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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Jul
존 놀랜드의 『누가복음(중)』에 대한 희년 토지법 관점의 비판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23.189.20 조회 수: 3844
존 놀랜드의 『누가복음(중)』에 대한
희년 토지법 관점의 비판
박창수
1. 들어가며
존 놀랜드의 『누가복음(중)』(WBC 35b, 서울: 솔로몬, 2005)은 저자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저자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많은 주석서들과 학술 논문들과 전문 연구서들을 참조하여 기존 학자들의 논점과 논쟁을 요약하고, 여기에 저자의 견해를 더한 책이다. 이 책을 비롯한 WBC 전집은, 편집자 서문에 의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기독교 복음의 진리와 능력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긴다는 적극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복음주의적이면서도, 폭 넓은 시야를 담고 있다. 저자 서문과 편집자 서문처럼, 이 책의 곳곳에는 학자들의 논점과 논쟁이 소개되고,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추가되어 있어서, 읽어가는 과정이 비록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폭 넓은 시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익한 경험이었다. 더구나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복음주의 관점에서 저자가 기존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평가하고 자기 견해를 개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신뢰를 할 수 있어서, 안심하고 저자의 논리를 따라갈 수 있었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이 책의 기본적인 장점을 전제하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희년 토지법의 관점에서 이 책의 단점을 비판한 것이다.
이 책을 간단히 개괄하면, 이 책은 누가복음을 9장 21절부터 18장 34절까지 주석한 책으로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본문은 누가가 여행이라는 형태를 갖추어서 제시한 긴 문학적 대단락이라고 할 수 있다(796쪽). 이 대단락의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주제는 모두 “인자의 고난”이다. 곧 이 대단락은 인자의 고난으로 시작되어 동일하게 인자의 고난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놀랜드는 이 대단락을 모두 13개 부분으로 나누어 주석을 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위한 준비(9장 21-50절)
-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수와 동행하다(9장 51절-10장 24절)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10장 25-42절)
- 아버지께 드린 확신에 찬 기도(11장 1-13절)
- 갈등과 대비(11장 14-54절)
- 다가올 심판을 준비하라(12장 1절-13장 9절)
- 현재와 미래의 역전(13장 10절-14장 35절)
- 잃은 것을 찾다(15장 1-32절)
- 재물의 사용과 남용(16장 1-31절)
- 하나님 나라의 요구와 역사에 대한 합당한 응답(17장 1-19절)
- 인자가 올 때에 누가 준비되어 있겠느냐?(17장 20절-18장 8절)
- 어린아이와 같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18장 9-30절)
- 인자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응하리라(18장 31-34절)
2. 희년 토지법 관점의 필요성
이 글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희년 토지법의 관점에서 이 책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희년 토지법 관점이 하나의 관점으로서 누가복음을 보다 더 일관되고 정확하게 주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에 대해, 다름 아닌 이 책에 기록된 놀랜드의 견해를 인용하여 답변할 수 있다.
놀랜드는 “재물의 사용과 남용”(16장 1-31절)이라는 단락을 시작하면서, 복음의 요구와 율법의 요구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627쪽).
이미 율법의 도전을 토대로,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토대로 여기서의 부르심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복음서의 윤리적 요구들은 율법의 요구들만큼이나 엄격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한층 더하다!
놀랜드는 이 단락 가운데 “율법과 선지자들의 요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요구”(16장 16-18절)에 대한 주석에서, 이런 견해를 다시 피력하면서 자세히 풀어 쓴다(673쪽).
여기서 누가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에 쉽게 들어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기는커녕 정반대로 오히려 율법의 요구들에 대한 강화를 내포한다. 이 단락에서는 이혼이라는 문제를 한 예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대단락을 전체적으로 볼 때는 초점은 재물과 관련된 율법의 요구들에 대한 확증과 강화에 맞춰진다.
