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마을 편지
공동체를 방문하신 분들이 처음 찾아오시면서 어려워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깊고 깊은 산골에 있으면서도 그 흔한 팻말 하나, 안내 간판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가도 세워 놓지 않았으니 우리의 불친절의 끝은 어디까지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물론 팻말이나 간판이야 돈만 주면 쉽게 만들어 붙일 수도 있고, 직접 나무를 켜서 만들어 글을 써서 붙일 수도 있지요. 그럼 그렇게 쉬운 일을 왜 안하였냐고요?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공동체를 시작하게 된 이유부터 짧게라도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로 살게 하신 것보다 먼저 저희들에게 알게 하신 것은 이 땅의 농촌과 농민들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일 때부터 농촌 교회와 농촌 지역으로 농활로, 단기 선교로 다니면서 공동체적인 마을 형태를 유지하면서 거센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고 있던 농촌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농촌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교회의 형태, 혹은 전도인의 삶의 형태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던 고민의 끝자락에서 알게 하신 것이 바로 공동체였습니다.
일도 함께 협업으로 하시고, 적어도 마을 사람들끼리는 누가 누군지 훤히 알아서 도시에서는 통하는 익명성이 전혀 먹히지 않는, 심한 경우에는 집단주의적인 형태를 띠면서 낯선 외지인들에게 텃세를 부리기도 하는 곳이 농촌입니다. 이런 농촌 마을에 초대교회와 같이 서로 유무상통하는 신앙의 가정들이 함께 들어가서 마을 어르신들과 더불어 삶을 나누고, 농사를 지으며 복음을 전하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건강한 생명력으로 장애우들과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을 섬기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지요.
이렇게 방향성을 잡고는 공동체에 대한 책들도 읽고, 한국에 있는 알려진 공동체들도 순례하며 먼저 공동체로 살고 계신 분들의 삶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럽에 있는 공동체들도 몇 군데 방문하여 그분들의 오래된 삶의 형태에 대해서도 공부하였습니다.
이렇게 준비하는 과정에 형제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제는 시작할 때라는 공감대의 형성과 함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1998년 봄에는 공동체를 향한 첫발을 내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동체를 하겠다고 시작을 하고 보니 지금까지 공부하고, 정리한 것들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곳 보은에 내려와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하는데 며칠 동안 아무리 생각을 해도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 거예요. 마치 찾아가야할 곳의 약도와 주소를 잃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짧지만 길었던 백지상태의 끝에 한마디 불쑥 떠 오른 생각이 ‘예수님처럼’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앞뒤 꾸밈말은 전혀 없이 그저 툭 던지듯이 주어진 말씀이 이 말씀이었는데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이 말씀보다 더 분명하고도 정확한 답이 없었습니다. 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이, 공동체로 산다는 것이 거창한 말로 많이 표현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몸을 세우는 일이지요. 그러니 머리이신 예수님처럼 하면 되는 것이고 그보다 더 좋은 길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받고나서 예수님에 대해 다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성자 하나님의 권세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도 나사렛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목수라는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사람들과 더불어 사셨습니다. 20대의 소중한 시기를 예수님께서는 순회전도 한번 하시지 않고 그저 이름 없는 목수로 열심히 나무를 다듬으실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저희도 나름대로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수년 동안은 목사,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티내지 말고, 예수님처럼 그렇게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로 말입니다.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흘러 지금은 벌써 처음 들어온 가정들이 올해 들어 안식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공동체에는 십자가도 걸려있지 않고, 간판도 없습니다. 그저 마을 어르신들에게 배우고 익히며 함께 농사를 짓고, 우리 손으로 직접 집도 지으며 마을 어르신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마을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보은 읍내에 계신 분들도 이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저희에게 예배당을 세워야 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걱정스레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마을 회관을 예배당으로 쓰라는 말씀도 노인회장님께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지난달에는 좀 떨어져 있는 장갑이라는 마을로 이사 오신 한 가정이 공동체 예배에 참석하시기 시작하셨는데 그분을 모시고 오신 분은 지금까지 교회를 단 한 번도 다녀보신 적이 없는 마을 토박이셨습니다. 이사 와서 교회를 못 정하고 이곳저곳을 다니고 계신 이분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대원리에 좋은 교회가 있다고 소개를 해드리다가 아예 직접 자기 차로 모시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것입니다.
다투지도 않으시고, 그 소리를 들레지도 않으신 분, 거리에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었던(마12:19) 나사렛 예수님처럼 앞으로도 이곳 속리산 골짜기에서 이름 없는 농부로, 목수로 살며 예수님의 몸을 더욱 온전히 세워가기를 공동체 모든 식구들은 소망합니다.
