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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Jul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서평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23.189.20 조회 수: 3933
1. 개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미국 철학회 회장, 미국 기독교 철학회 회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기독 지성이다. 그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IVP, 2007)는 1981년 가을,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개최된 카이퍼 강좌에서 첫선을 보였고, 그 해말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07년에야 비로소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된 것에 대해, 여러 추천자들의 말처럼 만시지탄(晩時之歎)을 금할 수 없다. 월터스토프는 칼뱅주의를 계승·발전시켜 집필했기 때문에, 이 책은 한국 기독교, 그 중 특히 장로교에 대한 설득력이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
이 책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장은 ‘세계 형성적 기독교’를 논하고 있는데, 월터스토프가 명명한 것이다. 세계 형성적 기독교는 세계의 사회 구조를 개혁하는 기독교를 의미하며, 초기 칼뱅주의 사회사상의 중요한 측면이다.
2장은 ‘근대 세계 체제’를 논하고 있는데, 이것은 월터스토프가 앞 장에서 논한 세계 형성적 기독교의 비전을 실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체제 분석을 위해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이론을 차용한 것이다. 근대 세계 체제의 자본주의 경제에는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의 구조가 있는데, 중심부는 가장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여 반주변부와 주변부를 지배하고 있다. 또한 근대 세계 체제의 미시 사회 구조에 나타나는 특징들은, 합리화의 증대, 분화의 증가, 귀속주의의 감소, 가치 일반화의 증대 등이다. 그리고 근대 세계 체제가 지닌 근본적인 가치는 자연 정복에 의한 자유의 확대와 자기 진로 결정의 자유의 확대이다.
3장은 ‘리마인가 암스테르담인가?: 해방인가 개현인가?’를 제목으로, 세계 형성적 기독교를 가장 훌륭하게 변형시킨 현대의 두 사조인 해방신학과 신칼뱅주의를 논하고 있는데, 월터스토프는 해방신학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에게, 신칼뱅주의는 헤르만 도여베르트와 봅 하웃즈바르트에게 각각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전개한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비참한 빈곤 문제를 중심부에 의한 주변부 착취로 이해하고, 전복적 해방을 위한 실천을 강조한다. 한편 신칼뱅주의는 창조 질서와 문화 명령을 강조하면서, 역사를 신앙/우상숭배의 역학과 분화의 역학의 상호 작용으로 이해한다. 특히 분화에서 ‘영역 주권’과 ‘개현’을 강조하는데, 영역 주권이란 ‘각 영역에 속한 기관들이 다른 영역들에 속한 기관들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갖는 독립적 주권’을 의미하고, 개현이란 ‘각 영역이 다른 영역들의 규범에 대해 열려 있는 개방’을 의미한다. 월터스토프는 해방 신학과 신칼뱅주의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지적한 후, 그 둘을 더 큰 관점으로 융합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샬롬’을 제안한다. 샬롬은 하나님과 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그 분을 기쁘게 섬기는 상태, 다른 인간들과 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인간 공동체를 기뻐하는 상태, 그리고 자연과 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물리적 환경을 기뻐하는 상태이다. 또한 샬롬은 정의와 책임과 기쁨을 강조한다. 문화 명령과 해방 명령은 둘 다 기독교인의 사명인데, 샬롬 중심적 관점이야말로 신칼뱅주의의 창조 중심적 관점과 해방신학의 구원 중심적 관점을 모두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뛰어넘는다.