놀랜드는 이 단락 가운데 “부자와 나사로가 살아온 삶의 결과”(16장 19-31절)에 대한 해설에서, 이런 견해를 더욱 강조한다(694쪽).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을 특별하게 취급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들에게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있고, 그것으로 그들에게는 충분할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 줄 정해진 수단으로 삼으신 것들이다. 이 비유는 율법과 선지자들 속에는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심오한 도전이 들어 있고, 그렇게 특권을 지닌 자들은 율법과 선지자들 속에 들어 있는 규례들을 부지런히 찾아서 행동할 절박한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요구를 확증할 뿐만 아니라 한층 더 철저하게 요구한다.
이와 같은 놀랜드의 견해를 요약하면, 누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은 구약 율법을 강화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특별히 경제법이 중요한 내용으로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 율법 중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경제법은 바로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 토지법이다. 희년 토지법은 넓은 의미에서 ‘토지 신유(神有)’라는 근본 원칙에서 파생된 ‘평균(平均) 지권(地權)’ 원칙 아래, 지파별·가족별 토지 평균 분배 상태를 유지하고 회복하며, 지대(地代)를 공유하고, 안식년과 희년에는 정기적으로 토지를 안식하게 하는 구약 토지제도의 통칭으로서, 근본적으로 대토지 소유제 및 지대 전유(專有)제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놀랜드는 정작 이 책의 곳곳에서, 특히 소유와 재물에 대한 본문 주해에서 희년 토지법을 간과하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놀랜드가 복음은 경제법을 비롯한 율법을 강화하고 있다고 누가복음을 주해하면서, 막상 그 경제법의 핵심인 희년 토지법을 간과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자기모순이다. 보다 더 일관되고 정확한 누가복음 주해를 하기 위해서는 희년 토지법 관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나사렛 회당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메시아 선언 가운데 “주의 은혜의 해”(4장 19절)의 의미가 ‘희년의 경제적 측면’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볼 경우, 더욱 더 그러하다. 이하에서는 희년 토지법의 관점에서 이 책을 몇 가지로 나누어 비판하고자 한다.
3. 대토지 소유와 지대 전유를 간과한 주해
놀랜드는 누가복음 주해에서 대토지 소유와 지대 전유는 악한 것이라는 희년 토지법 관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놀랜드는 “재물에 집착하는 것에 대한 어리석음”(12장 13-21절)에 대한 해설에서, 이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가 다름 아닌 ‘지주’임을 간과하고 ‘농부’라고 기술한다(459쪽).
우리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농부(굵은 글씨 강조: 인용자)는 모든 것이 잘 되어서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된 아주 특별한 풍작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되기 전에도 이미 부자였다. 그의 창고들은 이 풍작의 모든 소출을 쌓아 둘 수 있는 정도의 크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농부(굵은 글씨 강조: 인용자)는 현명한 통찰과 실용적인 지혜로써 자신의 모든 소출을 아주 효과적으로 저장해 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저장 용량을 대폭 늘인다.
본문에서 이 부자는 밭을 갖고 있는 부자로 나오는데, 그 밭은 그 한 해의 지대(地代, 토지사용의 대가, 곧 소작료)가 장차 많은(πολλα) 해 동안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땅이다. 곧 이 부자는 넓은 땅을 갖고 있는 대지주인 것이다. 그런데 놀랜드는 이 부자의 밭에 소출이 많은 것(16절)에 대해, 부자 농부가 “이례적인 풍작으로 인한 뜻밖의 횡재”(457쪽)를 한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밭의 소출은 지대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풍작이라 하더라도 농부가 자경(自耕)으로 많은 해 동안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소출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놀랜드는 이 부자가 대지주이며, 그 밭의 소출이 지대라는 상식적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토지소유와 지주의 지대 전유(專有)를 허용하는 토지법은 구약 희년 토지법과 양립할 수 없고, 선지자들에 의해 저주받을 ‘악’으로 정죄된다(이사야 5장 8절, 미가서 2장 2절 등). 그런데 놀랜드는 이 본문의 18절에 대한 주석에서, 놀랍게도 이 부자에 대해 “이제까지 이 사람은 앞을 내다보는 사고, 실용적인 지혜, 과감한 결정과 추진력을 보여 주는 모범적인 인물”(456쪽)이라고 평가한다. 희년 토지법을 비롯한 구약 율법을 강화하는 복음을 기술한 누가복음 주해에서, 희년 토지법의 관점에 의하면 대토지를 소유하고 지대를 전유하는 악인이, 모범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것은, 한마디로 잘못된 주해인 것이다.
