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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Feb
서울, 1997년 겨울작성자: 박창수 IP ADRESS: *.163.110.89 조회 수: 410
서울, 1997년 겨울
박창수(희년사회 연구위원)
필자가 철거민을 처음으로 직접 만난 것은 지난 1997년 겨울이었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날, 필자가 몸담았던 ‘새벽이슬’이라는 기독교 대학생 단체에서 기도회가 있었다. “성탄절을 맞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논의하며 기도했다. 한 자매가 TV에서 본 서울 행당동 철거민 마을을 이야기했다. 철거반원들이 굴삭기로 집을 부수고, 저항하는 마을 주민들을 내동댕이치는 등 충격적인 강제철거 과정이 방송된 마을이었다.
처음 찾아갔을 때 기독교인인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그 분은 예배를 못 드린 지 오래되었다고 하시며, 정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언제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울타리 밖 교회로 나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때부터 약 6개월간 마을의 집회장소로 쓰이던 군용 천막 안에서 일요일마다 저녁 예배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드리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철거민 마을을 방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 시간 전쯤 철거 용역 소장이 왔다. 추기경과 언론사 기자들의 방문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소장을 보자 한 할머니가 거칠게 “가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소장이 천막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밀어내려 하였다. 그 와중에 소장이 발길로 어머니뻘 되는 그 할머니를 거의 이단 옆차기로 걷어찼고 할머니는 나뒹굴었다. 소장이 큰 소리로 주민들을 협박하고 돌아간 다음, 한 분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소장이 일전에 와서 철거민들을 협박하면서 사용한 회칼이었다. 그 철거 용역 회사가 바로 당시에 강제 철거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적준’이었다. 마을 아저씨들은 철거반원들에게 두들겨 맞아, 그 중에는 갈비뼈가 부러진 분들도 계셨고, 아주머니, 할머니들도 임시로 만든 비닐집에서 오래 지내시다가 한기(寒氣) 때문에 몸이 상한 상태였다.
연세가 80세 정도 되신, 그 마을에서 가장 연로하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신앙이 깊은 분이셨다. 그 아드님은 철거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이셨고, 연세가 60세 가까이 되셨다. 할머니가 우리를 좋아하셔서 비닐집으로 몇 번 찾아뵈었는데, 아드님이 교회를 안다닌다고 걱정하시곤 하셨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는데 비닐 집안으로 외풍이 너무 심해서 어떻게 할머니가 이런 곳에서 견디실까 걱정스러웠다. 건강을 여쭈어 보았더니, 외풍 때문에 추워서 온 몸이 아프다고 하셨다. 아는 한의사 선배에게 마을 주민들을 위해 한방 진료를 토요일마다 해 줄 수 있는지 부탁드렸다. 그 선배는 기쁨으로 해 주었다. 마을 어르신들과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정말 기뻐하셨다. 그 선배는 침을 놓고 진료를 하며 주민들과 편안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다가 간간이 예수님을 전하였다.
두 번 정도 서울 동부 지법에 갔다. 법정에서 판사는 검은 법복을 입고 앉아 있었고, 마을의 위원장 아저씨와 부위원장 어르신은 낡은 옷을 입고 서 계신 반면, 재개발조합과 건설회사 측의 변호사는 비싼 양복을 걸치고 앉아 있었는데 무기력해 보였고 단지 돈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었다. 판사는 나이가 지긋하였는데 철거민의 처지를 동정하는 듯하였고, 양측에 원만한 합의를 주문하였다. 그 법정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생각했다. 판사가 앉은 자리에 주님께서 좌정하실 것이요, 탐욕에 눈이 멀어 힘없는 이웃들을 내쫓는 데 가담한 자들은 모두 피고석에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마을에서 예배드리던 군용 천막은 백열전구 하나가 있었고, 나무장작으로 불을 때는 난로가 한 가운데, 그리고 군대 내무반처럼 출입구 좌우로 높은 평상이 있었다. 그곳에서 이 분들을 위해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강하고 충만하게 임하셨다. 많은 집회에 참석하였지만 이 천막에서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한량없이 임하신 경험은 드물다.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때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는 목적은 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희년(禧年)을 선포하기 위함이라는 말씀(누가복음 4:18-19)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