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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Jun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서평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79.34.254 조회 수: 3514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서평
박창수
1. 요약
로날드 사이더가 쓴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한화룡 옮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0)은, 엄청난 부와 만연된 빈곤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희생적 나눔을 비롯하여 다양한 실천 방식을 통해 대량의 세계 빈곤을 실제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는, 로날드 사이더가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소액 대부의 예를 들어, 대량의 세계 빈곤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과 냉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부분이다.
“때로 우리는 사태가 절망적이며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는 생각에 좌절하거나 냉소주의에 빠지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변화를 일으킨다. (중략: 인용자)
그것은 대량의 세계 빈곤이라는 전체 상황을 정말로 바꿀 수 있을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10조 불 이상의 연간 총수입을 올린다. 다섯 식구 한 가족을 돕기 위한 대부금은 평균 500 불이다.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수입의 1%를 소규모 대부금으로 준다고 가정해 보자(중략: 인용자).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수입의 1%만 사용해서 가장 가난한 10억의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기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아는가? 단 일 년이면 된다!”(로날드 사이더, 13).
로날드 사이더는 물론 소액 대부만으로 모든 빈곤을 종식시킬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극심한 세계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피력하며 그 구체적 처방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날드 사이더는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 총재 무하마드 유누스와 미국 경제학자 제프리 D. 삭스와 닮았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소액 대부가 모든 사회적 악을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무하마드 유누스, 340), 그가 1997년에 워싱턴에서 열린 ‘소액 융자 정상 회담’에서, 137개국으로부터 온 3,000명의 인사들 앞에서, 소액 대부를 통해 가난 없는 세상을 이룩할 수 있음을 역설한 연설은 감동적이다.1) 제프리 D. 삭스도 『빈곤의 종말』에서 ‘선진국들의 빈국들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의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다양한 대안들을 통해, 세계의 최빈국들인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을 그 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음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로날드 사이더가 무하마드 유누스나 제프리 D. 삭스와 다른 점은, 빈곤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무엇보다도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에게 희생적 실천을 요청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듣는 이의 마음을 괴롭히는 사실을 말하며, 희생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다. (중략: 인용자)
우리는 엄청난 부와 만연된 빈곤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립하도록 돕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우리는 그대로 행할 것인가? 또한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에는 사실상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가 포함될 것이다)은 자비로울 것인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품위 있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자본을 함께 나눌 것인가? 부유하고 자비로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난한 사람들과 협력한다면, 앞으로 20년 안에 세계의 가난을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로날드 사이더, 14-15).
로날드 사이더가 탁월한 점은, 빈곤 문제에 관해 성경 본문(Text)과 현 상황(Context)을 최대한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 그 둘을 연결시키는 능력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이 책에서 먼저 상황을 이야기 하고(제1부 “가난한 나사로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 그 다음에 성경을 말하며(제2부 “가난한 자와 재물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 후 성경과 상황을 모두 이야기하고(제3부 “가난의 원인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대안을 제시한다(제4부 “실천적 제안”). 이제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을 두 가지씩 기술하고자 한다.
2. 장점
이 책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날드 사이더는 제2부에서 ‘경제적 나눔과 경제적 정의’라는 본문 가운데 ‘예루살렘의 모델’에서, 초대 교회의 경제적 나눔이, 일거에 사유재산을 폐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기적이고 반복적인 나눔의 방식으로 실행되었음을 매우 탁월하게 설명한다.
“초대 교회는 절대적인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초대 교회는 사유재산을 폐지하지도 않았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재산을 팔거나 교회에 수익을 바쳐야 할 의무가 없었음을 상기시켰다(행5:4). 나눔은 강제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와 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충만하여서 많은 사람이 기꺼이 개인 재산에 대한 적법한 권리를 포기했다.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 이 구절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기증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도행전 뒷부분에 가면 우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가 여전히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음을 본다(12:12). 다른 사람들도 약간의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헬라어의 시제가 이 해석을 확증한다. 사도행전 2:45과 4:34의 동사들은 반복되는 행동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 의미는 “그들이 자주 소유물을 팔았다” 또는 “그들은 물건을 팔아서 수익을 정기적으로 가져오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가 모든 사유재산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거나 모든 사람이 즉시로 모든 것을 팔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본문은 일정 기간에 걸쳐,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땅과 집을 팔았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변화된 경제관계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루살렘 교회의 관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그들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서로에 대해 책임을 졌으며 전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나눔은 피상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2:45).”(로날드 사이더, 124).
