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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Feb
의료의 재앙, 한미 FTA! 공공성을 파괴하다(이원준)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79.33.210 조회 수: 3571
의료의 재앙, 한미 FTA! 공공성을 파괴하다.
이원준(onejoon@gmail.com)
향린교회한미FTA대책위원회 회원
공중보건의사
방문 진료를 의뢰받은 할머니가 몇 년간 누워 지냈는데, 욕창이 심해 매일 드레싱을 해도 깊이가 깊어지고 고름이 줄지 않았다. 상처부위 사진을 들고 대학병원 성형외과 외래에 가지고 갔다. 예약을 한 것이 아니라 두 시간쯤 기다려야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사진을 보이며 할머니에게 수술이 필요하지만 형편이 어렵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어렵게 부탁을 했는데, 교수님은 흔쾌히 수술을 승낙해 주었다. 기쁜 소식을 할머니에게 알리고, 할아버지에게는 몇 가지 입원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게 하였다. 입원하기로 한 날 보건소 엠블런스를 이용하여 병원으로 이송하였다. 병원에 환자가 가면 당연히 입원이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생각하지 못한 벽이 있었다. 바로 원무과였다. 교수님이 수술을 해주기로 했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원무과에서는 병실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저녁 6시가 되자 승강이를 벌이던 직원들은 퇴근하고, 커다란 병원 로비에는 침대에 누워있는 할머니와 양손에 짐 보따리를 든 할아버지, 나와 엠블런스 기사만 남아 있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보건소 관리의사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아들이 이 병원 산부인과 교수이다.) 병실 하나만 부탁한다고⋯. 십오 분쯤 지나니까 없던 병실이 생겼다. 할아버지는 병원에 가면 돈이 많이 든다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두라는 말까지 했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겨우 설득해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 왔는데, 입원한 다음에는 진료비가 문제였다. 할머니가 의료 보호 대상자라 진료비 중에 급여 부분은 보장되지만 입원, 수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급여 부분은 자신이 내야 한다. 어렵게 입원했는데, 야반도주를 할 수는 없고⋯. 다음날 보건소에 출근해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긴급지원제도를 알게 되었다. 읍사무소 공무원에게 필요한 서류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서, 몇 가지 행정 절차를 밟아 비급여 부분의 진료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며칠 뒤, 수술이 잘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했다. 단순히 아픈 사람 고치는 것이, 첨단 의료장비와 숙련된 의사 앞에 환자가 도달하는 것이 이렇게 힘겨워서야 하겠는가? 의사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거나 헌신을 강요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형편이 어려워 의료보험료를 내지 못하고, 또한 대상자가 아니라고 의료보호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의료보호 대상자는 전 국민의 약 3%로 절대빈곤이 전 국민의 10%인 것을 생각하면 삼분의 일에 불과하며 차상위계층을 포함하면 의료에 소외된 사람은 더욱 증가한다.) 결국 우리가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아플 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고결한 의사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한국의 의료가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공공성을 가질 때일 것이다.
의사로서 관심의 영역이 욕창의 예방과 치료에서 의료제도로 넓어질 무렵, 정부에서는 광개토대왕까지 무덤에서 끄집어내서 한미FTA 하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텔레비전 광고와 라디오 광고 등 대국민홍보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편, 시민단체에서는 광우병 소고기 유입, 약값 상승, 자동차 무역에서조차도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주장을 펴며 한미FTA를 반대하였다. 정부에서는 반대의견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졸속으로 처리하려 했다. 이런 혼란된 상황에서 찬반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보자는 의견이 모여 교회 교우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별로 한미FTA 협정문을 분석하게 되었다. 공개된 협정문을 읽고, 정부와 시민단체의 해설 자료를 비교해 보고, 국회 청문회 회의를 찾아보았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은 한미FTA가 단순히 공산품을 사고파는 것을 약속한 협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 교육, 의료, 환경, 농업, 지적재산권 등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이대로 작동한다면 대다수 국민의 일상을 오래도록 황폐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한미FTA가 의료에 영향을 미치는 것 중 두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한미FTA는 경제자유구역에서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예외 병원 허용과 영리병원 허용을 규정한 경제자유구역특별법과 제주특별자치도법을 예외로 명문화한다. 경제자유구역인 인천, 광양, 부산과 제주에 설립되는 병원은 지금의 병원과 달리 마음대로 병원비를 결정할 수 있고, 현재 의료비의 6~7배를 책정할 것이라 한다. 또한, 병원이 비영리로 지정되어 병원 외부로 이윤배당을 할 수 없는 것과는 다르게 이윤을 병원의 주주나 채권소유자에게 이윤배당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대놓고 장사를 하겠다는 말이다.
