니다.
저는 농약을 절대 안 치겠다는 신념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밤낮으로 정신은 나락에만 가 있었고 쓰러져 가는 나락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벌레도 잡아서 만져 보았죠. 아무리 해충이라지만 벌레도 하나의 생명인데…,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벌레들이 내 몸을 갉아 먹는 것 같아 그냥 볼 수도 없었습니다.
벌레가 나타난 지 5일째 되던 날, 그 동안 침묵하며 나만 보고 있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태영이 아빠! 딱 한 번만 농약 치면 안 될까?’하며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먹고 살 문제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져 하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었던 겁니다. 그 동안 하루 두 끼를 밀가루와 죽으로 연명하며 아무말 없이 나를 따라 준 아내와 앙상하게 마른 자식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가자.가서 농약 한 병 사오자.’ 그 길로 나는 단숨에 십리 정도 되는 길을 뛰어 농약방으로 갔습니다. 얼른 집으로 다시 뛰어와서는 농약을 물에 섞어 분무기에 넣고 다시 단숨에 논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습니다. 10리나 되는 길을 어떻게 뛰어 갔다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농약을 짊어지고 논둑으로 올라갔는지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농약으로 중무장한 채 논둑으로 올라섰을 때가 마침 해가 막 질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붉은 노을 빛을 받으며 유난히도 붉게 빛나는 나락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나락은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나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게 비쳤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나락에 어떻게 벌레가 있을 수 있을까? 하얗게 변한 나락 잎이지만 저에게는 깨끗하게만 보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아무리 병들어 있지만 이 나락들이 바로 살아 있는 생명인데 어찌 독을 뿌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야!’라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순간 내가 미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농약 통을 걸머진 채 논둑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는 논에서 내려와 농약을 산기슭 한쪽 구석에 땅을 파고 묻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온갖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벌레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죠. 단지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나의 욕심으로 생명에 독약을 뿌릴 수는 없다는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체험을 통해 마음에 큰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 나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 병이 번지지 않는 게 아닙니까. 병충해의 주기가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극적인 피해는 잠깐이었습니다. 나락이 스스로 자연 치유를 시작한 것입니다. 자연순환의 법칙은 이처럼 스스로 치유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농약이 벌레를 이기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치유력은 농약보다 훨씬 강합니다. 자연 순환의 법칙은 벌레와 작물이 공생 관계를 이루게 하여 벌레가 먹는 시기를 거치면 또한 먹지 않는 시기를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큰 진통을 겪고 나서야 이런 자연의 법칙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딛고 일어난 후 수확은 해마다 조금씩 늘어났고 맛과 영양도 두드러지게 향상됐습니다. 그리고 기대한 대로 3년여 지나서 저희는 관행농법 못지 않은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됐습니다.”
정경식씨는 그런 고생을 철저한 신념과 의지 하나로 하나씩 극복해 갔다. 그리고 주변의 도움으로 부안에 내려온 지 2년 만에 지금의 땅 2000평을 아주 싼 값에 살 수 있었고 그 후 8년이 지나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모은 3000만원으로 30평이 넘는 어엿한 양옥도 지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는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하여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나중에 군수를 통해 상을 전해받기는 했지만, 자신보다 훌륭한 스승들과 선배들이 많은데 자신이 선정된 것이 송구스러워 상 받으러 청와대에 가지도 않았다.
“나는 무농약 농사와 자급자족하는 삶 속에 농업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아버지는 농부가 되지 말라고 그렇게 절규하셨지만 나는 농업을 통해 희망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꿈이라 해도 좋고 이상이라 해도 좋고 오기라 해도 좋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세상을 향해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습니다. ‘땅을 살리는 자는 땅과 함께 살 것이며 땅을 죽이는 자는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수십 번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통하는 때가 반드시 오리라, 굳은 신념을 가지고 땅을 가꾸는 일에 내 생명을 다 바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86년쯤이었을 겁니다. 그 해에는 유난히 고추밭에 진딧물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모두들 사흘이 멀다하고 농약을 뿌렸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농약을 뿌리지 않은 우리 밭에는 정작 진딧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이상하다. 왜 그럴까?’ 의문을 갖게 됐죠.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농약을 치지 않으니 쐐기와 무당벌레가 와서 진딧물을 잡아먹었던 겁니다. 곧 자연에서는 해충이니 익충이니 구별없이 서로 공생하여 어느 것이든 스스로 자연 치유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농약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을에 유기농법이 퍼져서 지금은 8가구가 유기농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이 마을에서 농민운동을 이끌던 분들이라 한번 마음 먹은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의지가 강한 분들이었습니다. 또한 서로에 대한 신뢰와 단합이 돈독하여 제가 겪은 것 이상으로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 왔습니다.”
