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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예수마을 월간 소식지 1999.7. 창간준비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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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돈>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과 재물'
공동체 신학 공동체는 공동체 신학이 있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까다롭고 딱딱한 의미의 신학이 아닌, 실제적인 신학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더불어 살아갈 때에 야기되는 많은 일들을 적절히 해소해 나가려면,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변증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히 입각한 공동체 신학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공동체 신학은 주로 쓰임새 있는 공동체 관련 책자들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공동체 지체들, 혹은 공동체에 관련된 사람들의 글을 통하여 계속해서 성수시켜 나가고자 합니다. 먼저, 이번 호에는 공동체 대표이신 강동진 목사님의 글을 게재합니다.
유사 이래로 재물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무치게 하는 영향력이 있어 왔습니다. 그것은 주로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세상 자체의 탈선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처럼, 재물이 정당하게 쓰임받지 못할 때, 그것은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많은 영성가들은 지적해왔습니다. 이에 우리는 '돈'으로 대표되는 재물의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과 가르침을 살펴보면서, 성경적인 경제 윤리의 뿌리가 무엇이며,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경제 윤리가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적들을 살피면서 물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사상은 예수님의 세계관의 중요한 일부였습니다. 구약의 전통을 이어받은 예수님은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믿고 선포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마6:26,28).여기에 인간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 자체도 하나님께로 말미암을 뿐 아니라, 이 지상에서 영위되는 인간의 삶도 역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의존적인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엇이 그들에게 필요한지를 아시며, 또한 그것을 공급해 주시기를 즐기십니다(마6:32-33).
주님에게서 인간을 청지기로 보는 사고는 특히 누가복음 안에 있는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불의한 종의 비유'(눅16:1-9)와 그것에 덧붙여진 말씀들(눅16:10-13)이 그 예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12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이 말씀에는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남의 것이고 무엇이 내 것인가? 앞뒤의 맥락에 비추어 보면 이 지상에서 가지는 것은 모두 남의 것이며, 하늘의 보화가 진정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상의 재물은 누구의 것입니까? 비유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주인, 즉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정한 기간 동안에 인간에게 맡겨 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본문은 '세금에 대한 질문'(마22:15-22, 막12:13-17, 눅20:20-26)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마지막의 선포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은 결코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을 황제가 다스리는 영역과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나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의 바램은 하루 속히 로마의 철권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황제의 다스림이 결코 병행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황제에게 속한 것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이라는 말은 '가이사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답은 피상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이 펴놓은 올무를 피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매우 외교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대답에서 예수님이 의도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즉 '가이사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이사에게 주어라. 그러나 정말 가이사의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아닌가? 가이사 조차도? 그러니 (모든) 하나님의 것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돌리라.' 이렇게 본다면 이 말씀은 정교분리와는 전혀 다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이 있다는 착각을 암시적으로 부인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고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맡겨진 것이라는 예수님의 사상은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달란트, 므나의 비유'(마25:14-30, 눅19:11-27)에서처럼 주어진 사명에 적용되기도 하며, '포도원의 소작인 비유'(마21:33-6, 막12:1-12, 눅20:9-19)에서처럼 하나님의 선택과 그 책임에 적용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각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영역, 곧 그의 생명, 사명, 물질 등 모든 것은 예외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는 '청지기(Oikonomos)라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여 더욱 명료하게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인간의 마땅한 태도는 당연히 선한 관리인의 태도일 것입니다. 인자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인간이 선한 관리인으로 성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복음서 도처에서 발견되는 생각입니다. 이로써 앞에서 지적한 비유들의 초점은 신실한 관리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명이든, 재물이든, 생명이든간에 주인이 되찾을 때까지 신실하게 관리하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2.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1) 예수님이 그의 지상 사역 동안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셨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상황과 종교적인 상황은 서로 맞물려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스스로 죄인으로 생각하도록 몰아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물질적인 가난이 그들로 하여금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정기적인 희생제물을 드리지 못하는 등).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심령', 즉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더 간절히 바랄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축복은 바로 이와 같은 가난한 자들에게 먼저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셨고, 이러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더 열렬히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가 마지막 남긴 것은 겉옷 뿐이었고 그것마저도 숨지시기 전에 남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마27:35, 눅23:25).
3)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전적인 포기를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가난한 삶을 요청하셨습니다.
4) 재산에 대한 포기의 요청과 함께 자주 지적되는 것은 부의 위험성입니다. 부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이미 구약 성경에서부터 자주 등장하는 주제였습니다. 이 주제는 특히 예언서에서 자주 나타납니다(사1:22-23, 3:14-16, 58:6-7, 암2:6-7, 4:1, 5:10-12). 예언자들은 불의한 부의 축적, 부의 이기적인 사용, 부에서 기인되는 교만, 부로부터 초래되는 타락 등을 문제삼았던 것입니다.
'두 주인에 대한 비유'(마6:24, 눅16:13)에서 주님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맘몬은 돈, 재산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어원으로 보면 '믿는다'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맘몬을 섬기는 것은 종교적인 충성을 요청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전인격적인 신뢰를 요청하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향해야 합니다. 그 믿음을 맘몬과 하나님 양자에게 함께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많은 사람들은 맘몬에게 참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믿고 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맘몬을 향한 믿음은 속임을 당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참된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는 이렇듯 인간을 노예화시키고 헛된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께 가야할 믿음과 복종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의 위험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6:24)라고 선언하십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16:19-31)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또 하나의 부에 대한 경고는 부자가 거지인 나사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호의호식하면서 지냈습니다. 부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5) 예수님은 금욕주의자도 아니셨고 금욕주의를 가르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가룟 유다가 관리하는 얼마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의 초청에도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돈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의 근거들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 아래에서 삽니다. 에 대한 집착은 따라서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불신의 증거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청지기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재물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 경제를 절대화하기 쉬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이방인'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임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거나 그것을 지원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질은 이 과정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물질로 부터의 자유함은 영적인 평안과 깊이를 더해준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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