또 놀랜드는 이 본문에 대한 해설에서 “이 시점에서 그토록 많은 부가 자신의 수중에 들어왔을 때 이 부자는 자신의 책임이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459쪽)고 기술한다. 그러나 이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된 해설이다. 희년 토지법 관점에 의하면, 이 부자의 책임은 많은 지대를 받았을 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 부자가 진실로 자기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면, 근본적으로 자기가 희년 토지법을 어기고 불법으로 소유한 대토지 중에서 조상의 원래 지계표를 초과하여 소유하고 있는 토지, 곧 자기 가족의 기업 몫을 제외한 나머지 토지를 땅 없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환원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놀랜드는 이 본문의 20절 주석에서 하나님이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이 비유 속에는 하나님께서 왜 이 농부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457쪽)다고 전제하면서 여러 가지 견해를 기술하고 있지만 모두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놀랜드가 예수님이 이 비유의 구약 율법적 배경으로 당연히 전제하고 계신 희년 토지법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년 토지법 관점에 의하면, 이 부자는 불법을 행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하여 지대를 전유하여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지어 그 많은 지대를 쌓아 두고 혼자서 누리려는 악을 계획하고 실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부자의 영혼을 그날 밤에 도로 찾으시면 그가 예비한 것은 그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인데, 하나님이 이 부자를 이와 같이 심판하시려는 이유는 바로 율법 중 경제법의 핵심인 희년 토지법을 이 부자가 어기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또 놀랜드는 이 본문의 21절에 대한 주석에서, “이 절은 부의 축적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지 않고(다른 곳에서 누가는 부의 위험성에 대하여 간곡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유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458쪽). 그러나 이것은 희년 토지법 관점에서 대토지소유와 지대 전유에 의한 불의한 부의 축적의 문제가 이 비유에 전제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주석이다.
놀랜드는 이 본문 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게 될까?””(14장 15-24절)에 대한 주석에서도, 대토지소유의 문제를 간과한다. 이 본문에서 잔치에 초청을 받았지만 그것을 거절한 세 사람 중에서 ‘밭을 산 사람’과 ‘소 다섯 겨리를 산 사람’에 대해, 놀랜드가 이들을 “아주 부유한 자들”(569쪽)이라고 지적한 것은 옳다. 이 부자들은 나중에 잔치에 초대되어 참석하게 되는 ‘가난한 자들’과 극명하게 대조된다(21절). 그런데, 놀랜드의 이 주석에서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이 부자들을 ‘지주’라고 적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1)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에서 토지는 가장 크고 대표적인 재산이었다.
‘밭을 산 사람’이 그 밭에 나가보아야 하겠다고 한 것은, 자기 재산 관리인인 청지기를 통해서, 자기 조상의 원래 지계표를 넘어 타인의 기업인 밭을 샀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그 밭을 확인해 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경 농부가 자기 조상의 원래 기업인 밭을 무른 것이라면, 청지기를 두거나 청지기를 통할 필요도 없이 자기가 직접 계약하면 되고 또 초청 잔치까지 거절하면서 그 밭에 나가보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밭을 산 사람’은 바로 지주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소 다섯 겨리를 산 사람’의 경우, 소는 밭을 가는 데 쓰이는 가축인데 소를 다섯 겨리나 살 정도라면, 그리고 그 다섯 겨리 소들을 시험할 정도의 넓은 밭이라면, 이 ‘소 다섯 겨리를 산 사람’도 역시 지주라는 것은 조금만 추론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곧 예수님의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해석되는 큰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거절한 세 사람 중 적어도 두 사람은 바로 지주인 것이다.