로널드 사이더의 초대 교회의 경제적 나눔에 대한 이런 해석은, 구약 희년법의 연장선상에 있는, 예수님의 초과소유 토지·주택 환원 명령과 일치한다. 예수님은 영생의 길을 질문한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아 빈자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 여기서 ‘재물’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크테에마’(kth/ma)2)인데, 이 단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그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다고 할 때 바로 ‘소유’로 번역된 단어이다(행 5:1). 사도행전의 문맥에서 이 크테에마는 바로 토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도, ‘밭’(hd,f', 잠 23:10)과 ‘포도원’(~r,K, 잠 31:16; 호 2:17; 요 1:11)이 바로 크테에마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돈은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팔라고 하신 것은 당시에 가장 대표적 재산인 토지, 그리고 토지 부착 재산인 주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 예수님은 구약 율법을 무시한 분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때, 희년법이 토지와 (성 밖의 농촌과 레위인의) 주택에 대한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질문한 그 사람이 희년의 토지·주택법을 어기고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기 몫을 초과하는 토지와 주택을 팔아서 빈자에게 주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전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행 2:42) 순종하였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행 4:34-35).
여기에서 ‘밭과 집’의 헬라어는 복수형이고, ‘팔다’의 헬라어 시제는 로널드 사이더의 언급처럼 정기적이고 반복되는 행동을 나타낸다. 곧 자기 기업 몫만큼의 밭과 자기 가족이 사는 한 채 집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밭들’과 ‘집들’을 갖고 있는 다토지·다주택 소유자들이 희년의 토지·주택 환원법을 어긴 채 초과 소유하고 있는 토지·주택, 곧 기업 몫만큼의 토지와 가족 거주 한 채 주택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 초과 소유 토지·주택을 정기적이고 반복적으로 팔아서 사도들을 통해 빈자에게 환원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초과소유 토지·주택 환원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그 결과 백성이 교회를 칭송하고,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아지는(행 5:13-14)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둘째, 로날드 사이더는 이 책의 ‘2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경제적 균등’이라는 성경의 관점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그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경제적 균등의 의미에 대한 통찰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필자는 ‘경제적 균등’ 혹은 공평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다. 곧 하나님은 모든 사람 혹은 가족이 적어도 품위 있는 삶을 살 만한 돈을 벌고, 당당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땅, 돈, 교육)을 접할 수 있을 만큼은 균등한 경제적 기회를 갖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기회 균등은 이 책 4장에서 주장하듯이, 명백하고도 강력한 성경의 요구이다―이러한 요구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이행된다면, 이 책이 처음 나온 후 20년 간 일어난 변화 뒤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지독한 악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로날드 사이더, 10-11).
3. 단점
이 책의 단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날드 사이더는 제1부에서 ‘우리의 풍요에 대한 합리화’라는 본문 가운데 ‘구명보트의 윤리’에서, 불공평 분배의 문제야말로 빈곤 문제의 원인이라는 올바른 관점을 피력하면서도,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는 잘못된 논리를 일정 정도 수용하고 만다(로날드 사이더, 61-62).
“올바른 원조-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자립시키고 여성을 교육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원조-를 하면 인구 성장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로날드 사이더, 62).
