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은예수마을 월간 소식지 1999.7. 창간준비1호 |
| |
|
<보은서신>
백지 위에 그려지는 그림들
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유월 하늘 아래로 바람을 따라 감꽃이 흩날리고, 봄에 뿌린 농부의 땀방울은 푸르른 푸성귀들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어우러진 비 갠 하늘엔 영롱한 별빛과 계곡을 지나는 맑은 물이 벌써 여름을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무엇하나 머물지 않고, 누구하나 지체하지 않고, 각기 주님이 허락하신 제 길을 따라 하염없이 흐르면서도 순간 순간의 모습들은 본디를 창조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리지르지 않아도, 꾸미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각기 제 모습들이 곧 주를 향한 찬양이고 노래인 것을 보며, 인생의 자랑이 무엇이며 인생의 영화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더불어, 미물로 여겨지며 하찮게 여기던 저 작은 풀벌레들에게서, 말없이 바람에 흩날리는 이름 없는 들풀들에게서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순종의 아름다운 자세와 덕을 배웁니다.
이곳 낯선 대원리를 서성거리기 시작한지 벌써 1년하고도 6개월이 지났군요. 거할 곳도 없어서 매일처럼 차를 타고 들락거리며 조심스러워하던 시간도 지나고, 이제는 스스럼없이 마을 어르신들과 농담도 주고받고, 마주칠 때마다 환한 웃음으로 서로를 반가워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십 수년을 묵혀 두었던 밭들을 빌려 고구마와 콩을 심었던 작년, 그 밭에다가 올해에는 갖은 푸성귀를 심어 끼니를 도움 받고, 10년을 임대해서 버섯사를 만든 곳에서는 느타리버섯들이 잘 자라며 공동체의 중요한 수입원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한 집 짓는 일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얼마 안 있으면 입주 예배를 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철거하며 나오는 나무들을 싼값이 사다가 집을 짓기 시작했죠. 귀동냥, 눈 동냥으로 설계도면도 얻고, 집 짓는 방법들도 직접 책을 보고 공부를 해가며 손수 짓기 시작한데다, 예산을 가지고 시작한 일도 아니어서 시공 기간은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져 이제야 완공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집을 지어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집은 홀로 짓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하여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것이 결국 주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면, 참다운 공동체는 지금 우리 손으로 지어져가고 있는 우리 집처럼 각기 다른 은사와 경험을 가진 자들이 모여 만들어 가는 것이겠지요.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 결코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디다. 각자가 여태껏 살아오며 터득한 삶의 방식이 다르다보니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품어온 삶의 내용들이 다른 관계로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들마저 다르다보니 자주 의견다툼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긴 나무는 톱으로 잘라야 하고, 두꺼운 나무는 대패로 깎아서 조화를 이루어야 집이 지어지듯이, 민첩한 사람과 신중한 사람이 서로 다듬어지면서 공동체는 지어져 간다고 생각하며, 다투더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 세례 요한을 묵상하던 중, '내 뒤에 오실 그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분명한 자기 인식을 가지고, 제사장의 자제라는 기득권과 젊음의 특권을 내려놓고, 보다 영원한 사명을 향하여 힘있게 살아가다 마침내 때가 다하고 사명을 다하매, 주저함 없이 꽃잎처럼 붉은 피를 뿌리며 사라지던 아름다운 청년 요한을 보았습니다. 그의 삶이 비단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자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뒤에 올 분, 내 뒤에 올 미래, 내 뒤에 올 다음 세대를 바라보면서 살던 사람이라는 것이 더욱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인생살이라는데, 청년 요한은 외세의 지배를 받는 제 민족의 장래, 죄악과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를 바라보며, 뒤에 오실 자를 예비하는 거룩한 열정으로 발버둥치며 고통 하는 겨레의 가슴 가슴에 살아있는 소망을 심어준 것이었습니다. 바라옵기는, 지어져가는 우리 집이 우리만 머물고 쉬는 집이 아니기를 저희 식구들은 소망합니다. 만들어져가는 우리 공동체가 이 땅에 지상 낙원을 이루어 우리들끼리 희희낙락하며 살 곳이 아니라, 요한처럼은 못하더라도 내 뒤에 오실, 우리 뒤에 오실 그분의 길을 예비하며, 우리 뒤에 올 민족의 장래를 준비하고,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그런 삶의 모습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소서 내 님이여 뒤에 오실 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따라 뒤를 향한 우리의 몸짓을 따라 오소서, 내 사랑이여 이 어둠의 자락 사이로 임하사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신음하는 내 겨레의 멍든 가슴마다 소망의 웃음이 번져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후 1999. 6. 28 늦은 저녁에 무익한 종 강동진 목사 올림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