4장부터는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구체적으로 빈곤, 민족주의, 도시, 예배, 학문의 문제들을 다룬다. 4장은 ‘부자와 가난한 자: 빈부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데, 칼 바르트와 아브라함 카이퍼를 인용하여,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을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복음을 인용하면서, 한 사회에 가난한 자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자들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갖는 의미를 빈곤의 문제에 적용한 칼뱅, 그리고 칼뱅을 뛰어넘어 빈곤의 근원을 자유방임 정치체제와 이윤추구 경제체제로 분석하고 개인적 자선을 뛰어넘는 사회적 차원의 해결책을 주장한 카이퍼를 인용한다. 월터스토프에 의하면, 우리 모든 인간은 ‘생존의 권리’를 갖고 있다. 곧 우리는 동료 인간들에게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 제도를 만들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 가난에 대한 관심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인 것이다. 월터스토프는 종교가 빈곤을 영속화했다는 마이클 노박의 견해에 대해, 노박은 제3세계가 가난하게 된 역사, 곧 중심부에 의한 주변부 착취의 역사를 외면하고 빈곤의 원인을 그 지역 안의 내적 요인에서만 찾고 있으며, 또한 빈곤 해결을 위한 사회적·경제적 구조 개혁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다만 월터스토프는 25년이 지난 후에 한국어판 후기에서, 자신의 사회 분석의 큰 결점으로,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치우쳐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종교 문제를 별개의 요인으로 다루지 못한 것은 자신의 불찰이었다고 고백한다.
5장은 ‘민족과 민족의 투쟁: 민족주의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데, 월터스토프에 의하면 근대세계에서 계급에 대한 충성심보다 훨씬 더 민족에 대한 충성심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역학을 인지하지 못하면 근대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민족주의란 한 민족이 스스로의 민족의식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이다. 한 민족이 부당한 피해를 당했다고 확신할 때 민족주의는 촉발되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 크게 일어난 민족주의는 바로 식민지 기간에 제국주의 국가에게 당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바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이 민족주의를 촉발하는 상처가 될 수 있다. 한편 한 민족이 자기 존재에 너무 몰입하게 되면, ‘가장 뛰어난 독일’, ‘미국이 최고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최고의 선으로 떠받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의와 평화의 법에 순복하지 않게 되고, 민족에 대한 충성 자체가 목적이 되는 우상 숭배적 민족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월터스토프는 남아공 아프리카너의 소위 ‘기독교 민족주의’와 유대인의 ‘시온주의’를 비판하면서, 한 국가의 합법성을 좌우하는 것은 민족 자결의 원칙이 아니라 정의와 샬롬임을 강조하며, 국가란 모든 시민들의 국가가 되어야지 그 시민 가운데 일부 민족의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상관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가 교회 속으로 파고들어와 독일 그리스도인이 로테르담의 교회에 폭탄을 투하한 것처럼 미국 그리스도인도 하노이의 성당에 폭탄을 투하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6장은 ‘기쁨의 도시: 샬롬과 도시의 미학’을 논하고 있는데, 세계 인류의 다수가 살고 있는 추한 도시를 아름답게 바꿀 것을 역설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해주신 운명은 자연에 둘러싸인 인간 공동체의 삶으로서 바로 샬롬을 말한다. 한편 도시는 그 거주민의 생활방식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방식을 좌우하기도 한다. 아름다웠던, 기쁨의 도시들인 중세의 도시들과 달리, 현대의 도시들은 추해지고 말았는데, 그 배후의 역학에는 경제 성장과 이윤 획득을 중시하고 심미적 차원은 간과한 ‘사적 자본주의’, 그리고 자기 가족만을 중시하고 자동차로 표상되는 ‘사생활 중심주의’가 있다. 성경의 비전은 동산의 삶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 곧 도시의 삶인데,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서, 역사의 신비한 패턴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7장은 ‘정의와 예배: 개신교 예배 의식의 비극’을 논하고 있는데, ‘호모 아도란스’(homo adorans), 곧 ‘예배하는 인간’은 인간의 본질이다. 세계는 하나님의 성례이며, 일과 예배는 깊은 관련이 있다. 둘 다 감사의 표현이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선포 행위와 예배 행위가 번갈아 이루어지며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개신교 예배 의식의 비극은, 기독교인이 과거사건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예배를 억누르고 선포에 지나친 강조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심각하고 냉정하며 기쁨이 없는 예배가 되어 버렸다.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특히 성만찬을 예배 의식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복귀시켜야 한다.
