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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한 자밤의 우주’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 있다. 여기서 ‘자밤’이란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릴 만큼의 분량이라는 뜻이다. 아주 적은 양이다. 그런데 그 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이다. 뒤뜰에 나가 풀뿌리 언저리에 엄지와 검지를 쑤셔 넣고 흙 한 자밤을 집어 올려보자. 그러면 두 손가락은 거의 10억 마리에 달하는 생명체를 들어 올리게 된다. 여기에는 적어도 1만 가지의 다른 종류의 생명체가 있다. 이들의 정체는 바로 미생물이다. 그것도 대부분 그 정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수많은 미생물 중에 극히 운이 좋은 일부만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런 미생물의 행운은 과학자들에게 달려 있다. 광주과학기술원의 허호길 교수와 이지훈 박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우항리의 공룡발자국 퇴적층에서 ‘슈와넬라’(Shwanella HN-41)라는 미생물을 발견했다. 슈와넬라는 아주 특이한 미생물이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뱉어낸다. 그런데 슈와넬라는 산소 대신 금속을 흡수해서 에너지를 생산한다. 허 교수는 이를 이용해 폐수에 녹아 있는 중금속을 제거할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허 교수팀이 비소(As, 원자번호 33번)이온 용액에 슈와넬라균을 넣자 슈와넬라균은 비소이온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흡수한 것이 있으면 배설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비소이온을 먹은 슈와넬라는 ‘배설물’로 노란색의 황화비소를 분비했다. 황화비소는 물에 녹지 않고 침전되며 인체에 해가 없다. 이렇게 비소라는 맹독성 중금속을 제거할 수 있는 미생물이 새롭게 발견된 것이다. 허 교수팀은 연구를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이들은 슈와넬라의 ‘똥’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원하는 결과를 얻는데 만족하지 않고 황화비소를 가지고 엉뚱한 실험을 했다. 황화비소를 잘 말린 뒤에 자외선을 쪼였더니 전류가 흐르는 성질이 나타났다. 즉 슈와넬라가 만든 ‘똥’에 광전도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박테리아가 폐수를 정화하면서 전기까지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황화비소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굵기가 20~100nm(나노미터, 1nm=1억분의 1m)인 튜브 모양을 하고 있었다. 즉 미생물의 ‘똥’이 황화비소 나노튜브였던 것이다. 그동안 미생물을 이용해 다양한 나노입자가 만들어졌지만 튜브 모양은 처음이다. 이 황화비소 나노튜브를 모아 물리적인 특성을 확인해 보니 반도체와 같았다. 슈와넬라는 폐수를 정화하며, 전기를 만들고, 반도체까지 만드는 것이다. 이제는 익숙한 단어가 된 나노튜브는 1991년 처음 발견됐다. 이때 발견된 것은 탄소나노튜브다. 그 뒤 높은 강도 및 탄성계수, 낮은 마찰계수 같은 기계적으로 우수한 성질이 밝혀지면서 고강도 구조용 소재 분야에 활용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하지만 언제나 제일 큰 문제는 엄청난 생산비용이다. 그런데 미생물을 이용해 생물학적으로 나노튜브를 생산할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무수히 많은 미생물을 이용하면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엄청난 양의 나노튜브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환경 문제도 동시에 해결된다. 컴퓨터에서 태양전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자장비는 화학적 생산과정을 거친다. 이때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고 많은 독성 중금속과 화학물질이 남는다. 슈와넬라는 친환경적인 반도체 생산의 길을 열지도 모른다. 만약 황화비소 외에도 다른 반도체 물질의 나노튜브를 만들 수 있다면 ‘옵토-나노 전자공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열릴 것이다. 하지만 슈와넬라 연구는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신기한 물질을 만드는 미생물에 대해 더 알고 싶은가?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 뜰에 나가서 풀뿌리 언저리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흙을 집어 올려 보라. 손가락 사이의 ‘흙 한 자밤의 우주’ 속에 기상천외한 성질을 가진 미생물이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 (글 : 이정모 과학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