둘째, 한미 FTA 협정은 민간의료보험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철폐한다. 규제 완화, 규제 철폐만 보면 왠지 좋은 말인 것 같지만, 민간보험의 성격을 알면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에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보건의료 서비스는 수요 발생이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불확실한 비용의 크기는 인구가 많은 집단일수록 예측이 정확해지므로 집단에 의한 공동 대처는 개인적 불확실성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위험의 분산을 위해 보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대로 가입할 수 있는 민간보험에서는 역선택 현상이 나타난다. 현재 나온 민간보험상품도 그러한데, 고령자와 고위험군은 배제하거나 고보험료를 책정하고 있다. 더 많은 보장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민간보험이 거꾸로 소외시키는 것이다. 또한, 민간보험상품은 보험료 대비 지급률이 60%로 다른 나라의 지급률인 80%보다 낮으며, 보험료 중 관리운영비도 40%로 과다 책정되어 있어 적절한 사회적 규제가 시급한 시점이다. 하지만, 한미FTA는 금융서비스 협정을 통해 민간보험 상품의 규제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에 더해, 새로 나오는 보험상품에 대해서는 기존의 신고제조차 운영하지 않기로 함으로서 어떠한 상품의 출시도 막을 수 없게 된다. 텔레비전을 틀면 무섭게 쏟아지는 민간의료보험광고는 더욱 넘쳐날 것이고, 규제를 할 수 없으니 보험상품의 내용은 점점 속 빈 강정처럼 될 것이다. 그 안에서 순진한 우리는 겉만 번지르르한 보험상품에 가입해야만 안도감을 느끼며 공갈 광고와 협박 광고 사이에 낀 연속극을 보게 될 것이다.
의료와 관련된 한미FTA 내용 중에 위에 언급한 두 가지를 합치면 막말로, ‘살려거든 돈을 내라.’ 혹은 ‘돈 없으면 그냥 죽어라.’라는 인질극이 합법적으로 가능해진다. 한정된 지역에서 소수 병원에서만 허용하는 일이니 전체 의료제도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장 옆 동네에 그런 병원이 들어서면 기존의 병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어떻게 해서든 의료비를 올리고 영리병원으로 전환하려 할 것이다. 최신 의료설비를 갖추고 각 분야의 대가들을 비싼 몸값을 주고 모실 것이다. 이렇게 커진 몸집은 다시 의료비 상승을 부추긴다. 그리고 이런 건강보험 예외 병원을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이용하려면 민간보험상품에 가입해 비싼 보험료를 매달 내야 한다. 병원 입구에서 교통사고가 나도 그 병원이 속한 민간보험상품의 가입자가 아니라면, 피를 흘리며 건강보험증이 통하는 다른 병원을 찾아 헤매야 한다. 치료가 어렵거나 흔치 않은 질환에 걸린 환자는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에 가고자 민간보험상품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가입을 하거나, 형편이 안 된다면 살려고 거리로 나와 모금이라도 벌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병에 걸린 것도 서러운데 돈 없다고 서럽게 하지 말자.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이고 기본적인 의료의 역할이다. 한미FTA는 의료를 단순히 돈 버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공공성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나는 환자를 살릴 의무가 있는 의사로서, 낮은 자를 높이러 오신 예수를 따르는 기독인으로서, 건강하고 싶고 아플 때 치료받고 싶은 인간으로서 한미FTA를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