주후 2004년 3월 초순에
무익한 종 올림
공동체를 방문하신 분들이 처음 찾아오시면서 어려워하시는 것 중에 하나가 깊고 깊은 산골에 있으면서도 그 흔한 팻말 하나, 안내 간판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가도 세워 놓지 않았으니 우리의 불친절의 끝은 어디까지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물론 팻말이나 간판이야 돈만 주면 쉽게 만들어 붙일 수도 있고, 직접 나무를 켜서 만들어 글을 써서 붙일 수도 있지요. 그럼 그렇게 쉬운 일을 왜 안하였냐고요?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공동체를 시작하게 된 이유부터 짧게라도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로 살게 하신 것보다 먼저 저희들에게 알게 하신 것은 이 땅의 농촌과 농민들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일 때부터 농촌 교회와 농촌 지역으로 농활로, 단기 선교로 다니면서 공동체적인 마을 형태를 유지하면서 거센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고 있던 농촌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농촌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교회의 형태, 혹은 전도인의 삶의 형태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던 고민의 끝자락에서 알게 하신 것이 바로 공동체였습니다.
일도 함께 협업으로 하시고, 적어도 마을 사람들끼리는 누가 누군지 훤히 알아서 도시에서는 통하는 익명성이 전혀 먹히지 않는, 심한 경우에는 집단주의적인 형태를 띠면서 낯선 외지인들에게 텃세를 부리기도 하는 곳이 농촌입니다. 이런 농촌 마을에 초대교회와 같이 서로 유무상통하는 신앙의 가정들이 함께 들어가서 마을 어르신들과 더불어 삶을 나누고, 농사를 지으며 복음을 전하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건강한 생명력으로 장애우들과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을 섬기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지요.
이렇게 방향성을 잡고는 공동체에 대한 책들도 읽고, 한국에 있는 알려진 공동체들도 순례하며 먼저 공동체로 살고 계신 분들의 삶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럽에 있는 공동체들도 몇 군데 방문하여 그분들의 오래된 삶의 형태에 대해서도 공부하였습니다.
이렇게 준비하는 과정에 형제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제는 시작할 때라는 공감대의 형성과 함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1998년 봄에는 공동체를 향한 첫발을 내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공동체를 하겠다고 시작을 하고 보니 지금까지 공부하고, 정리한 것들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곳 보은에 내려와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하는데 며칠 동안 아무리 생각을 해도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 거예요. 마치 찾아가야할 곳의 약도와 주소를 잃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짧지만 길었던 백지상태의 끝에 한마디 불쑥 떠 오른 생각이 ‘예수님처럼’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앞뒤 꾸밈말은 전혀 없이 그저 툭 던지듯이 주어진 말씀이 이 말씀이었는데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이 말씀보다 더 분명하고도 정확한 답이 없었습니다. 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이, 공동체로 산다는 것이 거창한 말로 많이 표현할 수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몸을 세우는 일이지요. 그러니 머리이신 예수님처럼 하면 되는 것이고 그보다 더 좋은 길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받고나서 예수님에 대해 다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성자 하나님의 권세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도 나사렛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목수라는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사람들과 더불어 사셨습니다. 20대의 소중한 시기를 예수님께서는 순회전도 한번 하시지 않고 그저 이름 없는 목수로 열심히 나무를 다듬으실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저희도 나름대로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수년 동안은 목사,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티내지 말고, 예수님처럼 그렇게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로 말입니다.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흘러 지금은 벌써 처음 들어온 가정들이 올해 들어 안식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공동체에는 십자가도 걸려있지 않고, 간판도 없습니다. 그저 마을 어르신들에게 배우고 익히며 함께 농사를 짓고, 우리 손으로 직접 집도 지으며 마을 어르신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마을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보은 읍내에 계신 분들도 이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저희에게 예배당을 세워야 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걱정스레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마을 회관을 예배당으로 쓰라는 말씀도 노인회장님께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지난달에는 좀 떨어져 있는 장갑이라는 마을로 이사 오신 한 가정이 공동체 예배에 참석하시기 시작하셨는데 그분을 모시고 오신 분은 지금까지 교회를 단 한 번도 다녀보신 적이 없는 마을 토박이셨습니다. 이사 와서 교회를 못 정하고 이곳저곳을 다니고 계신 이분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대원리에 좋은 교회가 있다고 소개를 해드리다가 아예 직접 자기 차로 모시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것입니다.
다투지도 않으시고, 그 소리를 들레지도 않으신 분, 거리에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었던(마12:19) 나사렛 예수님처럼 앞으로도 이곳 속리산 골짜기에서 이름 없는 농부로, 목수로 살며 예수님의 몸을 더욱 온전히 세워가기를 공동체 모든 식구들은 소망합니다.
주후 2004년 3월 초순에
무익한 종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