“우리는 유기농사를 우리만 할 것이 아니라 전라북도에 보급하자는 계획으로 ‘전북 자연 농실천농민회’라는 모임까지 만들었습니다. 또한 전북 각 지역에서 유기농업을 하고 있는 공동체나 농민들과 함께 ‘전북 자연농실천협의회’를 만들어 농한기에 외부 강사를 초빙해 교육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변산 유기농 영농법인과 부안 정농지회까지 결성하게 되어 유기농을 함께 하는 동지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공해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주에까지 전해져 유기농산물을 구하려는 소비자들이 생산자와 함께 이른바 한울공동체라는 도농공동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울공동체의 조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선 무농약 농산물의 가치를 알아주는 소비자를 만난 일 자체가 큰 기쁨이었고, 또한 판매처가 안정적으로 확보되어 경제적인 의미도 매우 컸습니다. 아마 농부에게 가장 큰 기쁨이란 자신이 재배한 물건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정당한 대가를 서슴없이 지불해 주는 소비자를 만나는 일일 겁니다.”
요즘 정씨는 너무나 바쁘다. 농사도 농사지만 농사 외의 일로 지역과 전국을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정경식씨가 농사말고 하는 일은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와 각 지역의 귀농학교에서 강의하는 것과 지금 살고 있는 변산에 지역학교를 설립하는 것 등이다. 농사 관련 일만 해도 정농회 부안 지회장 일, 지역 유기농 작목반 일, 한울 공동체 일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저러한 일로 정경식씨 집을 찾아 오는 손님만 해도 일년에 400~500명은 쉽게 넘는다고 한다.
농사 관련 일이야 농사 때문에라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귀농학교 강의나 지역학교 만드는 일은 조금 거리가 있는 일이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 짓고 있는 농사 이상으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교육이다. 정씨가 교육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농부가 되겠다는 아이들 때문이다. 자녀에게 농부가 되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일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우고 도우며 자란지라 애들은 자연스럽게 농부의 꿈을 갖게 됐다. 그런데 언젠가 담임교사가 장래 희망을 농부라고 한 아이들을 말리면서 농부가 되려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저는 원래부터 제도교육을 반대했습니다. 제도교육이 뭡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편안히 책상머리에서 펜대 굴리며 돈 많이 버는 게 목표 아닙니까. 그게 성공이고 출세이죠. 그래서 현 제도 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농부를 우습게 여기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육이 내 자식들마저 농촌을 떠나게 만들려 한다 이겁니다. 그럼 내가 왜, 무슨 희망으로 농사를 짓겠습니까? 이렇게 힘들게 농사 지어도 우리 자식들은 다 농촌을 떠날 텐데, 그럼 농업에 희망이 없는 겁니다. 이는 당장 내 농사만 열심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일지 모릅니다.”
큰애를 대안학교인 경남 산청의 ‘간디학교’로 보낸 것도 그런 제도학교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는데, 막상 보내고 보니까 학생이나 선생님 대부분이 도시출신들인데다 학교가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 또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이른바 ‘지역학교’다. 지역학교는 지역 주민들이 운영하며 지역의 자녀들만 다닐 수 있고 나아가 학교 기능만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을 위한 교육과 문화공간으로도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 타지역 사람이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고 싶으면 이 지역으로 이사를 와야 한다. 이런 생각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터에 마침 마을에 있는 마포초등학교가 폐교 조치됐다. 그래서 정씨는 유기생산농가를 비롯한 지역 사람들, 그리고 이 지역에 내려와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 교수와 함께 지역학교 10인 운영위원회를 꾸리고 마포초등학교 건물 임대 허가를 받았다.
정씨는 지역 교육일과 도시인을 위한 귀농 교육일을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농촌을 살리려면 안으로는 교육을 통해 농촌의 활기를 되찾도록 해야 하고 밖으로는 많은 도시인들이 농촌으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경식씨는 귀농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면 정말 ‘열심히’ 한다. 작은 키에 햇빛에 까맣게 타버린 전형적인 우리 농부의 얼굴을 하고서 강단에 올라와 경상도 말씨와 전라도 말씨가 뒤섞인 아주 투박한 말투로 입을 열기 시작하면 강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함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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