8장은 ‘이론과 실천: 실천 지향적 학문’을 논하고 있는데, 사회적 신념과 이론화 작업이 통합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신념이 이론화 작업의 지배적 관심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신칼뱅주의적 학문의 관심이었다. 그리고 월터스토프는 정의를 위한 투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론화 작업을 요청하면서 실천지향적 이론을 강조한다.
2. 평가
이제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가능한 한 그 초점을 한국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을 위한 기독 운동(이하 기독 운동)과 관련시키고자 한다. 먼저 이 책에서 높이 평가하는 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월터스토프는 칼뱅주의를 비롯한 기독교의 역사적 유산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한계들을 넘어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들에는 ‘세계 형성적 기독교’의 개념, 해방신학과 신칼뱅주의를 발전적으로 극복·통합하는 ‘샬롬’의 의미 등이 있다. 기독 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자신과 운동의 기반인 기독교계가 터하고 있는 기독교적 유산을 간과한 채 운동 자체에 몰입함으로써, 자신도 신앙적 회의에 빠지고 기독 대중에 대한 신학적 설득도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월터스토프는 이런 오류를 극복하는 훌륭한 모범이다.
둘째, 월터스토프는 ‘세계 형성적 기독교’를 언급하면서 성경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칼뱅주의자에게 사회비판의 뿌리로서 역할을 했고, 또한 사회개혁의 패턴을 제공했다(47-48쪽).
그런데 먼저, 칼뱅주의자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 구조가 타락했다고 확신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개혁을 위한 지침은 어디에서 얻었는가? 급진적인 사회 비판의 뿌리는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 말씀이 사회 질서의 타락상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아울러 개혁을 위한 기본적인 패턴을 제공하는 것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사회 개혁, 그것이 바로 칼뱅주의자의 목표였다.
성경, 그 중에서도 구약 성경이 중요했다. 월터스토프에 의하면, 칼뱅주의자는 성경을 사회 참여의 포괄적 길잡이로 삼은 만큼 구약 성경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48쪽 각주). 그런 점에서 기독 운동이 성경, 특히 구약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운동에 접목할 수 있다면, 그래서 칼뱅주의자의 목표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사회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면, 성경 중심의 전통에 서 있는 한국 기독교계를 더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성경 본문(text)을 상황(context)으로부터 떼어버리는 성경문자주의(biblicism)의 함정은 피해야 할 것이다.
셋째, 월터스토프는 신학뿐만 아니라 일반 학문, 특히 사회과학도 진지하게 활용하는 연구의 치열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들에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제3세계 빈곤에 대한 각종 이론, 그리고 루이스 멈포드의 도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기독 운동의 이론가들 중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통합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와 같은 이론의 파편화는 기독 운동이 심각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독교적 대안’을 마련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게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신학과 사회과학을 모두 똑같은 정도로 완벽하게 할 것을 주문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에 중심을 두고 사회과학 이론을 연구하면서 두 가지를 통합하려고 노력한 월터스토프처럼, 기독 운동의 이론가들은 신학과 사회과학 둘 중에 어느 하나에 전문성을 갖고 다른 하나를 공부하면서 두 가지를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월터스토프는 제3세계 빈곤 문제에서, 토지개혁의 중요성을 통찰하고 있다. 토지 문제는 성경이 경제 문제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월터스토프는 비록 성경의 토지관을 기술하지는 않지만, 제3세계 빈곤 문제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기존 이론을 공부한 끝에, 빈곤 해결을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토지 개혁”(188쪽)이라고 역설한다. 월터스토프에 의하면, 토지 문제는 빈곤의 문화를 낳는다(184쪽).
이보다 더 결정적인 걸림돌은, 땅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부유하고 힘센 지주를 위해 일하는 노동력에 불과하고 대개 수출용 환금 작물을 재배하는 일을 한다는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처지가 바뀔 것이란 희망이 없기에 노동의 소산물을 늘리겠다는 동기도 생기지 않는다(그리고 지주조차도 농작물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의욕이 별로 없다). 요컨대, 토지 소유 제도가 지닌 사회적 불공평이 이른바 ‘빈곤의 문화’(culture of poverty)를 낳는 셈이다.
