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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Feb
서울, 1998년 봄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63.110.89 조회 수: 540
서울, 1998년 봄
박창수(희년사회 연구위원)
필자가 서울 행당동 철거민 마을을 섬기던 때의 일이다. 1998년 봄 어느 일요일 저녁, 마을 어르신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몹시 경직되어 있었고 긴장하고 계셨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가(假)수용단지를 재개발조합 측에 요구하고 있었는데, 가수용단지란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더불어 세입자 철거민의 핵심 요구사항으로서, 임대아파트에 입주하기 전에 아파트 공사기간 동안 주민들이 지낼 수 있는 단지를 가리킨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이 가수용단지를 요구하기 위해 세운 임시 천막을 허물기 위해, 다음날 철거용역반이 들이닥친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이다. 그날 저녁, 마을 주민들과 예배를 드린 뒤, 염려 때문에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남기로 결심했다. 예배 중에도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늦은 밤 홀로 천막에서 내일 피 흘리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기도하였다. 마을에는 천주교 도시빈민사목위원회에서 파송한 수사 한 분이 상주하고 있었다. 그 수사의 숙소에서 함께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가수용단지 건설 촉구를 위해 세운 임시 천막 옆 공터에 모여 앉은 주민들 집회에 참석하였다. 잠시 후에 당시 강제 철거로 악명을 떨친 ‘적준’의 철거 용역 소장이 철거반원들을 데리고 나타나 천막을 허물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할머니가 갑자기 소장에게 달려들었다. 온 몸으로 소장과 충돌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전에 소장에게 발길질을 당한 그 할머니였다. 또 다른 아주머니들이 소장과 철거반에게 달려들었다. 그 중에는 참으로 선한 마음씨를 가진 기독교인 아주머니도 계셨다. 필자가 충격을 받은 것은, 철거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참으로 유순한 눈빛으로 부드럽게 대화 나누던 분들이었는데, 철거반을 보자마자 눈빛이 말 그대로 적개심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며 온 몸을 던져서 육탄으로 돌진하는 모습이었다. 필자는 그 눈빛과 모습에서 이 분들의 마음의 상처와 한이 얼마나 깊은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의 격렬한 저항에 소장과 철거반원들이 일시 후퇴하였다. 격렬한 저항이 자칫 유혈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묵도하고 발언 기회를 요청하여 주민들에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하신 말씀을 나누었다. “우리가 미국 남부로 가져가려고 하는 운동은, 외부의 물리적 폭력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정신적 폭력, 곧 증오심도 거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철거반원들을 향해 거칠게 달려들지 말라고 간곡히 요청 드렸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필자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등 뒤의 철거반원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랐고,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면 그냥 맞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솔직히 고민되었다. 마음 한편에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 ‘그래. 저항하지 말고 주민들과 철거반원들 사이에 서서, 철거반원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면 그냥 맞아 버리자’ 하고 마음을 정했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기적이 일어났다. 철거 용역 소장이 마을 대책위원회의 조직부장 아저씨와 협상을 한 것이다. 소장과 철거반원들 역시 철거민들과 더 이상 충돌하고 싶지 않은데, 자기들을 고용한 재개발조합과 건설회사가 가수용단지 천막을 눈에 가시처럼 여겨서 그것을 허물어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니까, 일단 자기들이 천막을 조용히 쓰러뜨리고 사진을 찍어 갈 테니, 자기들이 간 다음에 바로 다시 천막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기들은 일단 명령대로 허물었는데, 나중에 주민들이 또 세운 것으로 하면 자기들도 재개발조합과 건설회사에 할 말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날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서울, 1998년 봄, 노랗고 아주 높은 천막 울타리로 둘러싸여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외롭고 황량한 철거민 마을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는, 차디찬 겨울을 보내고 맞이한 봄의 따뜻한 햇살이었다. 결국 철거민들은 주거권을 회복했고 승리했다.
그날 피를 흘리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던 필자의 마음을 아는 마을의 조직부장 아저씨로부터 이 세상이 얼마나 비정한지를 듣게 되었다. 이 분들이 철거민 문제 해결을 위해 언론사에 취재를 요청하면 기자들이 하는 말이, “피를 흘려야 보도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직부장 아저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필자에게, “우리는 죽고 싶지 않다. 피 흘리고 싶지 않고 다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기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점에서 피를 요구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어찌 기자들만의 비정함일까? 아, 피가 흘려지기 전에는, 아니 이제는 피가 흘려져도 가난한 이웃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는 비정한 한국 사회여,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네 안락한 집이 무너져 울부짖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게 될 재앙의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