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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선교

28

2010-Jun

『하나님이냐 돈이냐』 서평

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79.34.254 조회 수: 2687

 

『하나님이냐 돈이냐』 서평


박창수



1. 요약


쟈크 엘룰이 쓴 『하나님이냐 돈이냐』(양명수 옮김, 도서출판 대장간, 2008)는, 사람과 돈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담은 중요한 저작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과 돈의 관계에 대해 ‘사회적 차원’의 거시적 접근법을 비판하면서, ‘개인적 차원’의 미시적 접근법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점은 이 책의 단점이자 장점이 된다. 곧 ‘개인적 차원’의 미시적 접근법에 주력함으로써 매우 깊이 있는 통찰들을 제시하는 것이 장점이라면, ‘사회적 차원’의 거시적 접근법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단점이 되는 것이다.


쟈크 엘룰도 그 당대의 상황과 사조에 영향을 받은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러시아 혁명과 양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 모두의 처절한 비인간적 실체를 목도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체제 개혁(혹은 변혁)을 통한 해결책에 대해 비관적 견해를 갖게 되었을 것이고, 또한 체제 문제에만 집중하고 개인의 실천 문제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쟈크 엘룰 당대의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그의 주장이 당대에 참으로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어떤가? 비록 여전히 모더니즘의 잔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접어들어 개인적 차원의 미시적 접근법이 강조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 개인적 차원의 미시적 접근법과 사회적 차원의 거시적 접근법이 균형을 잡아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은 쟈크 엘룰의 논지를 따라서 그 탁월한 미시적 접근법을 이해하고 체화한 후에, 그 부족한 거시적 접근법을 다룬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서 보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모두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 제2장은 ‘구약성경에서의 부’, 제3장은 (신약성경의) ‘하나님이냐 돈이냐’, 제4장은 ‘돈에 대한 교육’, 제5장은 ‘부자와 가난한 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돈은 강력한 권세를 갖고 사람을 지배해 왔는데, 이미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로 그 권세를 꺾으셨으므로, 사람이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성령님께 의지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는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다음 문단이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기하신 물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물음을 우리에게 제기하심으로써, 우리들의 책임 있는 대답을 요구하신다. 이 물음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 물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들은 항상 가난한 자들과 함께 몸을 맞대고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 각자는 언제나 우리들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쟈크 엘룰, 222).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기하신 물음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에 대해 우리가 책임 있는 대답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돈의 권세에서 더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을 몇 가지 기술하고자 한다.



2. 장점


이 책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쟈크 엘룰의 관점은, 성경에 기초하여 매우 ‘급진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그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자들은 그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자로부터 재산을 나누어받을 권리가 있다. 이 권리가 거부당할 때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권리를 회복시킬 수밖에 없다.”(쟈크 엘룰, 72).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행위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교회를 돌이켜보라. 교회를 유지시키는 자본가들에 대해 또는 돈을 갖고 있는 조직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정도 자유로운지 생각해보라.”(쟈크 엘룰, 73-74).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가 일한 노동의 대가를 의로운 자에게 돌린다는 것은 매우 엄청난 사실이다. 세상이 쌓아둔 부도 결국은 하나님이 지적하는 자의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닌가! 이것은 평등과 분배의 정의를 깨닫게 하는 말이다.”(쟈크 엘룰, 82).


둘째, 쟈크 엘룰의 관점은, 성경에 기초하여 현상 이면을 꿰뚫어 보는 매우 ‘예리한 통찰’을 담고 있다.


“영원한 것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돈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환상과 추구 속에서 인간이 진짜 찾는 것은 즐김이 아니라 영원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그런 갈망과 사랑에 대해 돈은 어떠한 위안도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해답도 주지 못하고 있다.”(쟈크 엘룰, 77).


“사람이 돈에 권세를 부여해야만 돈이 권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돈이라는 객체가 국가와 군대와 대중과 지식인들의 상전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 권세를 인정할 경우에 한한다. (중략: 인용자) 사실, 그런 것 없이는 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쟈크 엘룰, 118).


“모든 사람이 돈이라는 단순한 기호에 그처럼 중대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유혹되었고 돈의 영에 의해 내적으로 사로잡혔다는 말이다.”(쟈크 엘룰, 119).