토지개혁에 대한 월터스토프의 견해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IMF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제3세계의 토지개혁을 무시해 온 행태를 비판하는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조지프 스티글리츠 저, 송철복 역, 『세계화와 그 불만』, 세종연구원, 2005, 152-153쪽).
IMF가 무엇을 의제로 삼는가 뿐만 아니라 IMF가 무엇을 의제에서 제외하는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안정화”는 의제로 삼으면서 “일자리 창조”는 제외한다. “과세 및 그 역효과”는 의제에 올라 있으며, “토지개혁”은 빠져 있다. “은행을 구제할 돈”은 있지만 “교육 및 보건 서비스 증진을 위해 쓸 돈”은 없다. 사정이 이러니 거시경제와 관련한 IMF의 그릇된 처리로 인해 일자리에서 쫓겨난 근로자들을 구제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다.
워싱턴 합의에서 빠진 많은 의제들이 더 높은 성장과 더 큰 평등을 가져다줄지도 모르겠다. 토지개혁은 그 자체로서 많은 국가들이 직면한 중대한 선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에서 소수의 부자들이 대부분의 땅을 갖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소작농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생산한 농작물의 고작 절반 또는 그 미만을 가져간다. 이것이 소위 소작제도이다. 소작제도는 의욕을 약화시킨다. 수확한 농작물을 땅주인과 균등하게 나눠 갖는다는 것은 가난한 농부들에게 세금을 50% 매기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매기면 의욕을 꺾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IMF는 부자들에게 부과되는 높은 세율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처럼 숨은 세금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제대로만 되면 토지개혁은, 근로자들이 땅을 소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출을 받는 것까지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공개강좌를 통해 새로운 파종 및 경작기법을 가르친다면 수확량 증대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토지개혁은 사회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일이다. 재무부를 구성하고 있는 엘리트 관리들, 국제금융기구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들은 그 변화를 반드시 좋아하지만은 않는다. 이들 국제기구가 성장과 빈곤 완화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그 문제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어야만 했다. 한국, 대만처럼 가장 성공적인 개발을 이룬 몇몇 나라에서는 토지개혁이 선행되었다.
스티글리츠에 의하면 토지개혁은, 성장을 부추기면서 동시에 빈곤을 감소시키는 ‘친(親)빈곤 성장전략’으로서, 성장 증진과 평등 확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대안이다(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책, 155쪽). 이와 같이 토지 개혁이 제3세계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실제적이고 근본적인 대안이라는 양식 있는 학자들의 견해, 그리고 토지 문제가 경제 문제의 근본이라는 성경의 관점, 이 두 가지를 고려하면, 기독 운동이 토지 개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주도할 필요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책에서 아쉽게 생각하는 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월터스토프는 ‘세계-형성적 기독교’(world-formative Christianity)를 강조하는데, 이 표현을 차라리 ‘세계-개혁적 기독교’(world-reformative Christianity)로 바꾸는 것이 보다 명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판단된다. 왜냐하면 ‘세계-형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다가오지 않는 반면, 월터스토프는 세계의 사회 구조가 죄로 타락해 있으므로 그것을 개혁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의 사명이라고 강조할 만큼, 자신이 명명한 ‘세계 형성적 기독교’의 핵심적 의미에 ‘세계-개혁’을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뱅주의의 모토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적인 세계 개혁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개혁된 세계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칼뱅주의에 기반한 ‘세계-개혁적 기독교’의 슬로건으로서 흠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개혁적 기독교’를 기독 운동이 핵심 이론으로 삼는다면, 칼뱅주의 장로교 전통이 강한 한국 기독교계를 신학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해질 수 있다.
