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법
공동체로 살아가기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일일 것입니다. 저나 공동체로 살고 있는 지체들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우리는 자신에 대한 강한 애착과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애착이 도를 지나치면 우리는 이기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자신을 향한 애착은 다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애착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탓으로 돌리면서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자각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내 것 네 것 없이 서로 유무상통하는 삶을 소망하며 공동체로 살아도 피부색을 못 바꾸듯 각자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를 향한 애착, 혹은 자기중심성은 쉽게 극복되지 않습니다. 물론 타고 나기를 퍼주기를 좋아하는 성품의 사람도 있지만 자기의 한계, 혹은 좀 더 나아가 자기 아내나 남편 그리고 자녀라는 울타리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지체와 그들의 자녀들을 끌어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로 함께 살아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지체들이나 다른 집안 자녀들의 행동을 빌미삼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방하지 않고 마치 내 가족의 문제인양 끌아 안고 가슴아파하며 기도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내 눈을 거스르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또 그 일이 심각하게 내게 손해나 불편을 끼치게 되면 우리는 즉각 자기중심성이라는 방어벽을 쌓고 비난의 화살을 쏘며 반격을 가하거나 무관심함으로 웅크리며 장기전에 대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반격이나 무관심이라는 장기전에 돌입하는 자가 생기게 되면 공동체는 바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지체들 사이의 관계가 삐거덕 거리게 되고, 사소한 일에도 다툼이 생기거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오면서 공동체의 평화는 깨어지고 맙니다. 아마도 우리가 영적인 존재들인지라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느끼면서 자기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반응이 그렇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는 다들 말수가 줄어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침묵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중심성을 공격하는 또 다른 면은 손님들입니다. 수시로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집안을 살피거나 사소하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에 대한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삶으로 선교한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중심성을 잃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자기중심성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무슨 말씀을 하실 때마다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 사사건건 삐딱하게 보며 뒤돌아서서 비난하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무수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시고 그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으실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저들을 위해 죽으실 수 있었을까요?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정말 쉬지 않으시고 사역에 몰두하십니다. 늘 예수님 곁에는 문제와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주님과 눈을 맞추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곁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예수님은 대중들을 향해 설교를 하시고, 다시 제자들을 따로 모아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쉼 없이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늘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들과 함께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혹은 늦은 밤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셔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가지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확인하시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 대로 마옵시고’ 라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간을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읽고, 공감하시는 시간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쓰신 분은 예수님이 육체에 계실 동안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시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공감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요 그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담기 위해 자아를 깨뜨리며 흘리셨던 눈물이라고 상상해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악인과 선인을 골고루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세상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을 닮음으로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신 것입니다.
공동체로 살아가면서도 쉽게 깨어지지 않고 우리의 깊은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중심성이라는 장벽은 어떻게 허물어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공동체로 살지만 각자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 깊은 곳까지 들어가 세상을 바라보시며 가슴 아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빛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이웃과 지체의 가장 냄새나는 부분까지라도 끌어안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로 살아가기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자기중심성을 극복하는 일일 것입니다. 저나 공동체로 살고 있는 지체들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우리는 자신에 대한 강한 애착과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애착이 도를 지나치면 우리는 이기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자신을 향한 애착은 다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애착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탓으로 돌리면서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자각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내 것 네 것 없이 서로 유무상통하는 삶을 소망하며 공동체로 살아도 피부색을 못 바꾸듯 각자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를 향한 애착, 혹은 자기중심성은 쉽게 극복되지 않습니다. 물론 타고 나기를 퍼주기를 좋아하는 성품의 사람도 있지만 자기의 한계, 혹은 좀 더 나아가 자기 아내나 남편 그리고 자녀라는 울타리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지체와 그들의 자녀들을 끌어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로 함께 살아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지체들이나 다른 집안 자녀들의 행동을 빌미삼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방하지 않고 마치 내 가족의 문제인양 끌아 안고 가슴아파하며 기도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내 눈을 거스르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또 그 일이 심각하게 내게 손해나 불편을 끼치게 되면 우리는 즉각 자기중심성이라는 방어벽을 쌓고 비난의 화살을 쏘며 반격을 가하거나 무관심함으로 웅크리며 장기전에 대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반격이나 무관심이라는 장기전에 돌입하는 자가 생기게 되면 공동체는 바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지체들 사이의 관계가 삐거덕 거리게 되고, 사소한 일에도 다툼이 생기거나,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오면서 공동체의 평화는 깨어지고 맙니다. 아마도 우리가 영적인 존재들인지라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느끼면서 자기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반응이 그렇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는 다들 말수가 줄어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침묵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중심성을 공격하는 또 다른 면은 손님들입니다. 수시로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집안을 살피거나 사소하지만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에 대한 질문들을 받을 때마다 삶으로 선교한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중심성을 잃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자기중심성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요? 무슨 말씀을 하실 때마다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 사사건건 삐딱하게 보며 뒤돌아서서 비난하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무수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시고 그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으실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저들을 위해 죽으실 수 있었을까요?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정말 쉬지 않으시고 사역에 몰두하십니다. 늘 예수님 곁에는 문제와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주님과 눈을 맞추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곁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예수님은 대중들을 향해 설교를 하시고, 다시 제자들을 따로 모아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쉼 없이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늘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들과 함께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새벽 오히려 미명에 혹은 늦은 밤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셔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가지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확인하시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 대로 마옵시고’ 라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간을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읽고, 공감하시는 시간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쓰신 분은 예수님이 육체에 계실 동안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시는 우리 하나님의 마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공감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요 그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담기 위해 자아를 깨뜨리며 흘리셨던 눈물이라고 상상해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악인과 선인을 골고루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세상을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을 닮음으로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신 것입니다.
공동체로 살아가면서도 쉽게 깨어지지 않고 우리의 깊은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중심성이라는 장벽은 어떻게 허물어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공동체로 살지만 각자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 깊은 곳까지 들어가 세상을 바라보시며 가슴 아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빛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이웃과 지체의 가장 냄새나는 부분까지라도 끌어안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