셋째, 쟈크 엘룰의 관점은, 성경에 기초하여 ‘가난한 자’의 문제에 대해 탁월한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그는 해방신학이 등장하기 전인 1950년에 이미 진정한 해방신학의 정신을 담은 중요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가난한 자가 의로운 것은 그가 덕스럽고 선해서가 아니요 그가 미래와 역사를 짊어지고 있어서도 아니요 단지 가난하기 때문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소망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까지도 빼앗긴 자다. 그렇지만 그가 부르짖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중략: 인용자) 아무나 붙들고 구원을 요청할지라도 그 요청은 하나님께 상달된다. (중략: 인용자)


아무리 물질적으로 빈곤한 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요청을 그만 두었을 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도움이 오기를 바라고 혁명이나 국가에서 도움이 오기를 바라게 될 때 그는 부자의 대열에 끼게 된다. 가난한 자의 의로움은 비천함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데 있다. (중략: 인용자)

 

가난한 자가 의로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의 깊은 절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그에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의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 점을 잊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쟈크 엘룰, 212-214).


그리고 그는 동시에, 20-30년 후에 기록된 이 책의 후기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힘을 받은 당대 해방신학의 지나친 주장과 오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철저한 동일화다. 예수가 바로 가난한 자며 가난한 자들은 모두 예수의 현존(참조물이나 징표가 아닌)이다. 가난한 자는 일종의 성례(sacrament)가 된다. 신약 성경은 가난의 메시지만 담고 있는 책이다. 가난한 자는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자다. (중략: 인용자) 가난한 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예수의 형상이므로 이제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하늘을 뒤지거나 이제 숨어 계신 예수를 찾기 위해 성경 본문을 뒤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가난한 자 그 자체만으로 족하며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계시다. 그런 논리로 부활을 해석하기도 하는데, 곧 육체의 부활 문제를 회피하는 현대주의적 해석이 그것이다. 가난한 자들 가운데 예수가 현존한다는 사실, 그것이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무덤에서 나온 영화로운 육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예수의 부활은 지금 여기에 있는 가난한 자다.”(쟈크 엘룰, 249-250).


그는 이처럼 당대 해방신학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진정한 해방신학의 정신을 피력한다. 이것은 탁월한 신학적 통찰이다.

 


3. 단점


이 책의 단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쟈크 엘룰은 지나치게 ‘나’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시각이라기보다는, 당대의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판단된다. 그는 소위 ‘기독교다운 경제체제’1)를 가장 지독한 위선이라고 비판하는 문맥에서(쟈크 엘룰, 39), 성경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나’를 극단적으로 강조한다.


“나를 향한, 내가 한 일,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의심하는 것에 대해 묻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 묻는 말씀이 있을 뿐이다.”(쟈크 엘룰, 37).


그러나 성경에는 물론 ‘나’도 있지만, 성경은 전체적으로 ‘우리’라는 공동체를 더 중요하게 강조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핵심 주제는 공동체라고 하는 견해는 매우 설득력이 크다(김현진, 『공동체 신학』). 그가 지나친 ‘체제’ 접근법에 대한 반동으로 ‘나’ 접근법을 강조하는 것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만, 이처럼 극단적으로 지나친 주장을 하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둘째, 쟈크 엘룰은 가난에 대한 경제 제도적 해결책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있다.2) 그는 먹고 살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 대해,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하나님이 사랑의 차원에서 그 사람에 대해 어떤 특별한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쟈크 엘룰, 155). 그러나 이것은 사회 제도적 불의에 의한 빈곤의 발생과 심화 현상을 간과하는 것으로서, 편협한 주장이다. 그는 그 다음 문단에서 “궁핍한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돈을 탐내는 사람이 있기 때문”(쟈크 엘룰, 155)이라고 보충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러한 비극이 인간의 죄, 전체 인간이 죄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경제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궁핍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헛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한 이러한 인간상황에 변화가 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 그것만이 억압과 불행의 사슬을 끊는 유일한 수단이다.”(쟈크 엘룰, 155-156).


그러나 경제 제도적 차원에서 인간 본성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실현가능한 최선의 제도’, 곧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가장 정의로운 제도’를 만드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희년 정신을 개인적 차원과 교회적 차원에서 실현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정신이 사회 제도 안에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희년 정신은 모든 사람이 행복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좋은 사상적 기초다. 칼 마르크스는 이 정신을 사회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사상적 이론을 세웠다. 그 이상은 고귀하고 제도는 탁월했다. 그러나 단순화하자면, 그는 그 이상과 제도를 실현할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을 소홀히 했다. 경제학자, 심리학자,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듯, 인간의 이기심이 해결되지 않고는 강제적으로 이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희년 정신이 사회 구석구석에 실현된다면 좋겠지만, 모든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치료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이전까지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가장 정의로운 제도를 만들어 실천하는 방법밖에 없다. 갈브레이드가 말한 ‘완전하지는 않지만 실현가능한 최선의 제도’(the achievable, not the perfect, system)가 그런 것이다.”(김영봉, 219-220).