둘째, 월터스토프는 제3세계 빈곤 문제의 원인으로 인구 증가를 지목하면서 빈곤 해결을 위해 출산 통제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월터스토프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주변부의 노동자들은 그 지역의 인구 과잉과 그로 인한 일자리 부족 때문에 불리한 처지에 빠질 때가 많다.”(75쪽).
“이 주제를 연구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동의하는 점은, 인구 증가도 대량 빈곤을 영속화하는 주된 요인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현대적 위생 시설과 의료 혜택으로 인해 제3세계의 사망률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출생률은 줄어들지 않은 실정이다. 그 결과 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일어나서 농업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일어나는 동시에 노동자가 투자 기금을 축적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해졌다.”(187쪽).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출산율의 통제다.”(188쪽).
월터스토프는 인구 증가가 빈곤의 주범 중 하나라는 데 빈곤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동의하고 있다고 언급했지만, 헨리 조지, 제레미 시브룩, 장 지글러와 같이 그런 견해에 명확하게 반대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그들의 견해를 헨리 조지부터 순서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헨리 조지가 살던 19세기에, 맬서스의 인구론은 빈곤 문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학설이었다. 맬서스에 의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생존물자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1인당 생존물자, 곧 ‘생존물자÷인구수’는 감소할 수밖에 없어 빈곤은 불가피하다. 헨리 조지는 그의 대표작 『진보와 빈곤』에서 이런 맬서스 학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헨리 조지는 맬서스 학설이 등장한 배경은,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로 인해 기존의 사회체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는 데 대해 권력층이 깊은 두려움을 느끼던 상황”이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맬서스 학설이 성공한 큰 이유는, “그것이 기존 이익을 위협하거나 강자의 이익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재산의 힘을 휘두르면서 사상을 지배하는 계층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준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 헨리 조지에 의하면, 맬서스 학설은 “현존하는 불평등의 책임이 인간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에 있다고 함으로써 불평등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또 빈곤이 불가피하다고 함으로써 개혁에 대한 요구를 얼버무리고 양심의 추궁으로부터 이기심을 보호하는 효과를 낳은 사악한 학설이었다.
헨리 조지는 맬서스 학설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먼저 맬서스 이후의 어느 누구도 그의 이론을 입증하지 못했다. 동서고금을 모두 살펴보아도 상당한 규모의 지역에서 인구 증가의 압박이 빈곤과 결핍의 원인이 된 예를 찾을 수 없다. 흔히 인구 과잉의 결과라고 오해하는 사례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인도, 중국, 아일랜드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이들 국가에서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었고 다수의 계층이 극도의 비참 속에 빠지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민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구 과잉에 기인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들 국가의 기근과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그 사회제도가 생산력에 족쇄를 채우고 근면의 대가를 강탈하는 형태를 취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맬서스 학설에 대해 최종적인 사실 검증을 하는 것은 쉽다. “인구 증가가 임금을 감소시키고 빈곤을 초래하는가?” 하는 질문은 “인구가 증가하면 추가 노동이 생산하는 부의 양이 줄어드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헨리 조지 당대에 인정받던 경제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 자연의 관대함이 줄어들기 때문에 노동투입이 두 배가 되어도 생산은 두 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인구 증가는 필연적으로 임금을 줄이고 빈곤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헨리 조지에 의하면, 진실은 이 주장과 정반대이다. 인구 증가로 생겨나는 새로운 입은 과거에 있던 입보다 더 많은 식품을 소비하지 않지만, 새로운 손은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 낸다.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진다면 인구가 많을수록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더 많아진다. 평등이 보장되는 상태에서 인구의 자연증가는 개인을 가난하게 하기는커녕 언제나 부유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헨리 조지 당대에,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임금이 크게 하락하여 자연의 관대함이 줄어들었음이 사실로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사례인 캘리포니아의 경우조차도, 자연적 요소의 힘은 줄어들었지만 인간적인 요소의 힘이 증가하여 이를 보상하고도 남았다. 