그럼 이들 지주들은 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청을 받고서도 거부하는가? 그것은 희년 토지법을 어기고 자신들의 토지를 확대해 가고 부를 증식해 가는 데 여념이 없는 이 지주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려면 구약 율법 중 경제법의 핵심인 희년 토지법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에, 곧 기존에 자기 조상의 지계표를 넘어 불법으로 초과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가난한 이웃에게 환원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싫어서 스스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본문은 단순히 부자들이 땅을 사고 소를 사는 일상 거래에 바빠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희년 토지법 관점의 해석은, 후술하겠지만 12장 33절, 14장 33절, 그리고 18장 22절에 대한 해석과 일관되는 해석이 될 수 있다. 놀랜드는 이와 같은 희년 토지법 관점을 간과하기 때문에, 이들이 ‘아주 부유한 자들’이라고 해석하는 데서 멈춰버리고 더 이상 나가지 않는 것이다.
4. “모든 소유”에 대한 모순되고 모호한 주해
놀랜드는 “후히 주시는 공급자는 후히 베푸는 제자들을 요구하신다”(12장 22-34절) 본문 가운데,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33절)에 대해, 이 구절에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해에서 ‘다’를 첨가하여 기술한다(470쪽).
부자 농부의 전략과는 대조적으로(16-20절), 소유를 다(굵은 글씨 강조: 인용자) 팔아서 곤궁한 자들에게 후하게 나누어 주는 것이 권장된다(여기에 나오는 명령에는 18:22의 “모든”이 빠져 있다).
놀랜드는 괄호 안에서 18장 22절과 비교하여 ‘모든’이 빠져 있다고 하면서도 그 앞 본 주해에서는 본문에는 없는 ‘다’를 첨가하여 기술한 것이다. 이어서 놀랜드는 이 본문에 대한 해설에서 다시, 소유를 ‘다’ 팔아서 구제하라는 의미라고 기술한다(470-471쪽).
이 단락에서는 일상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관한 염려로부터 자유할 것(하나님은 후한 공급자이시다), 하나님 나라에 전념하라는 것(하나님은 너희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도록 예정해 놓으셨다), 너희 소유를 다(굵은 글씨 강조: 인용자) 팔아서 구제하는 데 나누어 줄 것(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저축해 두는 것과 같다)을 권한다.
놀랜드가 이 본문에 ‘다’가 없는 것을 알고서도 ‘다’를 첨가하여 주석한 것은 14장 33절과 18장 22절을 의식하고 그렇게 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된 주석이며, 한쪽에서는 ‘모든’이 빠져 있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다’를 넣어 주석한 것은 모호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랜드는 14장 33절과 18장 22절에 대한 주석에서 다시 한 번 이와 같은 모호함을 드러낸다.
놀랜드는 “제자의 운명, 그리고 제자도가 실패할 가능성”(14장 25-35절)이라는 본문 가운데,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에 대한 주석에서,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에 대해, “부자 청년이 그렇게 하도록 도전을 받았던 방식으로(18:22) 이 땅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것”(582쪽)으로 기술한다. 그런데 놀랜드는 바로 이어서 사도행전 2장 44절과 4장 32절은 “모든 소유를 문자 그대로 다 처분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582쪽)고 기술하면서 이 주해를 14장 33절에도 적용한다.