쟈크 엘룰은 빈곤 문제의 해결책을 언급하면서, 사회학적인 태도나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고, 다만 개인적인 차원의 참여만 중요할 뿐이라고 하고, “기독교는 체제를 거부한다.”고까지 말한다(쟈크 엘룰, 233).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어떠한 일이든지 하게 된다’는 바로 앞의 견해와 모순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책임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 (중략: 인용자)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기하시는 문제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난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이든지 하게 된다.”(쟈크 엘룰, 232).


쟈크 엘룰의 말처럼 하나님이 제기하신 질문이자 우리에게 주신 책임인 ‘가난한 자’의 문제 앞에서, ‘어떠한 일이든지’ 가능한 모든 해결책을 시도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쟈크 엘룰이 체제 개혁의 대안은 왜 애써 무시하고 오직 개인적인 차원의 참여만 주장하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셋째, 쟈크 엘룰은 복음서의 부자 청년 이야기에 대해 계속해서 잘못된 해석을 반복하고 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쟈크 엘룰은 예수님의 의도가 그 명령을 윤리적 차원에서 일반화하라거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쟈크 엘룰, 125). 그는 더 나아가서, “다만 그것은 예외적으로 특별히 그렇게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의 삶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쟈크 엘룰, 164)이라고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러한 행위는 특별한 소명에서 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 소명을 받았을 때만 실현 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필요불가결한’ 정황이 아니다.”(쟈크 엘룰, 164).


그러나 이것은 복음서 본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해당 본문을 자세히 주해하면, 예수님의 이 명령은 ‘모든 소유의 환원 명령’이 아니라, ‘(희년법을 어기고 초과 소유하고 있는) 토지·주택의 환원 명령’인데, 과거로는 구약 희년법, 미래로는 초대 교회의 실천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일반화된 윤리적 명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님의 이 명령에서, ‘모든’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로 ‘예외 없이 모든’이라는 뜻이 아니라 ‘많은’이라는 뜻으로서, 헬라어의 과장법 표현이다.3)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예외 없이 다’ 팔아서 구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게 있는 것 중에서 많이’ 팔아서 구제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대해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2)에서, ‘재물’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크테에마’(kth/ma)4)인데, 이 단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그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다고 할 때 바로 ‘소유’로 번역된 단어이다(행 5:1). 사도행전의 문맥에서 이 크테에마는 바로 토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도, ‘밭’(hd,f', 잠 23:10)과 ‘포도원’(~r,K, 잠 31:16; 호 2:17; 요 1:11)이 바로 크테에마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돈은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팔라고 하신 것은 당시에 가장 대표적 재산인 토지, 그리고 토지 부착 재산인 주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 예수님은 구약 율법을 무시한 분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때, 희년법이 토지와 (성 밖의 농촌과 레위인의) 주택에 대한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질문한 그 사람이 희년의 토지·주택법을 어기고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기 몫을 초과하는 토지와 주택을 팔아서 빈자에게 주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전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행 2:42) 순종하였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행 4:34-35).


여기에서 ‘밭과 집’의 헬라어는 복수형이고, ‘팔다’의 헬라어 시제는 정기적이고 반복되는 행동을 나타낸다(로날드 사이더, 124). 곧 자기 기업 몫만큼의 밭과 자기 가족이 사는 한 채 집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밭들’과 ‘집들’을 갖고 있는 다토지·다주택 소유자들이 희년의 토지·주택 환원법을 어긴 채 초과 소유하고 있는 토지·주택, 곧 기업 몫만큼의 토지와 가족 거주 한 채 주택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 초과 소유 토지·주택을 정기적이고 반복적으로 팔아서 사도들을 통해 빈자에게 환원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초과소유 토지·주택 환원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그 결과 백성이 교회를 칭송하고,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아지는(행 5:13-14)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 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은, 쟈크 엘룰의 주장과 달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일반화된 윤리적 명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참고문헌


김영봉 지음,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3.

김현진, 『공동체 신학』, 예영커뮤니케이션, 2005.

로날드 사이더 지음, 한화룡 옮김,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0.

신현우, “예수와 토지: 마가복음 10장 17-31절 주해”, 성서한국대회 강의안, 2007.

쟈크 엘룰 지음, 양명수 옮김, 『하나님이냐 돈이냐』, 도서출판 대장간, 2008.

찰스 아빌라 지음, 김유준 옮김, 『초대 교부들의 경제사상 소유권』, CLC,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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