자연이 인색한 곳에서 20명이 일하면 자연이 풍요로운 곳에서 한 사람이 생산하는 부의 20배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 인구가 조밀할수록 노동의 분업이 더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생산과 분배의 경제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는 맬서스에 의하면 저주가 되지만, 헨리 조지에 의하면 축복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레미 시브룩의 견해이다. 그는 『세계의 빈곤, 누구의 책임인가?』(도서출판 이후, 2007)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인구 전문가가 마을의 한 가족이 너무 많은 아이들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고 불평했다. 그러자 그 가족의 어머니는 화가 난 채 자신의 오두막 밖에다 열두 명의 아이들을 줄 세워 놓고 그 인구 전문가에게 말했다. “자, 이 아이들을 좀 보세요. 그리고 대체 내가 어느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지 말 좀 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장 지글러의 견해이다. 기아문제 전문가이자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 2007)에서 전 세계 인구의 8억 5천만 명이 기아선상에 있고, 영양실조로 매해 어린이가 대부분인 700만 명이 시력을 잃고 있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지글러는 1984년 당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120억의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FAO(식량농업기구)의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지구는 현재 인구의 두 배도 너끈히 부양할 수 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여러 대학과 제네바에서 열리는 각종 국제회의, 그리고 유엔의 책임자들과의 사적인 대화에서 지글러는 ‘자연도태’라는 말을 무수히 들었다고 말한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다는 자연도태설은 기아가 지구의 과잉인구를 조절하고 산아를 제한하는 자연의 지혜라며 기아를 합리화한다. 곧 너무 많은 인구가 살면서 소비하고 활동하면 지구는 점차 질식사의 길을 걷게 될 텐데, 기아로 인해 인구가 적당하게 조절되고 있기 때문에, 기아는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맨 처음 한 사람이 바로 맬서스이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질병과 기아는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해도 지구상의 인구를 줄여주는 자연적인 수단으로서 이 사회에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지글러는 이런 맬서스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날마다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구호시설에서 웅크린 채 죽어가는 아이들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회피하기 위해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맬서스의 신화를 신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글러는 맬서스 학설은 근본적으로 틀렸으며, 기아라는 끔찍한 사태를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사이비 이론이라고 통박한다. 지글러에 의하면, 맬서스 학설은 자신들은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논리에 불과하다. 지글러는 오늘날의 신(新)맬서스주의자들에게 만약 영양실조로 팔다리가 비쩍 마른 아이를 안고 아이들이 죽지 않도록 사투를 벌이고 있는 벵골이나 소말리아, 수단의 엄마들이 그 아이들을 죽게 하는 기아가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라는 소리를 듣게 될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낼 것인지 반문하면서 비판한다.
필자는 이들의 견해가 이론과 현실 두 측면 모두에서 월터스토프가 의지하고 있는 빈곤 연구자들의 주장보다 훨씬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월터스토프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 1:28의 문화명령을 강조하면서 그 성구의 가장 앞에 있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된 인구 증가 명령을 간과하고 있다. 인구 증가를 빈곤의 주범 중 하나로 보면서 출산 통제를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관점과 충돌된다. 월터스토프가 성경의 인구 증가 명령을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이런 잘못은 이 책에서 옥의 티라고 아니할 수 없다.
“본인의 종교적 신념과 학문의 결과가 서로 상충될 경우”, 신칼뱅주의자는 학자가 자신의 이론적 결론을 수정함으로써 종교적 신념과 조화로운 상태를 회복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와 같은 신칼뱅주의자의 견해에 대해 월터스토프는 근본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고 부언한다(328쪽). 월터스토프가 이런 확신을 왜 정작 인구 증가에 대한 성경의 관점과 자신이 읽은 빈곤 연구들의 관점 간의 상충 문제에는 적용하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이상으로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마친다. 이 책이 가진 작은 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한국 교회에서 널리 읽혀진다면, 한국 교회 개혁과 사회 개혁을 위한 기독 운동은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6년 전 월터스토프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기독교적 대안의 원리를 보다 더 완전하게 다듬고 현대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구현해야 할 책임은 이제 우리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