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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Jul
희년의 사람들-평양 기독 사학의 대모, 백선행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23.189.20 조회 수: 3249
희년의 사람들-박창수 성서한국 경제분과 전문위원
평양 기독 사학의 대모, 백선행
백선행(1848-1933)은 평안도 사람으로, 일평생을 과부로 살면서 가난 속에서 악착같이 번 재산을, 기독교인이 된 후에 조건 없이 사회에 기부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억압했던 암울한 시대에 우국지사들을 비롯하여 겨레로부터 큰 존경을 받은 여성이다. 그래서 그가 소천 했을 때, 평양시민들은 그의 선행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을 치러 주었다. 그런데 백선행은 원래 이름이 없었다. 백선행은 가난한 집 외동딸로 태어났는데, 부친은 그녀가 일곱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백선행은 과부가 된 모친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다가 열네 살에 시집을 갔다. 그러나 남편은 자식 없이 두 해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백선행은 70년 세월을 과부로 지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 그녀를 ‘백 과부’로 불렀다. 그러나 차츰 사람들이 그녀의 선행에 감복하여 성 밑에 과부란 말 대신 ‘선행’을 넣어, ‘백선행’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그녀의 이름 아닌 이름이 된 것이다.
백선행은 모친마저 세상을 떠난 후에, 친족들에게 속아서 그나마 모친이 남겨 준 재산을 거의 모두 빼앗기고 난 후, 홀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자신의 생활신조처럼 그녀는 ‘먹기 싫은 것 먹고, 입기 싫은 옷 입고, 하기 싫은 일 하고’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땅을 산 후에 그 땅을 소작 주고, 그 소작료 수입으로 다시 다른 땅을 사들였다. 그녀는 조금만 수입이 생겨도 땅을 사들였다. 그것은 어쩌면 모친 사후에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자신이 믿을 것은 땅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당시에 흔했던 고리대를 통해 재산을 불리지는 않았다. 성경적 관점에서 그녀가 땅을 사들여 재산을 불려나간 것은 옳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리대를 놓지 않은 것은 옳다고 할 수 있다.
땅으로 부자가 된 백선행은 환갑을 맞은 날부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시작했다. 그 흔한 환갑잔치도 벌이지 않고 여느 때처럼 거칠고 소박한 밥상을 대한 후에,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의 무덤을 찾았다. 거기에서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며, 환갑을 맞아 여생을 뜻있게 살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마을에 들러, 마을의 돌다리를 놓을 수 있도록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녀의 선행의 시작이었다. 백선행은 특히 기독교계 학교에 기부를 많이 하였다. 선교사가 세운 광성보통학교에 전답 1만 4천 평(당시 가격 1만 3천원,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3억 원)을 그 학교의 기본금으로 기증했다. 그리고 추가로 13만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30억 원)을 기부하여 광성학교는 그 돈으로 총독부의 조선인의 사립학교 설립 방해를 극복하고 재단법인을 설립할 수 있었다. 또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숭현여학교에 전답 2만 6천 평(당시 가격 3만원,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30억 원)을 기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 계통의 창덕보통학교에 6천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6억 원) 상당의 땅을, 숭인상업학교에도 1만 3천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3억 원) 상당의 땅을 기부하였다. 이 돈으로 이 학교들은 재단법인 설립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평양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들이 거의 모두 백선행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선행은 학교 경영권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18만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80억 원)이라는 거액을 아무 조건 없이 학교에 기부한 것이다. 진정 그녀는 평양 기독 사학의 대모(大母)였다.
또 독립운동가인 조만식 장로가 찾아와서 평양에 조선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할 계획을 이야기하자, 백선행은 모두 15만원(150억 원)을 공사비와 재단설립비용으로 내 놓았다. 그래서 개관식에서 사회자였던 조만식 장로는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새 공회당의 명칭을 ‘백선행 기념관’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백선행이 소천할 때까지 사회에 기부한 돈은 모두 31만 6천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316억 원)이었다. 그녀가 악착같이 아끼고 일하면서 사들인 땅을 거의 모두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희년의 토지법을 실천한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백선행처럼 비록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지만 그것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희년 정신을 실천하는 부동산 부자 기독교인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처: <플러스인생>(전 <신앙계>) 2008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