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7.
캐나다 작은 도시에 거주하는 탈북 청년 둘을 만났었다. 청소년기 우리집에서 함께 생활했기에 아들 같은 친구들이다. 이민자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데 열심히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어서 대견하고 고마웠다. 한편 같은 시기 우리집에서 살았던 한 아이는 대학졸업 후 취직도 했었는데, 사행성 게임에 빠져 모든 것을 잃고 아직도 헤매고 있어서 마음이 무겁다.
사랑스러운 대상이 있는가 하면 한숨이 나오는 대상도 있다. 자녀나 가족 중에도 그럴 수 있고 공동체에서도 그렇다. 정의를 세우겠다는 세상의 일반적인 선택은 잘못된 암세포를 도려내듯이 합당한 판단과 처분이다. 그 관점에서는 탕자를 너그럽게 대한 아버지나 1시간 일한 품꾼에게 온종일 일한 품꾼과 동일한 보상을 하는 포도원 주인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선함이나 신실함과 수고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전혀 사랑스럽지 않고 한숨과 탄식이 나올 때에도, 주님의 사랑은 변함없다. 돌이키기를 바라시며 계속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신다. 마지막이 되어 더 이상 기회가 없어도 사랑은 계속된다. 그래서 십자가의 강도도 은혜를 입는다. 그 사랑을 배우면 좋겠다.