결과적으로 그는 인구 증가가 오히려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에 의하면, 인구 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에 있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 않지만, 새로운 손은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 낸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인구가 많을수록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더 많아진다. 평등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인구의 자연증가는 개인을 가난하게 하기는커녕 언제나 부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헨리 조지 당대에,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임금이 크게 하락하여 자연의 관대함이 줄어들었음이 사실로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사례인 캘리포니아의 경우조차도, 자연적 요소의 힘은 줄어들었지만 인간적인 요소의 힘이 증가하여 이를 보상하고도 남았다. 자연이 인색한 곳에서 20명이 일하면 자연이 풍요로운 곳에서 한 사람이 생산하는 부의 20배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 인구가 조밀할수록 노동의 분업이 더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생산과 분배의 경제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구 증가는 빈곤 문제를 초래하는 저주가 아니라, 그 반대로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인구 증가가 정치경제학적으로 축복이라는 헨리 조지의 사상은, 창 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복’이라는 성경의 관점과 일치한다(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둘째, 로날드 사이더는 위의 본문에 이어서 바로 그 다음 ‘부자를 복음화함’에서, 막대한 돈을 들여 사치스런 예배당을 건축하는 풍조를 비판한다. 참으로 정당한 비판이다. 그런데 잘못된 사족이 붙어서 그 비판이 불철저하게 되고 만다.
“어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풍요한 생활 양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화하기는 매우 쉽다. 캘리포니아 주의 가든 그로브 커뮤니티 교회(Garden Grove Community Church)는 목사가 강단에서 단추를 누르면 물을 뿜는 여러 개의 분수로 장식된, 사치스러운 수백만 불짜리 건물을 갖고 있다. 담임 목사인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사치스러운 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우리는 교회 곁의 번화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풍요하고 비종교적인 미국인들에게, 아름답고 강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략: 인용자) 사회 복지 사업가들은 우리가 오렌지 드라이브 인 극장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돈을 써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돈을 가난한 자들을 먹이는 데 썼다고 가정해 보라.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겠는가? 여전히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들이 더 성공적이고, 더 풍요하고, 더 관대해지고, 더 이타적이 되도록 고무하기 위해 지금 사용하고 계시는 이 엄청난 작전 기지를 갖지 못하셨을 것이다.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 때로는 타당하다(강조: 인용자). 하지만 하루에 1불로 생활하는 10억 이상의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검토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유리 성전을 건축할 것인가?”
왜 그가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 때로는 타당하다는 이야기를 이 본문에 넣었는지 참으로 아쉽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교회’는 로버트 슐러의 발언 첫 부분에 있는 “아름답고 강한 인상”을 고려할 때, 사치스럽거나 최소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건축하는 예배당을 가리킨다. 로널드 사이더는 이런 예배당이 ‘때로는’ 타당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배당은, 로널드 사이더 본인의 말처럼, 하루에 1불로 생활하는 10억 이상의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검토했을 때, 어느 경우에도 타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광은이 『메가처치 논박』에서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 대안 부분에서 옆길로 새 버린 것을 연상케 한다.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마저 자신의 교회라고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메가처치가 해체되어야(중략: 인용자) 한다고 말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신광은, 341).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크기를 몇 명 선에서 제한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메가처치를 작은 교회로 쪼개야 하는가? 글쎄, 그래야 할지 모르겠다.”(347).
신광은 본인이 강조한 것처럼, 교회의 크기가 교회의 본질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당연히 메가처치는 해체해서 작은 교회들로 분립하는 것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일관성 있는 대안이 아닌가? 현재 2,000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 서울 강남에 땅을 사고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하는 사랑의 교회의 담임 목사인 오정현은 그 사고방식이 로버트 슐러와 어찌 그리 닮았는가? 이런 잘못된 시도를 막아야 하는 한국 교회와 미국 교회의 현실에서 신광은과 로널드 사이더의 일관성 없는 대안과 사족은, 오정현과 로버트 슐러에게 변명거리를 주고 그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로날드 사이더 지음, 한화룡 옮김,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0.
무하마드 유누스 지음, 정재곤 옮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세상 사람들의 책, 2005.
신광은, 『메가처치 논박』, 도서출판 정연, 2009.
신현우, “예수와 토지: 마가복음 10장 17-31절 주해”, 성서한국대회 강의안, 2007.
제프리 D. 삭스 지음, 김현구 옮김, 『빈곤의 종말』, 21세기북스, 2006.
찰스 아빌라 지음, 김유준 옮김, 『초대 교부들의 경제사상 소유권』, CLC, 2008.
헨리 조지 지음, 김윤상 옮김, 『진보와 빈곤』, 비봉출판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