그리고 놀랜드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장 18-23절)라는 본문 가운데 22절에 대한 주석에서, 마가복음에 비해 누가복음에서 “첨가된 판타(πάντα, “다”)는 관원이 모든 것을 처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782쪽)이라고 기술한다. 이어서 놀랜드는 관원에게 요구된 모든 것의 포기는, 19장 1-10절에 나타난 삭개오의 고백에서처럼, “자신의 재물을 매우 후하게 나누어 주기는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처분하지는 않는 세리의 모범적인 사례를 통해서 완화된다”(783쪽)고 기술한다.
한 쪽에서는 ‘이 땅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것’이고, 또 ‘관원이 모든 것을 처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해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다른 쪽에서는, ‘모든 소유를 문자 그대로 다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또 ‘자신의 재물을 매우 후하게 나누어 주기는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처분하지는 않고 완화된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와 같이 일관되지 못하고 모순되는 주해를 하면서도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모호한 주해를 덧붙인다. 놀랜드는 “진정한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유를 얻기 위하여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582쪽)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말 자체는 지당한 표현이지만, 이 구절들에 대한 주해로서는 모호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놀랜드가 자신의 주해의 모순과 모호성을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놀랜드의 글에 있다. 놀랜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15장 1-7절) 가운데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1절)에 대한 주석에서, “누가는 “모든”이라는 단어를 과장해서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3:16; 4:15; 7:29 등)”(592쪽)고 기술한다. 이 본문은 희년 토지법과 직접 연관이 없지만, 놀랜드의 이 언급은 희년 토지법 관점에서 14장 33절과 18장 22절을 주해할 때 아주 중요하다. 놀랜드가 누가는 ‘모든’이라는 단어를 과장해서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인용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7장 29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그런데 바로 그 다음 구절인 7장 30절에 의하면, 요한의 세례를 받은 ‘모든’ 백성에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제외된다.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곧 누가에게 ‘모든’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로 ‘예외 없이 모든’이라는 뜻이 아니라 ‘많은’이라는 뜻인 것이다.2) 누가가 사용한 ‘모든’의 이런 의미를 14장 33절과 18장 22절에 적용하여 주해하면, 위에서 언급한 놀랜드의 모순과 모호성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18장 22절을 주해하면,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예외 없이 다’ 팔아서 구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게 있는 것 중에서 많이’ 팔아서 구제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네게 있는 것’은, 팔아서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돈은 팔아서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는 것이므로) 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당시 소유 중 가장 크고 대표적인 것이 바로 토지였음을 생각한다면, 이 본문의 ‘네게 있는 것’은 바로 ‘토지’가 핵심임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구제하라는 말씀은 ‘네게 있는 토지를 많이’ 팔아서 구제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팔아야 할 ‘많은 토지’란, 희년 토지법 관점에 의하면, 바로 자기 기업 몫을 초과하여 소유하고 있는 토지인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희년 토지법을 준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놀랜드는 이 구절들을 주해하면서 당시 소유의 핵심인 토지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희년 토지법이 예수님의 말씀의 배경과 전제에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5. 나가며
놀랜드의 『누가복음(중)』에 대한 희년 토지법 관점의 비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놀랜드는 이 책에서 많은 주석서들과 학술 논문들과 전문 연구서들을 참조하여 요약하고, 자신의 견해를 더하여, 독자가 복음주의적 기초에서 폭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해 준다. 놀랜드가 옳게 주해한 것처럼, 누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은 구약 율법을 강화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특별히 경제법이 중요한 내용으로 포함된다. 그런데 구약 율법 중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경제법은 바로 희년 토지법이다. 놀랜드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희년 토지법을 간과함으로써, 대토지 소유와 지대 전유를 간과한 주해, 그리고 “모든 소유”에 대한 모순되고 모호한 주해를 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구약 율법적 배경의 핵심이 되는 희년 토지법 관점으로 누가복음을 주해할 때, 보다 더 일관된 주해가 가능하고 예수님의 본의에 보다 더 접근한 주해가 가능하다.
* 각주는 첨부한 파일 원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